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6 변증(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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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의도가 모호하게 시작된 회의가 끝이 난 뒤, 영주국들이 하나 둘 씩 페이테드를 떠나는 동안 아침 일찍부터 칼릭스 제이더는 레프틴 영주의 막사 안에 있었다.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소?”
이른 아침의 정체된 공기와 함께 아직 어둑한 막사 안에서 레프틴의 영주가 그에게 물었다.
막사 안에는 그를 비롯해 벨드어트와 리슈인, 필로티의 최고 행정관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쉬 혈맹국 소속으로 레프틴과 벨드어트는 선대 영주때부터 쉐네드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리슈인과 필로티의 경우 칼릭스가 여기 오기 전 미리 포섭해 놓은 곳이었다.
“랭더발이 혈맹국 내에서나 위로 올라 설 생각인줄 알았지 설마 이런 얘길 꺼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소.”
리슈인의 최고 행정관이 말했다.
“그러게 말이오.”
필로티 행정관 역시 심각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그 자가 한 얘기를 이루려면 그 첫발은 아쉬일 수밖에 없습니다.”
랭더발이 한 얘기에 다들 놀란 것 같았지만 다행히 네 곳 다 마음이 변하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칼릭스가 대꾸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것 뿐이니.. 놀랄 것도 아니고요."
원하는 바를 이루려면 지리적인 여건이 밑바탕이 되어야 할테니 그러려면 먼저 아쉬 혈맹국부터 손에 넣어야 할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말을 이었다.
"그럼 역시 아드리엥이란 거요?"
아쉬를 손에 넣는다는 것은 혈맹 수장인 아드리엥부터 치지 않으면 안된단 뜻이다.
"글쎄요."
애매하게 그가 대꾸했다.
랭더발의 카뷔에 에르디스가 꺼낸 말은, 결국 그가 이 북쪽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것에 지나지 않을 뿐 다른 아무 의미도 없었다. 쉐네드 입장에서, 순순히 그렇게 되게 둘 마음은 없다.
막사 바로 근처에서 행렬이 움직이는지 소란스러운 기운과 함께 말발굽 소리가 바로 곁을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애초에 랭더발이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것은 곧 쉐네드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아올 기회가 될 거라고 칼릭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어제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예상이 맞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랭더발의 행보를 따라 움직인다면 어렵지 않게 자신 역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그렇게 움직이기 위해서 사실 그 전에 먼저 한 가지 알아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북쪽 지방 전체에서 아드리엥의 데겔 카비안을 제외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영주인 파버스 프레빈의 속내였다.
안개속에 가려진 것처럼, 여기저기서 이름을 조금씩 흘리고 있었지만 선뜻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프레빈 영주의 속내를 알기 위해 칼릭스는 페이테드로 오기 전부터 줄곧 그와 대면할 기회만을 노렸다.
쉽게 기회가 오지 않다가 파비앙의 막사에 도둑고양이처럼 숨어들어 조금 전에야 그리고 겨우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칼릭스는 조금 전 막사 안에서 마주섰던 프레빈 영주를 생각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나 뭐라도 알아내기 위해 애를 썼지만 프레빈 영주로부터는 애매한 소리만 듣고 그가 무슨 생각으로 랭더발을 돕고 있는지 의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단지 파버스 프레빈이 단순히 랭더발에 끌려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막연히 그런 느낌을 받았을 뿐이다. 그 정도로 뭘 알아냈다고 할 수도 없고.. 만날 기회를 몇 번이나 노렸던 것에 비해 별 소득없이 그는 또 그렇게 도둑 고양이처럼 살짝 막사 밖으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아드리엥으로 먼저 화살이 돌아간다면 우리로서는 시간을 벌 수 있는 셈이 될테니 그건 다행일지도 모르겠소."
칼릭스가 한참 조용하자 필로티의 최고 행정관이 헛기침을 하며 입을 뗐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반드시 그럴 거란 건 아닙니다."
아직도 프레빈 영주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쪽 말을 영 흘려 듣고 있던 건 아니었는지 칼릭스가 그 말에 대꾸했다.
“영주 성격이 보통이 아닌 것 같던데, 그럼 심기를 거스른 곳부터 본보기를 보일 수도 있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 쉐네드나 또는 아스드 같은 곳이 위험하죠.”
농담처럼 그가 덧붙였다.
"순서를 따지면 우리보다는 아스드가 더 그렇겠지만."
쉐네드도 랭더발의 심기를 일부 불편하게 하긴 했지만 에르디스 영주에게 더 각인이 된 곳은 아무래도 아스드일 것이다.
어제 회의 동안 있었던 일도 그렇고 그 동안 랭더발의 발목을 잡은 게 엘리어트 일테니 가장 거슬리는 아스드를 먼저 제거하려 들 수도 있다. 니므 혈맹국에 속하긴 해도 랭더발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더 그랬다.
“아스드 걱정이야 우리가 할 건 아니니, 만약 아쉬가 먼저라면.. 보아하니 절반 정도가 랭더발로 돌아선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아드리엥도 대응하기가 쉽지는 않을 거요. 이렇게 쉽게 아쉬에서 등을 돌린 곳이 생긴 것도 심적으로 부담일 거고.”
리슈인 최고 행정관이 다시 말했다.
“랭더발의 행보를 예측하고 있었다면, 부담이라기보다 그 정도면 선방했다고 생각할 겁니다.”
아드리엥 공자가 이 자리에 나타났기에 일부는 망설였을 것이다. 신 카비안 공자가 설마 그 점 때문에 이 자리에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니었다면 더 많은 영주국들이 돌아섰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충분히 대응할 수 있을 거고요.”
“대응한다고해도 어쨌든 아드리엥이 먼저 랭더발과 맞닥뜨릴 때까지 우린 일단 가만 있어도 되는 거란 뜻이 아니오?"
연거푸 확인하는 소리에 칼릭스는 미소지었다.
"꼭 안심하고만 있을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그렇겠죠."
이제부터 아드리엥에게도 등을 돌리게 되는 걸 불안해 하는 필로티의 최고 행정관을 안심시키기 위해 그가 다시 말했다.
“당신은 어쩌겠소?”
지금까지 묵묵히 있던 벨드어트의 최고 행정관이 칼릭스를 향해 물었다.
“이대로 쉐네드로 돌아갈 거요?”
그는 말을 이었다.
“돌아가서 역시 랭더발에 대비하겠소?”
쉐네드와 뜻을 같이 하기로 한 지금, 그의 행보에 힘을 싣어주는 게 벨드어트나 리슈인, 그리고 여기 모인 다른 영주국의 역할이었으니 그의 뜻을 알아야 했다.
“그래야죠.”
안심하는 필로티 행정관에게서 이제 리슈인 최고 행정관에게 시선을 돌리며 칼릭스는 말했다.
“하지만 가만히 대비만 할 게 아니라 먼저 치고 나갈 길을 모색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칼릭스의 얼굴에서 어느새 웃음기는 사라지고 없었다.
레프틴 영주의 막사에서 칼릭스가 얘기중인 동안 러셀은 막사 밖에 혼자 서 있었다. 막사 입구 근처에 서서 그는 지금 돌아가는 행렬들을 보고 있다.
새벽부터 하나 둘씩 자리를 뜨는 것 같더니 지금은 영주국들이 대거 야영지를 이탈하고 있다. 랭더발의 안건을 듣고 나니 이곳에 오래 더 있고 싶은 자들은 없는 것 같았다.
그를 제외한 이벨이나 나머지 사람들은 칼릭스의 지시로 다른 영주국 막사 안에서 칼릭스의 전달 사항을 얘기하고 있다. 다 같이 한꺼번에 모여 있는 걸 랭더발이나 반대편 영주국들에게 보여 봤자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쉐네드의 손을 잡은 영주국들은 지금 몇 곳에 나뉘어 모여 있다.
발아래 튀어 나와 있는 작은 돌부리를 러셀은 무심히 옆으로 밀어 냈다. 이벨들과 같이 갔어도 됐지만 굳이 남은 것은 칼릭스를 혼자 둘 생각이 없어서였다.
경비대장인 자신의 역할에는 다음 영주의 자리에 오를 칼릭스 제이더의 신변을 안전히 지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고 러셀은 생각했다. 그러니 웬만해서는 그의 옆을 떠날 생각이 없다. 물론 그것이 칼릭스의 검이 형편없기 때문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러고보니 만약 칼릭스가 그 엘리어트란 자와 맞부딪친다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그리로 가자 러셀은 미간에 살짝 주름을 잡았다.
그는 아직 엘리어트 네쉬하트란 자의 검을 본 적이 없다. 칼릭스의 경우라면 아주 오래전에 있었다. 최근에는 검을 뽑아든 일이 없어서 확신하긴 어렵지만 예전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면 그 자와 맞붙는다고 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야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쪽을 향하는 시선이 느껴졌다.
말들이 왔다갔다 하고 주변에서 움직임이 부산스러운 와중에 옆으로 눈을 돌리자 근처 막사 사이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는 여자와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언제 거기 있었는지 가만히 이쪽을 보고 있다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여자가 움찔했다.
러셀은 자신을 쳐다보고 있던 여자를 옆 눈으로 힐끔 보았다. 냉랭한 시선과 마주쳤으니 어제 같이 그냥 빨리 자리를 피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당황한 것 같으면서도 여자는 자리에 가만 있었다.
"뭘 보고 있어?"
피하고 돌아서는 것도 아니고 그저 가만 있으니 잠시 있다가 그가 먼저 말했다.
계속 시선을 마주대하고 있던 건 그쪽이면서 말을 건 건 또 뜻밖이었는지 그녀는 조금 전보다 더 당황한 얼굴이 되고 있었다.
"일부러 보고 있던 건 아니에요."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이윽고 그녀가 더듬거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이엘과 함께 와서 그녀가 안에서 얘기하는 동안 피아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막사와 막사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행렬들을 그녀 역시 구경하고 있다가 그 사이로 얼핏 러셀을 발견한 참이다.
"어제 밤 용건이 아직 안 끝난 모양이군."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작센스테인 막사 앞인 걸 보며 무심한 얼굴로 러셀이 중얼거렸다. 아직 돌아가지 않고 영주들과 접촉중인 건 아스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엘리어트 네쉬하트와 아스드. 그들의 행동 반경도 자신들과 이제부터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역시 칼릭스와 부딪칠 수 밖에 없다. 무슨 이유에선지 칼릭스는 아스드를 동지가 아닌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지금까지 행동했다. 적도 경우에 따라 아군으로 이용할 줄 아는 칼릭스가 왜 그런 판단을 했는지 그로서는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다.
"그 쪽은, 어때요..?"
피아를 내버려 둔 채 다시 또 여러가지 생각을 떠올리는데 의외로 그녀가 말을 걸어 왔다.
"아직 여기 있으니 피차 마찬가지지."
어차피 여기 있는 걸 그녀가 본 이상 그 정도는 비밀이랄 것도 없어서 순순히 그가 말했다.
"그게 아니라.."
그걸 묻는 게 아니었는지 말을 흐리는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물고 있는 걸 보고 그제야 러셀은 그녀가 뭘 말하고 싶은지 알았다.
"몇 달이 지났는데.."
언젠가 아스드에서 다친 적 있는 어깨를 무심코 뒤로 돌리며 그가 대꾸했다.
"애초에 별 것도 아니었고."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뒤로 돌리는 그를 피아는 가만히 바라 보았다. 이센제의 지하 창고에서 있었던 일은 그냥 묻어두기로 했지만 그날 그가 복부와 어깨에 중상을 입었던 건 사실 좀 신경이 쓰였다.
"아스드는 적까지 걱정해줄 여유도 있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괜찮은가보다 라고 그녀가 좀 안심하고 있는데 그 얼굴을 쳐다보며 러셀이 무심히 말했다.
"그러니 그 때 날 도와줬겠지만.”
“먼저 절 구해준 건 로이어트 씨에요."
작게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전 아스드 사람은 아니고..."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의외란 생각을 러셀이 다시 하는 동안 피아는 말을 이었다.
"아스드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거에요."
이엘에게 미안해서라도 더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아스드가 아니면?"
아스드 소속이 아니란 말에 러셀이 묘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냥 성에서 일하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어디 소속이야?”
다시 묻는 소리에 피아는 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굳이 비밀도 뭐도 아닌 얘기지만 어쩌다보니 대화가 점점 길어지고 있다. 말을 건 건 자신이었지만 이엘을 생각하면 그래도 되나 싶은 마음이 이제서야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뭐라고 할지 대답을 머뭇거리는 그녀를 힐끔 보다가 러셀이 말했다.
“대답할 거 없어. 꼭 알고 싶어 물은 건 아니니까.”
갑자기 그가 레프틴 막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얘기 재밌었어.”
갑자기 말을 끝내고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피아가 어리둥절하게 쳐다보았다.
“피아.”
그러고 있는데 이엘이 뒤에서 다가왔다. 그제야 피아는 그녀가 작센스테인 막사 안에서 나왔다는 걸 알았다.
"이엘."
피아의 옆으로 걸어와서 이엘은 피아가 쳐다보고 있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나와 피아를 찾다가 그녀는 조금 전 피아가 쳐다보고 있던 곳에 누가 서 있는 걸 얼핏 보았다.
“방금 그 사람..”
남자는 바로 자리를 벗어났지만 분명 피아와 얘기 중이었던 느낌을 떠올리며 이엘은 물었다.
“어제 그 사람 아니에요? 쉐네드 기사.”
얼핏 보긴 했지만 그래도 바로 어제밤에 가슈에게 얘길 들은지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피아를 도와줬다는..”
이엘이 봤다면 거짓말 할 건 아니라 피아가 끄덕였다.
“별 얘기를 한 건 아니고요. 그냥...”
혹시 오해를 할까 싶어 피아는 서둘러 말했다.
“그냥..”
그러나 뭐라고 해야할 지 말문이 막혔다. 곤란해 하는 것 같자 이엘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얘기를 한 것도 아닐텐데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되요.”
아스드 입장에서야 적이라면 적이라고 할 수 있는 쉐네드 기사였으니 서로 담소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만 피아로서는 도움을 받은 적 있으니 마주쳤다면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라고 이엘은 생각했다.
“가요.”
“그게 아니라.. 사실은요.”
자신이 곤란해할까봐 말을 막으며 돌아가자고 하는 이엘을 보자니 더 불편한데다가 그녀에게 계속 거짓말을 하자니 그것도 계속 마음에 걸릴 것 같아 피아는 입을 뗐다.
“사실은.. 예전에 이센제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 놓듯 잠시동안 이센제의 창고에서 있었던 일을 피아가 이엘에게 털어 놓기 시작했다.
영주국들이 페이테드를 전부 빠져 나오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랭더발에 손을 들지 않은 영주국들이야 얼른 이 자리를 떠나고 싶어 하는 게 이해가 됐지만 랭더발의 편이 되기로 한 영주국들도 의외로 자리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페이테드에서 나온 안건의 강도에 비해 표면적으로는 조용하고도 신속하게 자리가 파해졌다. 그렇게 하나 둘씩 다들은 각자의 자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헨터만의 말대로 그들 중 꽤 많은 자들이 수도로 조용히 밀사를 보내기 시작했을 즈음, 엘리어트들 역시 아스드에 도착했다.
- 작가의말
이틀에 한번씩 올리겠습니다.
메르스 때문에 난리네요. 다들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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