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이텐스의 리루비안 연재지

기름의 시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이텐스
작품등록일 :
2020.08.29 17:54
최근연재일 :
2024.02.29 20:38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3,449
추천수 :
18
글자수 :
697,994

작성
21.09.29 18:48
조회
18
추천
0
글자
21쪽

암초의 바다 - 20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여기 기억하시죠?”


기억하고 말고. 커피 한 잔에 29살롯 하는 가게는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지. 그새 덩굴이 더 무성해졌네.


“아마 처음으로 둘이 다녔을 때지?”


“기억하고 계셨네요.”


“내가 사람 이름 좀 기억 못 한다고 기억력 나쁜 것처럼 말하지 마라.”


“하하. 그나저나 그때 나름 권유했던 건데 말이죠. 그렇게 깔끔하게 거절당해서 살짝 아쉬웠던 기억이 나네요.”


“하긴. 아무 생각 없이 이런 가게로 데려오진 않았겠지.”


“그래서, 이번에도 거절하실 건가요?”


솔직히 차를 마시는 취미는 없다. 술과 사탕이라는 좋은 대체제가 있는데 괜히 비싸기만 한 차와 커피에 쓸 돈은 없었다.


“한 번쯤은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하지만 이 녀석이 가자고 하는 걸 처음부터 거절하는 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녀석도 나름 용기를 내서 권유한 걸 텐데 매몰차게 굴 순 없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가게에 들어가자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종업원이 반겨주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모자는 맡아드릴까요?”


“아, 부탁할게.”


나는 가발이 벗겨지지 않게 조심하며 모자를 벗어서 주었다. 종업원은 모자를 받곤 안쪽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단정한 턱시도 차림이 어울리는 아까의 종업원이 그새 돌아와 주문을 받았다.


“카라카스산 원두로 내린 커피 두 잔, 그리고 버터쿠키를 조금 부탁할게요.”


“설탕은 얼마나 넣어드릴까요?”


“제 것에는 2개, 아가씨의 것엔 5개에 우유를 추가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리안은 주문이 상당히 익숙한 모습이었다. 어쩌다 한번 가는 가게인 것 같지가 않았다. 익숙하지 않게 정장차림에 머리를 올린 리안은 왠지 모를 정갈한 분위기가 났다.


“자주 오나봐?”


“상사들이 좋아해서 어쩌다 보니······.”


“근데 세르방트에서 커피라니. 다들 차에 미친 사람들 아니었나?”


“커피도 커피 나름의 매력이 있거든요. 그리고 차 메뉴도 있어요.”


잠깐 기다리자 커피와 쿠키가 나왔다. 종업원은 일부러 보는 앞에서 커피에 설탕을 넣고 우유를 넣고 한 뒤에 돌아갔다. 왜 굳이? 어차피 설탕 통도 놓고 갈 거면서.


“직접 넣는 게 아니네.”


“흘리면 치우기 귀찮을 테니까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잔잔한 분위기의 음악과 은은한 커피 향기, 그리고 차분한 나무 위주의 인테리어는 이곳을 싫어하는 사람조차도 얌전히 있게 만들었다.


나는 티스푼으로 적당히 커피를 휘저은 후 한 모금 마셨다. 검은 쓴 물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씁쓸한 맛이었지만, 잔뜩 들어간 각설탕과 적당히 들어간 우유가 쓴맛을 많이 중화시켜 주었다. 그러자 쓴맛에 가려 좀처럼 느끼기 어려웠던 커피의 향이 입안에 퍼졌다.


커피 향을 입안에 머금은 채로 쿠키를 먹어보았다. 가격에 걸맞게 버터를 아낌없이 넣은 쿠키는 입안에 넣자 바스러지기 보다는 커피에 녹아 사라졌다. 쿠키는 그나마 남아있던 쓴맛마저 가지고 내려가 이내 입 안에는 부드럽게 퍼지는 커피의 향만이 남았다.


술의 맛이라면 모를까 차나 커피는 문외한에 가까운 나이나, 종합적으로 이 가게가 수준이 높다는 건 확실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29살롯을 쓰고 이런 작은 잔에 마시진 않겠지만.


“괜찮네.”


맛있는 커피, 맛있는 쿠키, 그리고 시원한 가게 안에서 땡볕이 내리쬐는 밖을 바라보는 느낌. 그것도 연인과 함께라는 건 그래도 각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좋으시다니 다행이네요. 보람이 있었네요.”


아, 뭔가 갈증 나는 느낌이야. 빨리 먹고 나가야지.


나는 한 모금에 커피를 들이켜고, 게걸스럽지 않을 정도의 빠르기로 쿠키를 주워먹었다. 맛이 있기도 하고, 이 분위기를 즐기고 싶지만, 더 있다간 뭔가 더 갈증이 날 것 같았다.


“하하. 아직 식사를 안 하긴 했죠.”


쓸데없이 배려심 있긴. 얼렁 다음으로 가기나 해.”


“영화관이나 빨리 가자.”


나와 리안은 가게를 나서서 영화관으로 향했다. 이 낙후된 발통섬에 몇 없는 번화가에 들어서니 그래도 세르방트에 온 것 같은 분위기의 거리가 나타났다.


배색도 칙칙하고, 건물은 죄다 낡거나 예전 현지 건물들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국경지대만도 못한 거리에 그래도 새것 같은 자태를 뽐내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거리에 어울리지 않게 황금색과 붉은 색으로 벽을 칠한 건물엔 ‘골드 시어터’라고 적힌 간판이 달려있었다.


즐길 거리가 부족한 이곳에서 몇 없는 유흥시설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찾아온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매일 의자 하나 꺼내 놓고 살 태우기 말고는 하는 게 없는 사람들에게 좋은 오락거리가 되는 모양이었다.


“줄 한참 설 거 같은데?”


“그럴 줄 알고 표는 미리 구해 놨어요. 어렵게 구했다고요.”


이 녀석 참 진심이다 싶다. 시비 걸고 욕하는 것밖에 못하는 년이랑 얼마나 다니고 싶었던 건지.


“너 내가 거절했으면 어쩌려고 했냐?”


“란펑 씨한테라도 권해봤으려나요? 농담이에요. 그렇게 노려보지 마세요.”


“흥.”


나는 리안을 내버려두고 극장으로 향했다. 리안은 헐레벌떡 내 뒤를 따라왔다.


“그래서 무슨 영화야?”


매표소의 위엔 여러 포스터가 걸려있었다.


3000만 노르센텀인의 원수 리처드가 폼을 잡고 있는 포스터, 두 연인이 서로를 마주보며 춤을 추고 있는 포스터, 왠지 모르게 권총 한 자루만 달랑 있는 포스터, 우주로 날아가는 로켓에 사람에 타고 있는 포스터,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말을 탄 사내가 서있는 포스터, 사람 4명이 얼굴만 떠있고 그걸 배경으로 살짝 작은 사람 둘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있는 포스터, 보고 있기만 해도 여기가 영화관이라는 걸 명확하게 알려주는 포스터들이었다.


“’장미의 비’라는 영화네요. 주변에서 추천 많이 하길래 마리 씨랑 같이 보고 싶어서요.”


나는 포스터들 중에서 리안이 말한 영화를 찾았다. 두번째로 걸려있는 연인이 춤추는 그 영화인 모양이다.


“곧 상영시간 아냐? 빨리 가서 보자.”


“그렇게 보채셔도 빨리 시작 안 해요.”


나와 리안은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나름 자기네 기술력과 자본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영화관일 건데 그 내부는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로비는 그럭저럭 카페트를 깔거나 원목 데스크를 놓거나 하면서 고급스럽게 꾸며놓았다. 하지만 원래 있던 건물을 사서 외관만 바꾼 건지 내부는 군데군데 낡은 곳이 보였다.


상영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제 온 비가 제대로 빠지고 있지 않은지 천장에서 물이 떨어지는 곳이 있었고, 의자도 등받이가 부서진 정도면 양반이고, 앉는 부분이 빠지거나 아예 없는 곳도 꽤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서 상영관을 가득 채웠다. 여기서 할게니우스 구역이 못 갈 정도로 먼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설이 좋거나 한 것도 아님에도 그런 건 상관없는 듯했다.


“벌레는 안 나오겠지?”


이놈의 섬은 제대로 된 게 없는 것 같아. 벌레랑 마족만 많고.


“하하. 아, 시작하는 모양이네요.”


시설물은 영 별로인 영화관이지만, 영사기와 스크린은 제대로 된 물건이었다. 이 넓은 상영관을 가득 채우는 우렁찬 영사기 소리를 배경으로 100명 남짓의 사람이 모두 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스크린에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자체는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신분 차이를 이겨내고 사랑에 성공한다는 코웃음 나도록 유치한 내용이었다.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니 과장된 몸놀림, 색을 표현할 수 없으니 독특한 디자인, 복잡한 내용은 전달이 안 되니 간단한 내용, 밑도 끝도 없이 등장하는 상징물, 연극과 비교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자란 물건. 그러나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으로 만들어진 영상은 또 다른 생동감을 전달해 주었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할 때 나도 모르게 주먹을 쥐고, 화약이 터지는 불꽃엔 깜짝 놀라고, 주인공의 시선에서 연인을 바라보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선을 느끼는 등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몰입하고 있었다.


시작하고 얼마 동안은 앞자리 대머리 아저씨의 얼마 안 남은 머리를 뽑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같은 걸 고민하고 있었는데, 조금 지나고 나선 내 옆에 앉은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몰입해서 보고 있었다.


“끝났네.”


영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실제로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다고는 해도 체감하는 시간이 실제의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아직 여운이 남아있는 가슴을 안고 인파에 밀려 영화관을 나왔다.


“재미있었네요.”


“그럭저럭.”


“그런 것 치고는 한 번도 눈을 못 떼시던데요?”


“영화나 보지 왜 날 봐?”


“궁금하니까요? 제가 추천한 영화인데 마리 씨 마음에 안 들면 큰 일이잖아요.”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썼다고.”


나는 성큼성큼 걸어 한아름 앞으로 나아갔다. 리안 역시 성큼성큼 걸어 내 옆에 나란히 섰다.


“밥. 당연히 생각해둔 것 있지?”


점심시간. 살짝 목이 근질근질하긴 해도 배가 고프진 않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흐름이라면 역시 뭐라도 하나 먹어줘야겠지.


“현지음식과 고향의 맛. 어느 쪽이 더 취향이신가요?”


여기까지도 준비가 돼있는 건 당연한가? 일은 안 하고 뭘 하고 다니는 거야?


“현지음식. 고향의 맛은 비싸. 지금까지 돈 꽤나 썼잖아? 아껴.”


밥이야 뭘 먹어도 속이 차면 다 똑같지. 맛이야 좋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럼 근처에 좋은 로컬음식 집이 있어요.”


“설마?”


“하하. 눈치 채셨나요? 전에 란펑 씨한테 소개받은 그 가게예요.”


진짜. 속 편한 녀석이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가게로 간다고? 아니, 애초에 현지음식이고 나발이고 뭣도 아닌 곳이잖아?


“양파를 쓰는 곳이 어떻게 현지음식집이야? 여긴 양파가 자라지도 않는 곳인데. 너 현지음식의 뜻 몰라?”


“여기서만 맛볼 수 있으니 현지음식집이죠.”


뭐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인정하려니까 묘하게 열 받네. 언제부터 저렇게 말 잘했지?


“하, 그래. 솔직히 어디든 상관없어. 빨리 가기나 하자. 술 땡겨.”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는 리안을 닦달해서 그 식당으로 향했다. 가게 간판부터 양파 그림을 걸어 놓은 그 가게는 한창인 시간대에 맞춰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간신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아 주문을 했다. 적당히 튀김 위주의 현지 음식과 술을 파는 펍 분위기의 가게였다. 내 옷차림으로 오기엔 살짝 요란한 가게가 아닌가 싶었지만, 다들 자기네 음식 먹는데 바빠 나한텐 시선을 보내지 않았다.


“양파 정말 좋아하네.”


이번에도 한아름 양파 튀김을 시킨 리안은 음식이 나오기 무섭게 나에게 한번 권한 후 빠르게 먹어치웠다.


“식당에서 접시 닦으면서 생활할 때에 잔반으로 나왔던 양파 튀김이 정말 맛있었거든요.”


추억마저 짠하네. 애가 정말 알면 알수록 눈물 밖에 안나와. 양파 같은 놈.


그러고 보니까 저 녀석 얘기는 딱히 들은 게 없네. 별로 관심이 없기도 했고, 저 녀석이 스스로 말을 안 하기도 했고.


“저 뭔가 잘못 말했나요?”


“응? 아니. 왜?”


“저기 그, 계속 보고 계시니까······.”


“짠해서 봤다 임마.”


나는 그렇게 말하고 마침 나온 맥주를 마셨다. 역시 이 맛이야. 이걸 먹어야 살아있다는 실감이 들어.


“이러고 입맞추면 양파 맛이 나려나요?”


아직까지 리안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살짝 부담스럽다. 그런데 녀석이 먼저 고개를 돌려도 좋은 말을 해주니 나도 얼굴 안 봐도 돼서 좋다.


“그럼 난 쌀국수랑 스프링 롤 먹고 있으니까 그 맛이 나냐? 그리고 뭐 틈만 나면 키스 타령이야.”


“하하, 날카로우시네요. 하지만 연인사이니까 키스는 평범하지 않은가요? 마리 씨는 싫으신가요?”


진짜, 뭘 보고 좋아하게 된 건지. 그리고 왜 저런 말 한마디에 두근거리게 되는 건지. 그냥 키스하고 싶다를 다르게 말한 거잖아? 뭐 큰일이라고.


“헛소리하러 왔냐? 밥 먹으러 왔지. 먹기나 해.”


이 녀석과는 이 정도의 거리감이 좋다. 다른 관계는 뭔가······. 잘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조용히 식사를 했다. 이제야 이 복장에 맞게 행동하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가게에서 먹어서야 의미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나와 리안을 제외한 식당의 손님들은 현지인 반, 오전 일을 끝마치고 온 외지인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달 전에 치러진 럭비 경기의 중계를 들으며 그것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울고 웃으며 분위기를 달궜다.


즐길 거리가 부족한 이곳에서는 현지의 아나운서가 본국에서 받아온 대본을 가지고 읽어주는 스포츠 중계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얼마나 인기냐면, 본국으로 파발을 띄워서 그 파발이 한 달보다 더 먼저 이곳으로 돌아와서 미리 경기 결과를 알려주고, 그걸 바탕으로 도박을 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성행했다.


나와 리안이 가게에 들어왔을 무렵 중반 정도였던 경기가 이제 끝나갈 즈음에 식사가 대강 끝이 났다.


“식사하시고 나면 좀 걸으실래요?”


“어디 봐둔 곳이라도 있어?”


“그런 건 아니지만, 뭐 걸으면서 얘기라도 하면 좋겠다 싶어서요.”


“그럼 내가 봐둔 곳이 있어. 여기까지 해줬으니 나도 보답을 해야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다. 나 자신에 대한 것, 그리고 이 녀석에 대한 것.


“갈까?”


“가시죠.”


나와 리안은 가볍게 섬을 산책했다. 행선지는 자연스럽게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정글이 되었다.


“하실 얘기가 있으신 거죠?”


눈치는 참 빨라. 아무리 봐도 공무원을 하고 있을 인재는 아닌 거 같아.


“지금까지 나만 당했으니까. 이제 내가 받아 칠 차례지. 네 얘기나 좀 해봐.”


“그러고 보면 제 얘기는 별로 안 했었죠. 뭐부터 얘기해 볼까요?”


“뭐, 네 어린 시절이라던가 여기에 오게 된 경위 같은 거. 좋아하는 거나 취미 같은 것도 좋겠네.”


“얼마든지요.”


리안은 담담히 자기 과거를 늘어놓았다. 세르방트 가난한 기계공의 아들로 태어나 온갖 잡일을 하며 살아왔고, 우연한 기회로 항만 공무원이 되어서 일하게 되었지만, 제비뽑기에서 지는 바람에 여기로 파견을 왔다는 듣기만 해도 짠해지는 내용이었다.


“그 외엔······. 뭐 아시다시피 양파를 좋아하고, 취미는 기계 만지기, 이정도겠네요.”


저 성격으로 지금껏 평범하게 살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긴 하지만, 꽤나 알차게 살아온 것 같았다. 미친 짓하고 싶은 걸 어떻게 참아왔대?


“거리낌이 없네.”


“별거 없는 인생이었으니까요. 뭔가 죄송하네요.”


정말, 앞으로도 그렇게 재미없게 살아가면 충분히 평온하게 살 수 있었을 텐데. 왜 나를 선택한 걸까? 인간이 마족이랑 지내서 뭐가 좋을 게 있다고.


“······너 진짜 후회 안 해?”


“안 해요. 덕분에 이렇게 꾸민 마리 씨의 모습도 볼 수 있었잖아요?”


진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번개가 되어 내 가슴에 꽂히는 것만 같아. 그러다 또 흡혈충동 오면 어쩌려고. 지금 란펑도 없는데 폭주하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그럼······. 나랑 끝까지 가줄 수 있어?”


“의미심장하네요. 어떤 뜻인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여기서 앞 뒤 안 보고 그냥 수긍해 줬으면 좀 멋있었을 텐데. 하지만 역시 리안은 좀 구질구질 해야지.


“나 노르센텀으로 돌아갈 거야. 어떤 결말이 되었든 부모님의 행방을 알고 싶어.”


전에 보았던 수정 구슬 안의 무덤, 그 밑의 시체를 파내서 확인하기 전까지는 나는 절대 잠들 수 없다. 죽어서라도 알아내겠다 다짐했다.


“돌아가셨다고 하셨죠.”


“정확히는 몰라. 하지만 그 뒤로 끊임없이 찾아도 단서 하나 안 나왔으니까 죽었을 거라고 추정할 뿐이지.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야.”


다만 답은 나와 있다. 아직도 생생한 수정 구슬 안의 풍경.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기에.


“함께할 게요. 어떤 결말이 기다리더라도.”


“바보. 그렇다고 내가 기뻐할 거 같아?”


“최소한 따라가는 저를 내치시진 않을 거잖아요?”


“······진짜 바보.”


으아아아. 얼굴을 못 보겠어. 나 분명 굉장한 얼굴 하고 있을 거야. 모자 있어서 다행이다. 좀 깊게 눌러쓰고 모르는 척하자.


“그나저나 어디로 가고 계신 건가요? 꽤나 걸은 거 같은데요.”


“보면 알아. 조금만 더 가면 돼.”


말은 그렇게 했어도 한참을 더 걸어 할게니우스 구역에 도착했다. 혼자 왔다면 뛰어서 빠르게 올 수 있었겠지만, 리안은 나만큼 빠르게 달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할게니우스 구역이네요. 여기가 그 봐두셨다는 곳인가요?”


나는 대답하는 대신 지갑을 살폈다. 란펑에게 특별히 받은 용돈은 충분했다. 나는 심호흡을 한번 한 뒤에 방향을 잡았다.


“내일 쉬지?”


“어, 음. 아니긴 한데, 뭐 어떻게든 되겠죠.”


“그럼 됐어.”


로열 글로리 호텔. 이 섬을 통틀어 가장 높은 건물이자 부의 상징. 나는 자연스럽게 체크인을 하고 리안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이런 상황에서도 내 걱정이나 하다니 속 편한 녀석이다. 리안답다면 리안답지만.


“괜찮아.”


방에 도착하자 노을이 진 하늘이 조명이 되어 방 안을 붉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모자와 겉옷을 벗어 적당히 놔두고 창가의 버켓에서 스파클링을 꺼냈다.


“너도 남자니까 마음은 있지?”


나는 그렇게 말하며 스파클링을 한잔 따라 리안에게 건넸다.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리안은 기꺼이 잔을 받아들였다.


“좋아. 허락할게.”


나는 리안의 손을 잡았다. 뭔가 흐뭇한 미소를 짓는 리안을 무시하고 스파클링의 병따개의 뾰족한 부분으로 리안의 손가락 끝을 찔렀다.


“아얏!”


내 칼만큼 병따개가 뾰족하지 않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통증을 남겼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쓰기 보다는 리안의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내 잔에 떨어트렸다.


핏방울은 투명한 스파클링에 일순 얼룩을 남겼지만, 아래에서 올라오는 탄산 방울에 풀어져 사라졌다. 그리고 그 방울에서 태어난 강렬한 피의 냄새가 나를 휘감았다.


“앞으로의 안녕을 기원하며.”


“건배.”


피와 술, 너무나도 감미로워 나를 잊게 만드는 둘이 만나 부드럽게 목 뒤로 넘어갔다.


“하아.”


나도 모르게 나오는 탄성. 앞으로 수 백 년을 더 산다고 해도 이것보다 감미로운 것은 없으리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잔을 갈무리하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리안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가발을 벗고, 셔츠를 풀고, 치마의 단추를 풀었다. 조용히 치마가 떨어지고, 속옷차림의 모습으로 리안의 앞에 섰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분명 귀 끝까지 빨갛겠지.


“솔직히 몸매에 자신은 없지만, 이 정도면 안기에 충분할까?”


리안은 대답 대신 나를 꼭 끌어안았다. 하루 종일 밖에서 움직여 옷은 푹 젖고, 땀냄새가 났지만, 썩 싫지만은 않았다.


“바보야, 땀냄새 나잖아.”


“하하. 죄송합니다.”


리안은 조용히 입맞춤을 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나는 손을 들어 리안의 입술을 막았다.


“아, 역시 싫으신가요? 샤워라도 하고 올까요?”


“그런 거 아냐.”


나는 리안의 품에서 나와 간이 주방에 가서 뭔가를 챙겨왔다. 하얗고, 단단하고, 쓰고, 살짝 달콤한, 박하사탕이었다.


나는 리안의 입안에 박하사탕을 밀어넣었다.


“이러면 양파 냄새 안 나겠지?”


리안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내가 괜한 짓을 했나 싶어서 후회가 오는 찰나에 리안은 씩 웃으며 다시금 나를 끌어안았다.


“이렇게 귀여우면 반칙이잖아요.”


“시끄러 바보야.”


나와 리안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마치 처음으로 짝을 찾은 것 같은 입맞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내 송곳니에 리안이 다치지 않게 조심하는 풋풋함이 있었다.


리안은 나를 침대에 눕히고 자기도 옷을 벗었다. 어디다 숨겨놨는지 모를 꽤나 다부진 몸이 드러났다.


“이제 진짜 책임 져야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어요.”


리안은 이제 다 아물어가려고 하는 손가락을 내 입안에 넣었다. 그것과 동시에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내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시말서 쓸 각오해.”


“오후에는 돌아가게 해주세요.”


“너 하기 나름이지.”


“하핫.”


해가 지고 달빛이 방안을 비추었다. 서로 바로 앞 밖에는 볼 수 없었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서로를 볼 수 있으면 충분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풋풋하군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름의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91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5 21.12.22 21 0 10쪽
90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4 21.12.16 22 0 10쪽
89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3 21.12.16 20 0 13쪽
88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2 21.11.28 22 0 13쪽
87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1 21.11.22 25 0 14쪽
86 궁정 안뜰에서의 한때 21.11.13 27 0 10쪽
85 어느 붉은 저택에서 - 2 21.11.05 19 0 10쪽
84 어느 붉은 저택에서 - 1 21.11.04 19 1 17쪽
83 헬하운드가 아가씨고 인간이 야생아인 이야기 21.10.25 23 0 14쪽
82 암초의 바다 - 21 21.10.08 27 0 21쪽
» 암초의 바다 - 20 21.09.29 19 0 21쪽
80 암초의 바다 - 19 21.09.23 17 0 10쪽
79 암초의 바다 - 18 21.09.14 15 0 16쪽
78 암초의 바다 - 17 21.09.08 22 0 16쪽
77 암초의 바다 - 16 21.08.31 17 0 12쪽
76 암초의 바다 - 15 21.08.25 17 0 11쪽
75 암초의 바다 - 14 +2 21.08.19 21 1 11쪽
74 암초의 바다 - 13 21.08.12 14 0 10쪽
73 암초의 바다 - 12 21.08.03 14 0 12쪽
72 암초의 바다 - 11 21.07.27 17 0 11쪽
71 암초의 바다 - 10 21.07.19 18 0 14쪽
70 암초의 바다 - 9 21.07.10 19 0 13쪽
69 암초의 바다 - 8 21.07.07 19 0 11쪽
68 암초의 바다 - 7 21.07.01 19 0 14쪽
67 암초의 바다 - 6 21.06.26 16 0 13쪽
66 암초의 바다 - 5 21.06.19 22 0 12쪽
65 암초의 바다 - 4 21.06.10 19 0 14쪽
64 암초의 바다 - 3 21.06.07 19 0 12쪽
63 암초의 바다 - 2 21.05.29 25 0 14쪽
62 암초의 바다 - 1 21.05.26 25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