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의 반(VAN) - 2-22 반향(20)
어쨌거나 시라나 가슈한테 맡기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남자가 전한 말에 좀 더 얘기를 나눈 뒤 잠시 후 배에서 내린 건 두 사람 뿐이었다.
일단 가장 가까이 있는 마을부터 들러 분위기를 파악해 보기로 하고 말에 올라 시라와 가슈는 나루터에서 이어진 길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루터가 이렇게 작으니 가까이 있는 마을 규모는 더 작을 거라고 생각하며 가슈는 길을 달려갔다. 나루터를 빠져 나오자 들길이 좁게 이어졌다.
"베이그릴스에 갔던 일은 어떻게 됐어요?"
그가 물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때렸다.
"별 건 없어."
옆에서 말을 달리며 시라가 대꾸했다.
"한 가지만 제외하고."
네이엔느로부터 들었던 얘기는 여기 오는 동안 배 안에서 이미 엘리어트에게 말했다.
"엘리어트가 봤던 그건 역시 기하족이 맞아."
시라가 말했다.
"누군지는 모르고요?"
"그건 전혀."
앞으로 나가면서 들길은 더욱 더 좁아지고 있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게 또 랭더발이란 거야."
어디서 났는지 그게 누군지는 제외하고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런 힘을 손에 넣고 있는 게 랭더발이란 것이었다.
"어쩌면 엘리어트 말이 맞을 지도 모르겠어."
말을 달리며 문득 시라가 중얼거렸다.
서쪽의 에들러 혈맹국에서 북쪽 끝의 벨라르드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건 역시 이 북쪽 지방의 판도를 랭더발 앞으로 가져오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검은 기사단과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수십 개 영주국을 동시에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던 건 단순히 랭더발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라고만 보기엔 지나쳤다.
"랭더발 영주의 야심이 정말 이 북쪽 지방이 끝이 아닐 지도.."
혼자말을 하는 시라의 표정이 평소의 태평한 기색과 달리 진지해져 있는 동안 들길의 끝에서 이제 조금씩 마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선실 안에서, 천천히 엘리어트는 눈을 떴다. 선실 한 쪽에 누워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잠시 그는 잠을 깼다. 눈을 뜬 김에 선실 안을 무심코 둘러보며 그는 몸을 뒤척였다.
가슈 말대로 지난 이틀 뿐 아니라 여기 오기 전부터 사방으로 뛰어 다니느라 그는 사실 피곤이 누적된 상태였다. 자고 나니 조금이나마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에 엘리어트는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그가 있는 첫 번째 선실 안에는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드러 누워 있다. 피곤했는지 다들 푹 잠이 든 것 처럼 보였다. 그렇게 무심코 안을 보다가 그는 구석 한 쪽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티에리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는 잠이 들어 있지 않았다. 몸을 웅크린 채 티에리는 턱을 무릎에 대고 앉아 있었다.
"왜 그래?"
엘리어트가 말을 던졌다.
"아까.."
선실 안에 깨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자신과 엘리어트 뿐인 걸 알고 티에리는 천천히 입을 뗐다.
"우리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고 했지?"
"아마도."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다시 몸을 뒤척였다. 쉬라고 했으니 두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는 자둘 생각이다. 갑판 위에서는 조금 전에 일어난 아비크와 길더가 망을 보고 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이 사람들은 그렇게 되겠지.”
선실 안에서 자고 있는 다른 사람들 쪽을 보며 나직하게 티에리는 말했다. 여기 같이 있으면서 그도 엘리어트가 어떤 사람인지 지금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니 내가 자유로워질 날이 올 수 있어?”
말하는 소리에 엘리어트는 잠시 그를 쳐다보았다.
검실력이 아무리 늘어도 티에리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런 실력을 가지게 되자 더욱 그는 자신의 처지에 낙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늘 표정이 밝지 않았다.
지금도 표정이 좋지 않은 그를 가만 보다가 엘리어트는 입을 뗐다.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니까.”
티에리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잠시 있다가 그가 물었다.
"그래."
담담히 대꾸하며 엘리어트는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하고 지금은 쉬어. 이 배에서 내리게되면 당분간 정신 없을 거야."
그렇게 말하며 다시 또 잠을 청하려는 듯 엘리어트가 몸을 옆으로 했다.
배 하부를 보수하고 범선이 두올린으로 다시 돌아온지 나흘 째 되는 날이었다. 새벽 일찍부터 일렌 키히스는 자지 않고 두올린에 있는 자신의 숙소방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 방금 전 전해 받은 서신 한 장이 들려 있다.
침대 머리 맡에 앉아 서신을 다 읽고 난 뒤 일렌 키히스는 양 팔을 뒤로 짚었다. 그러면서 그가 촛점 없는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 봤다.
군도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파비앙과 에들러 혈맹국을 끌어들여 일을 키울 작정이었던 계획은 틀어졌다.
엘리어트 덕에 일이 무마된 된 데다 그 때 마침 아쉬 회의가 소집되어 아드리엥을 비롯한 몇 몇 영주국들에게 경고아닌 경고를 받았다. 아직 아드리엥과 아쉬 혈맹국을 적으로 돌릴 수 없는 랭더발은 잠시 몸을 사리고 있을 수 밖에 없었고 그 덕에 여기서의 계획은 더 흐지부지 흘러가게 되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짧게 목을 돌리며 키히스는 뭉친 근육을 풀었다. 일이 이렇게 흘러가니 사실 그는 지금 자신의 주군이 가장 화가 나 있는 대상이 누굴지 좀 궁금했다.
갑자기 나타난 엘리어트 네쉬하트란 자인가 또는 아쉬 회의를 열어 아드리엥까지 움직이게 만든 쉐네드인가. 아니면 이도저도 처리 못하고 매번 끌려 다니고 있는 자신인가.
분명한 건 때가되면 그 중 누구도 무사히 지나가지 못할 거란 사실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일렌 키히스는 방 한 쪽 구석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의자 등받이에 걸쳐 놓은 상의를 들어 올렸다.
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파비앙이나 에들러를 끌어들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마련해 놓은 대안이 있다. 서신은 벨라르드로부터 였고 이제 그 대안을 실행하라는 내용이 방금 전 받은 서신에 적혀 있었다.
사실 그건 키히스로서는 좀 번잡스럽고 귀찮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번번히 엘리어트에게 막혀 뭐 하나 성과가 없는 지금 두 번째 대비책이라도 확실히 성공해 둬야 했다.
의자 옆쪽 벽에 세워 둔 자신의 검집을 들어 올렸다. 검을 뽑아 그는 날의 상태를 확인했다. 당분간 이 방에 돌아올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검을 집어 넣고 검자루만 손에 쥔 채 그가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갔다. 낡은 경첩이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잠시 후 문이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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