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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의 리루비안 연재지

기름의 시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이텐스
작품등록일 :
2020.08.29 17:54
최근연재일 :
2024.02.29 20:38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3,454
추천수 :
18
글자수 :
697,994

작성
21.09.2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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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암초의 바다 - 19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내일 한가하시죠? 저랑 어디 놀러가지 않으시겠어요?”


얼떨결에 리안과 사귀게 된 나는 빠르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


“너가 내가 한가한지 아닌지 어떻게 아는데?”


“한가할 거야. 다녀와.”


“란펑 씨가 그렇게 말하는 걸요.”


진짜 둘이 쿵짝이 잘 맞네! 누가 보면 너희 둘이 사귀는지 알겠다.


“뭐 할 건데?”


“영화 어떠세요?”


“여기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어?”


“얼마 전에 세르방트 구역에 한군데 생겼어요.”


망할 세르방트 놈들. 좋은 건 항상 선점하네.


“영화 본지도 오래 됐지. 근데 마족인 내가 극장을, 그것도 망할 세르방트 구역에 있는 걸 갈 수 있을까?”


세르방트에서 마족이 어떤 취급인지는 나 자신이 경험해 봐서 잘 알고 있다. 거기서 마족이 휘적휘적 인간이랑 같이 극장 같은 밀폐 공간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는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금방 떠올랐다.


“그러니까 변장을 해야지.”


“변장이요? 뭐 재미있는 거 하시나요?”


켁, 3호. 참 시도 때도 없이 오는구만!


“아, 내일 마리 씨랑 놀러갈 예정인데, 아무래도 지금 모습으로는 힘들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걸 말해주네. 빠르게도 후회가 되기 시작하는걸?


“그거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죠. 저도 이 머리로 어디 돌아다니거나 손님 맞이하려면 힘드니까 자주 분장하거든요.”


말은 그렇게 해도 아무리 봐도 그냥 가지고 놀기 좋은 장난감을 발견해서 좋아하는 모습 같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남의 고민을 그냥 놀림거리로만 생각하고 있어.


“마침 저랑 머리카락 색깔도 같으시네요. 그럼 가발이 제일 편해요. 제거 빌려드릴게요.”


라일라는 그렇게 말하고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제게 맡겨 주시죠.”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란펑을 보았다. 란펑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속는 셈칠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늘어졌다. 솔직히 불안하긴 한데, 어떻게든 되겠지.


“흠. 마리 씨가 평소에 안 꾸미고 다녀서 그렇지 스타일은 되게 좋으신 편이거든요. 조금만 꾸며도 몰라보게 달라질 거예요. 남자친구 분은 기대하셔도 좋아요.”


화장품 가게 점원 같은 소리나 하네. 처음엔 그래도 똑 부러지는 탐정이라는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동네 찻집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그 나이대 처녀 같아.


“그렇게 말씀하시니 기대하게 되네요. 그럼 내일 오전에 봬요.”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나와 가볍게 입맞춤을 한 뒤에 돌아갔다.


“꿀이 떨어지네요. 부러울 정도예요.”


“리안 정도면 좋은 짝이지.”


“시끄러. 남의 일이라고 쉽게 말하는 거 아냐.”


나도 참 많이 물러졌어. 예전이면 욕을 한 바가지 했을 텐데.


“그럼 내일 아침에 짐 들고 다시 올게요. 사무실이 한가해서 와봤는데 재미있는 일을 발견했네요.”


역시 그냥 재미있는 일 취급이었어.


“마리가 꾸미는 모습을 다 보겠네. 오래 살다 보니 별 경험을 다 해보네.”


“뭐 언제부터 알았다고. 됐으니까 잠이나 자.”


데이트라고 해도 솔직히 뭘 하는 건지 잘 와닿지 않는다. 다니면서 연인들이 노는 모습이야 잔뜩 봤지만, 그닥 재미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뭐 가보면 알지 않을까?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니고.


뭘 할까 생각해보며 밤을 지새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 떠오르지 않아 중간부턴 그냥 평범하게 잠들었다.


날이 밝고 라일라는 자기 몸 만한 가방을 들고는 가게에 찾아왔다.


“저도 모르게 신이 나버렸네요. 자자, 거기 앉아보세요.”


나를 소파에 앉힌 라일라는 가방에서 끊임없이 화장품을 꺼내 늘어놓았다. 그리곤 이내 화장에 들어갔다.


“이 피부는 진짜 부럽다니까요. 저도 한때는 마족이었지만, 이 피부를 포기하는 게 참 아쉬웠어요.”


“아직 마족으로 건너올 수 있어. 그 저주는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게 아니야.”


“그건 사양하고 싶네요. 잠깐, 움직이지 마세요. 화장 틀어져요.”


“간지럽다고! 언제까지 하는 건데.”


“이제 시작이예요. 좀만 참아봐요.”


나는 간지러움을 참으며 화장이 끝나길 기다렸다.


“밑화장은 이제 다 했고요. 분장을 한 뒤에 마저 할게요.”


그러나 맙소사 진짜 이제 시작이었다. 이걸 외출할 때마다 매일 한다고? 정신 나간 거 아니야?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일라는 가발을 씌우고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마침 마리 씨랑 저랑 체형이 비슷해서 다행이네요. 이것저것 입어봐요.”


“야, 잠깐! 옷 벗기지 마! 내가 알아서 한다고! 알아서 한 대도?”


나는 라일라의 옷 입히기 인형이 되어서 가방 가득 들어있는 옷들을 이리저리 입어보았다. 란펑은 그 일련의 과정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짜증나!


“이게 가장 잘 어울리네요. 전 살 쪄서 좀 힘든 옷인데. 부럽네요.”


부츠는 내 거를 그대로 신고, 펑퍼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내려오는 검은색 치마, 흰색 셔츠 위에 와인색 블라우스를 걸치고, 챙이 넓은 흰색 모자를 썼다.


“이제 마무리 들어가죠.”


라일라는 다시 나를 앉히고 화장에 들어갔다. 나처럼 차가운 체온의 손은 그 체온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하게 움직이며 화장을 이어갔다.


“혹시 거울 있나요? 아, 감사합니다. 다 됐어요. 한번 봐봐요.”


라일라는 란펑한테 받은 거울을 나에게 주었다. 거울 안에는 한 명의 인간이 있었다.


희지 않은 머리카락, 생기가 생긴 피부, 누가 봐도 마족 같던 부분들은 모두 사라졌다.


“장갑 끼시고요. 선글라스도 쓰시고, 말하실 땐 손으로 입 가리고 하세요.”


“칼은 내가 맡아둘게.”


모든 준비가 끝나자 내 원래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이 정도면 분장이 아니라 변신이라고 불러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원판이 좋으니까 결과물도 좋네요.”


“내가 봐도 좀 놀랍긴 하다. 너 아직 인간이지? 손재주 좋네.”


“칭찬이죠? 아무튼 땀은 안 흘리실 테니 화장은 안 고치셔도 될 거 같고, 가발만 좀 주의해 주세요. 조금만 험하게 움직여도 바로 삐뚤어지니까요.”


“엉. 이제 끝난 거지? 나 간다?”


“네. 다녀오세요.”


뭔가 이상한 기분이다. 지금까지 어떤 시선을 받던 내 모습 그대로 다녔는데, 이렇게 변장을 해가면서까지 만나야 하는 상대가 있다니.


분장한 모습 자체엔 딱히 별다른 감흥이 없는데 이런 면이 왠지 신경이 쓰인다.


원래 이성의 피를 마시기 위해서라면 다른 생명체의 모습으로 의태해서라도 하던 종이라 그런 건가? 새삼스럽게 마족인 걸 자각하게 되네.


란펑과 라일라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서니 역시나 현지인과 외지인의 교차가 이루어지는 거리가 반겨주었다.


평소엔 별다른 감흥 없이 다니던 길.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바로 다음날 아침에 생각날 이색적인 풍경이나, 지금은 그저 일상에 불과하다.


주변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언제나처럼 길을 다니고, 일과를 시작하거나 끝마치고 집으로 가고 직장으로 간다.


난 언제나 이 흐름에서 동떨어진 존재였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주변이 변하지 않은 대신 내가 바뀌었다.


“젠장. 두근거리고 말이야.”


평범하디 평범한. 매일같이 봐오던 이 거리를 걷는 게 이리도 두근거리는 일이었나? 앞에서 마주오는 사람이 혹시 내가 만나러 가는 사람이 아닐까? 방금 지나친 사람들 중에 있어 엇갈리진 않았나? 분장이 너무 완벽해서 정말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안 어울리는 건 아닐까?


지금까지 타인에게 잘 보이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내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놈과는 굳이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고, 어떻게 잘 해보려다가 떠나가는 사람들을 구태여 잡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남아 이 섬에 왔다. 여기도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나도 좋다고 해주는 녀석들이 나타났다.


사랑한다고 해주는 녀석이 나타났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


“어? 혹시 마리 씨? 마리 씨 맞죠?”


잠시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던 사이에 내 옆을 지나친 리안이 급하게 돌아와 내 손을 잡았다.


“뭐야? 알아채는 게 늦어.”


이 녀석 진짜 바보야. 만약 내가 아니면 어쩌려고 했던 걸까? 경찰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는 게 무섭지 않은 건가? 이제 와서 잡혀가면 오늘 날 못 보게 되는 건데.


그리고 어떻게 이렇게 매번 날 귀신같이 찾아내서 오는 걸까? 마치 나와 맺어지는 게 운명이라는 것처럼. 어떻게 가는 곳마다 이 녀석이 있을 수 있을까?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보니까 대단하네요. 탐정님께 감사인사라도 해야겠어요.”


“뭘 대단하다고. 이 정도는 근처 미용실만 가도 해줘.”


“아니, 그게 아니라요. 이렇게나 아름다운 마리 씨를 보게 해줬잖아요? 당연히 감사한 일이죠.”


진짜. 이길 수가 없네. 이 녀석은······.


저렇게 말하는데 어떻게 내치라는 거야.


“그럼 평소의 나는 별로라는 거냐?”


괜한 심술을 부려 본다. 저 녀석이 날 기분 나쁘게 할 만한 녀석이 알면서도 왠지 모르게 확인하고 싶어진다.


“그럴 리가요. 말했잖아요. 첫눈에 반했다고. 마리 씨는 어떤 모습을 해도 마리 씨예요.”


사랑받고 있다는 걸.


“말은 잘 하네. 계획은 다 세워온 거지?”


“그럼요. 충실히 에스코트하겠습니다.”


“못미더워. 제대로 못 하면 알지?”


“여부가 있겠습니까?”


떠오르는 태양 아래를 걷는다. 어디 기둥 위에 올라가기 좋아하는 태양신의 가호일까?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이다.


정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오지랖이 넓어.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즐거운 추석 보내셨나요?


저는 갖혀서 일만 했습니다.


여려분만이라도 좋은 연휴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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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암초의 바다 - 8 21.07.07 19 0 11쪽
68 암초의 바다 - 7 21.07.01 19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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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암초의 바다 - 5 21.06.19 22 0 12쪽
65 암초의 바다 - 4 21.06.10 19 0 14쪽
64 암초의 바다 - 3 21.06.07 2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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