하트의 반(VAN) - 2-21 필센(9)
군도의 부수장은 사방에 깔려 있는 자신의 병사들을 보고 있었다. 중간쯤 있는 병사의 장벽에서 함성은 커져갔고 싸움은 접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쪽에서는 지금 눈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비롯한 네 명만이 있을 뿐이다.
조금 전 보여준 남자의 검은 진짜였지만 이만한 대군이 한 사람에게 몰살당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군도인의 희생이 작을 거라 볼 수도 없었다. 방금전까지 남자가 보여준 실력을 생각하면.
“이름을 밝혀라.”
낮고 위협적인 음성으로 부수장이 말했다.
“엘리어트 네쉬하트.”
“어디서 온 자냐.”
대답이 없었다.
“출신도 밝히지 못하는 자를 믿으라고 나섰나.”
“내 판단으로 여기 있고 그래서 어느 영주국도 이 일과 상관없으니 말 할 수 없는 것 뿐입니다.”
엘리어트가 말했다.
부수장은 엘리어트의 주위에 쓰러져 있는 군도 병사들의 시체를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지금, 엘리어트가 특정 영주국에 속하지 않다고 하는 것은 그의 목적이 영주국과의 이해 관계에 얽혀 있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도 했다.
“군도는 형제에게 한 짓을 잊지 않기 때문에 지금껏 살아남은 곳이다.”
병사들의 시체가 더 이상 늘어나지 않으려면 이제 행동을 정해야 했다. 그 말에 따를지 아니면 희생을 감수하고라도 그를 죽여 없앨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위험에 빠졌던 적도 있었지.”
입을 다물고 부수장은 엘리어트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등을 곧게 펴며 갑자기 그가 엘리어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엘리어트의 뒤에서, 아비크를 비롯한 두 사람이 그런 부수장의 행동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부수장이 바로 앞에 걸어왔을 때까지 엘리어트는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몇 발 떨어진 곳까지 오자 이윽고 걸음을 멈추며 부수장은 엘리어트의 얼굴을 다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엘리어트 역시 피하지 않고 그 시선을 마주 대했다.
“군도를 생각하라는 건방진 충고.."
피하지 않고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엘리어트를 향해 이윽고 부수장은 말했다.
"좋다. 받아들이지.”
수장이 쓰러진뒤 어느 정도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면이 없지 않은 진격이었다. 며칠 동안 분노에 사로잡혀 그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 앞에 나타난 청년을 통해 부수장은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허나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토렌이나 다른 누구도 아닌 엘리어트 네쉬하트, 그 땐 네 목이 가장 먼저 땅에 떨어질 것이다.”
부수장의 목소리는 위협적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하고 있는 말은 경고나 협박이 아닌 진실이라는 걸 엘리어트는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응하는 엘리어트의 대답 역시 허세나 과장이 아닌 진실이었다.
눈 앞에 서서 말하는 엘리어트를 부수장은 여전히 무서운 기세로 응시했다. 그러나 이 뛰어나고 건방진 자가 라곤에 있다는 것이 그에게는 처음으로 인상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디, 두고 보지.”
나지막하고 묵직한 음성으로 부수장이 말했다.
에델 레이츠와 테이런 린저는 아스드의 선봉에 서서 달려 들어오는 군도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아스드 내에서도 노련한 기사였고 실력은 아비크에 버금갈 정도였다. 벌써 수백을 상대하며 두 사람은 군도인을 막아내고 있었다.
“레이츠 경.”
레이가 부르는 소리에 마지막 군도 병사를 쓰러 뜨리며 에델 레이츠가 돌아 보았다.
“보십시오.”
활을 손에 든 채 앞으로 달려온 레이가 앞을 가리켰다. 그 손끝이 가리킨 곳에 있던 군도인들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고 있는 것을 보며 에델 레이츠는 멈칫했다. 아무 이유없이 갑자기 군도인들이 후퇴하고 있는 것을 그는 보았다.
군도의 병사들은 필센의 영토 밖으로 벗어나는데에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새벽이 지날 때쯤이 되서야 그들은 국경 밖으로 빠져 나갔다. 인원이 많다보니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반나절도 넘게 걸렸다.
언덕 어느 높은 곳에서 엘리어트는 군도인들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지켜 보고 있었다. 동이 트는 새벽, 언덕 위로 떠오르는 태양으로 아침 햇살이 엘리어트의 주변에서 서서히 빛을 내기 시작할 때쯤이 되서야 지평선 끄트머리까지 그들은 물러났다.
“사라질 때도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자들이군요.”
뒤에서 헨터만이 나타나 그를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엘리어트 옆에서 헨터만은 언덕 아래 저 멀리 보이는 군도인들을 보았다. 이제 꽤 멀어져 그들은 까만 점처럼 느껴졌다.
“정말 이대로 일단락 된 겁니까?”
군도가 생각 외로 순순히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헨터만이 중얼거렸다.
“네.”
“다시 또 오면 어쩌죠?”
“그러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군도의 부수장은 헛말을 하는 자가 아니다. 난생 처음보는 자신과 약속을 하고 물러설 정도니 분명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 물론 자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상황은 또 달라지겠지만.
“엘리어트.”
언덕 위로 시즈가 뛰어 올라 왔다. 그 뒤에는 가슈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이 뒤따라 오고 있다. 상황이 완전히 종료될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그들은 이제 성으로 돌아간 필센 병사들에게서 떨어져 나온 참이었다.
“여태 어디 있었어요?”
엘리어트를 보고 뛰어오다가 옆에 있는 헨터만을 발견하고는 시즈가 의아한 듯 물었다.
“지금껏.”
싸우는 동안 헨터만은 전혀 보이지 않았으니 어디서 뭐하다 이제 나타났나 싶은 얼굴이었다.
“싸움은 내 할 일이 아니죠.”
그 시선에 헨터만이 대꾸했다.
“그건 여러분 몫 아닙니까.”
밤 동안 그는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쨌든 고생했습니다 다들.”
다섯을 향해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돌리며 헨터만은 어제 밤의 싸움터를 다시 응시했다.
“이번 일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아직도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군도의 행렬을 응시하고 있는 엘리어트를 향해 헨터만은 말했다.
“그렇게 좋은 사람 아니라더니..”
그가 덧붙였다.
“제법 좋은 사람입니다 당신."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엘리어트의 시선이 힐끔 그를 향했다.
“내가 그런 건 날 위해섭니다.”
자신의 행동이 모두 아시오트 글렌 후작과 닿기 위해서라는 것은 헨터만 본인 입으로도 말한 적 있다.
“아니죠.”
그러나 거기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는 듯 헨터만은 말했다.
“당신과 그리고 저 사람들을 위해서였죠.”
멀리 사라지는 군도의 행렬을 볼 수 있을 만큼 언덕은 근처에서 제일 높았는데 그러다보니 군도 뿐 아니라 조금 더 가까이 있는 마을도 한 눈에 보였다.
싸움이 끝나고 마을 사람들이 영주의 성에서 마을로 이어진 길위로 하나 둘씩 나타나고 있었다. 마을이 비어 있었다고 해도 휩쓸렸다면 사람들은 삶의 터전을 잃었을 것이다. 밤새 무사한 집들을 보고 그들은 안도하며 마을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산채에서 도둑들한테 그랬던 것처럼.”
카뷔에 에르디스를 흔들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도둑들이 지하 감옥에서 도망칠 수 있게 해주었던 것도 역시 그였다.
엘리어트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살짝 헨터만이 미소지었다.
"아닙니까?"
“마음대로 생각하십시오.”
길게 대꾸할 마음은 없었는지 헨터만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곧 엘리어트가 말했다.
“진짜 이상한 녀석일세.”
그러고 있는데 뒤에서 아비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체 왜 자꾸 얼쩡대?”
“뭘 얼쩡대?”
시끄러운 소리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니 좀 떨어진 곳에 있는 나무 앞에 서서 아비크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나머지 네 사람은 그 주위에서 아비크의 뒤에 서 있는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너 찾아 온 거 아니니까 상관마.”
방금 전 언덕 위로 올라와 제일 먼저 아비크와 눈을 마주친 티에리가 그를 향해 화를 냈다.
“괜히 앞에서 왔다 갔다 하고 있는데 상관 안 할 수가 없잖아.그럼 나타나질 말던가.”
엘리어트와 헨터만이 이쪽으로 다가오자 아비크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녀석 자꾸 와서 기웃거려요.”
아비크는 말했다.
“수상하게.”
“수상하긴 뭐가 수상해?”
못마땅한 듯 아비크를 향해 말하며 티에리는 이쪽으로 걸어오는 엘리어트를 보았다. 엘리어트의 시선에 확인하듯 그는 입을 뗐다.
“당신이 엘리어트 네쉬하트?”
엘리어트 역시 자꾸 나타나는 티에리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그를 보았다.
“그런데?”
대답하는 소리에 티에리는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당신한테 할 말이 있어.”
“무슨 말?”
“너 말고.”
옆에서 또 끼어드는 아비크를 향해 티에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왜 성질이야..”
아비크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묻지도 못해?”
“얘기 해.”
아비크와 옥신각신하는 티에리를 향해 엘리어트는 말했다.
“자꾸 나타나는 걸 보니 진짜 할 말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다들 입 다물고 자신쪽을 쳐다보자 티에리는 침을 다시 꿀꺽 삼켰다.
“둘이서만 했으면 좋겠는데.”
그가 말했다.
“얼씨구.”
뜬금없이 나타나 요구도 많다고 생각하며 아비크가 살짝 콧방귀를 뀌었다.
나머지 사람들과 좀 떨어진 곳으로 걸어오자 엘리어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티에리를 향해 돌아섰다.
“여기면 되겠어?”
아직도 망설이는 기색으로 티에리는 고개를 돌려 아비크들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엿볼 녀석들 아니니까 걱정할 거 없어."
나무에 가려져 그들의 모습이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는 걸 확인하는 그를 향해 엘리어트가 말하는 동안 침을 다시 삼키며 티에리는 천천히 입을 뗐다.
“일단, 보여 줄 게 있어.”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엘리어트가 그를 쳐다보는데 티에리가 손을 올렸다. 갑자기 눈에 손가락을 집어 넣는 그를 무슨 짓을 하나 싶어 엘리어트가 쳐다보는 동안 티에리는 눈에서 작은 유리알을 꺼냈다.
그가 손을 내리자 선명하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가 엘리어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걸 보고, 이번에는 엘리어트가 가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 티에리는 영주의 성 뜰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웅크린 채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기사들이 우글거리는 영주의 성 근처에는 절대 얼씬 않았겠지만 어쩌다보니 피신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섞여 여기까지 왔다.
성 안뜰 한 쪽 구석에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몸을 웅크린 채 앉아 티에리는 아침이 오길 기다렸다. 어제 아비크에게 얘길 듣고 노이를 비롯한 나머지 사람들을 마을 밖으로 내보냈지만 그만은 가지 않았다.
전쟁을 피하든 추적자들을 피하든 도망치는 것은 신물이 났다. 아비크로부터 얘길 들었을 땐 빨리 피해야 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전쟁이라고 해서 별반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자신보다 더 어린 시즈나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과연 전장에서 어떻게 싸우는지 그는 보고 싶었다. 그래서 노이들만 피신시키고 그는 다시 마을로 돌아왔다. 그런데 마을로 오자 영주 기사들이 나와 마을 사람들을 성으로 데려갔고 괜히 혼자 따로 움직이려고 하다가는 의심을 살 것 같아서 그 역시 사람들 속에 섞여 영주의 성 안까지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성에서 입이 가벼운 몇 몇 병사들이 쑥덕거리는 통에 엘리어트에 대한 얘기를 듣게 되었다.
사실, 티에리에게는 비밀이 하나 있었다. 때문에 더더욱 베이그릴스의 마을을 떠나야 했던 비밀. 그것은 자신의 눈동자에 대한 것. 어느 날 갑자기, 변해버린 자신의 눈색에 대한 것이었다.
쓰고 있는 검은 유리알로 가리고는 있지만 들켰다간 그 날로 베일리 씨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참형을 면치 못하게 될 수도 있는 붉은 눈.
왜 갑자기 변했는지 알 수 없어 그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기 싫어 더 그래야 했지만 눈동자 색 만이 그가 마을을 떠난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다. 늘 생각해온 대로 그에게는 다르게 살아갈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선 전혀 보이지 않아 그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는 돌파구.
그러다 그렇게 엘리어트가 누군지를 듣게 되었고 그런 자와 안면이 있다는 사실 하나에 기대 답답한 이 상황에서 벗어날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얻어보고자 그는 엘리어트를 찾아왔다. 사실 자존심은 좀 상하지만 지금은 이런 거 저런 거 따질 때도 아니었다.
“그건 어디서 났어?”
손바닥에 떨어진 얇은 유리알을 유심히 보며 이윽고 엘리어트는 물었다. 아주 작고 얇은 유리알로 함부로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오니트 아가씨가.”
티에리는 대답했다. 그 대답에 엘리어트의 기색이 살짝 변했다. 셰릴의 이름이 여기서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한 모양이었다.
“눈색은 가렸지만 그래서 더 베이그릴스에서는 벗어날 수밖에 없었어.”
그런 엘리어트의 기색을 느끼며 티에리는 말했다.
“거기 있다 들키면 그 땐 그 아가씨들이나 베일리 씨들한테 정말 큰 일이 생길 테니까.”
“너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걸 준 적 있어 그녀가?”
엘리어트가 그를 향해 다시 물었다. 짧게 티에리가 고개를 저었다.
“나뿐이야.”
그가 눈이 변했을 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던 그녀가 눈색을 가릴 방법을 찾아왔다. 그도 경황이 없을 때라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이만하면 설명은 다 됐다고 생각했는지 누가 보기 전에 다시 유리알을 눈에 집어 넣는 티에리를 보며 엘리어트는 생각했다. 데비가 유리 세공을 할 줄 알았을까. 그건 아마 아닐 것이다. 저 정도로 얇고 색이 들어간 유리알을 만드는 건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술인데다 저런 것은 웬만한 재주론 만들 수가 없다.
아니면, 이런 것에 손이 닿으려면 헨터만 정도는 되어야 가능할 텐데 그런 자를 그녀가 알고 있었을까.
안좋은 예감이 들었다.
데비.
기하족 일에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을까.
“나한테 이런 얘길 하는 건..”
여전히 셰릴을 생각하며 엘리어트는 말했다.
“무슨 이유야?”
“누가 기하족을 마구잡이로 잡아 가는 것 같은데 거기 휩쓸리지 않게 도와줬으면 해서.”
의외의 대답에 엘리어트는 고개를 들었다.
“잡아가?”
티에리는 끄덕였다.
“응.”
“누가?”
“그건 모르겠어.”
티에리는 말했다.
"눈색이 변한 자들을 잡아가나 했지만 그게 아니라 기하족 중에 젊은 녀석들은 아무나 붙잡아 가려는 녀석들이 자꾸 나타나고 있어서."
처음에는 자신을 잡아가려나 했지만 그게 아니라 노이나 다른 사람들한테도 손을 대고 있었다. 누군지 알 수도 없고 알기도 싫었지만 이대로면 또 어디로 끌려가서 짐승처럼 살게 될 지도 모른다.
엘리어트는 잠시 티에리를 응시했다. 기하족을 잡아간다면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건 딱 하나, 랭더발이다. 그들의 검은 기사단. 그러나 이렇게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다 기사단을 만들 수는 없다. 더구나 검은 기사단과 달리 눈이 변했다고 해도 티에리는 아주 평범한 청년이었다.
“이런 부탁 하는 게 이상하다는 건 알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는 전혀 모른 채 티에리는 말을 이었다.
“도움을 구해도 될 만한 사람 같아서.”
상관도 없는데 이만한 싸움에 끼어든다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군도를 상대할 만한 배짱과 실력이니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고 셰릴과 아는 사이인데다 옷감 가게 앞에서 시장 사람들을 쫓아내 준 적도 있으니 기하족에 대한 편견은 그래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미안하지만 나도 지금 누굴 도울 처지가 아냐.”
그러나 그런 기대와 달리 엘리어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절이었다.
“그런 도움은 다른 데에서 얻어.”
데비와 얽혀 있기는 했지만 여러 가지 상황에 걸쳐 있는 엘리어트가 티에리까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잠깐 움찔하는 것 같더니 더 말하지 않고 티에리는 가만 있었다. 그 역시 전적으로 기대하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좀 실망하는 것 같았지만 크게 당황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야 할 수 없고..”
잠시 후 맥없이 그가 중얼거렸다. 성급하게 비밀을 밝혔던 건 그렇게 안하면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였다. 자신의 눈동자를 보고도 남자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입단속을 부탁하지 않아도 누군한테 말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얘기라도 들어줘서 고마워."
이제 할 말은 다 끝났는지 그렇게만 말하고 의외로 순순히 그가 몸을 돌렸다. 큰 비밀을 밝힌 것 치고는 순순히 물러나며 어깨를 늘어 뜨린 채 걸어가는 티에리를 뒤에서 엘리어트는 조용히 보고 있었다.
일렌 키히스는 혼자서 산 속에 있었다. 말에 오른 채 그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전장에서 멀어져서 인지 이곳은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하다. 그런 조용한 산속에서 그는 방금 전 필센에서 물러간 군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이기려 든 게 아니라 엘리어트 네쉬하트는 군도의 부수장을 찾아내 담판을 지었다. 뭐라고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말로 군도의 부수장을 움직였다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역시 제법이군.’
혼란한 틈을 타 엘리어트에게 접근하려 했지만 그는 중간에 생각이 바뀌었다. 싸움터 한 가운데서, 주의가 흐려지면 공격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방에서 적들이 달려드니 오히려 날이 서서 가까이 접근하는 누구에게도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 밀었다.
군도인을 상대하는 엘리어트는 그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실력을 보여 주었다. 그것이 끝인지도 알 수 없다. 카뷔에 에르디스에게 말한 것처럼 목숨 걸고 접근한다고 해도 정면 승부에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싸움의 한 가운데서 군도의 부수장과 마주 서 있던 엘리어트를 보다가 문득 그를 사라지게 할 방법이 떠올랐다. 죽이지 않고 그의 손발을 묶을 방법이었다. 승산이 낮은 싸움에 자신을 거는 것보다 그 편이 낫다.
‘이번엔 어떻게 빠져 나갈지 두고 보지.’
천천히 눈을 뜨며 그가 고삐를 한 번 내둘렀다.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말이 산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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