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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의 리루비안 연재지

기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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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
작품등록일 :
2020.08.29 17:54
최근연재일 :
2024.02.29 20:38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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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5
추천수 :
18
글자수 :
697,994

작성
21.08.12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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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암초의 바다 - 13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돌아가는 건 좋은데. 무슨 얼굴로 돌아가지.”


이쯤 되니 화가 난다. 쟤네가 뭐라고 내가 눈치까지 봐야 하지? 쟤네는 그저 날 귀찮게 하는 1호와 2호에 불과한데?


애초에 내가 화를 낸 것도 걔네가 무례하게 굴어서잖아? 근데 내가 왜 눈치를 봐야 하는 거지? 사고를 친 건 걔네고 해결하는 건 나고.


당장 이번에도 그래. 누가 란펑을 노린다고 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는데, 결국 일을 한 건 나잖아? 라일라는 도움도 안 됐고, 란펑은 이주의 운세 같은 거나 보고 있고, 리안은 국수 몇 번 사긴 했지만 그게 다고, 술에 꼴아서 뻗은 거 업어온 건 나고, 신수 만나서 설득한 것도 나네?


“이놈들 하는 게 없네? 매일같이 사고나 치고 말이야. 내 도움 받는 게 아주 일상이야 일상.”


일상인가?


“······.”


평화롭네.


“일상······.”


마지막으로 칼을 휘두른 게 언제지? 길가다 아무한테나 시비를 건지는? 껀수 뛴 지는 얼마나 됐지? 영감탱이 안 놀려먹은 지는?


길가는 사람들이 내 눈길을 피하며 도망가지 않게 된지 얼마나 됐지? 술이나 마시며 옥상에 걸터앉아 허공을 보지 않게 된지는? 죽여버리겠다고 칼 들고 오는 놈을 만난 건 언제가 마지막이지? 총은 언제 봤더라?


누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준 건 얼마만이지? 내 안부를 물어봐 주고 먹을 거라도 하나 챙겨주는 사람이 있은 지는 얼마만큼 흐른 거더라?


전부 머나먼 이야기네?


“······망할.”


내가 그려오던 것. 평생을 그리워하고 또 바라오던 것. 그것은 이미 내 옆에 있었다.


이걸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이 느낌이 오해 없이 전달될 수 있을까? 그저 지금까지의 바보짓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충실하다는 것밖에는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쓸데없이 착해가지고 말이야.”


지금 돌아가면 얘네는 날 어떻게 받아줄까? 언제나와 같은 멍청한 얼굴로 받아주려나? 그게 언제나의 일상이니까?


괜히 더 낯간지러워지네. 돌아가면 어떤 얼굴을 해야할지 모르겠어.


“나 왔어.”


영업 끝 표지판을 넘어 베일을 걷어내고 가게에 들어섰다. 불이 켜진 건지 안 켜진 건지 알 수 없는 조명, 옥인지 뭔지 알 수 없는 보석으로 장식된 천장, 너저분한 듯 너저분하지 않게 정렬된 도자기와 그릇, 조각상들, 아직도 내 온기가 남아있는 것 같은 소파, 그리고 투명한 수정 구슬 하나 올라온 목제 테이블의 저편엔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다.


“뭐하는 거야?”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평소에 저러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뜬금없이 왜 저러고 있나 모르겠다.


“자신이 있을 곳을 찾지 못한 방랑자여 어서오십시오. 그대의 앞길을 비추는 등불이 이곳에 있습니다.”


이게 뭐하는 짓인지. 뭐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으니 어울려줄까?


“저한테 무엇을 보여주실 생각이죠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이 여기에 앉는 건 많이 봐도 내가 앉는 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 본래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미래는 못 본다고 하지 않았나? 너랑 너무 친해졌다며.”


“점술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저 같은 점술사는 필요하지 않겠지요.”


뭔가 방법이 있는 모양이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그럼 한번 들어나 볼까?”


장막 너머에서 란펑의 손이 나타나 수정구슬을 만졌다. 예전의 그 고사리 같은 손은 더 이상 없었다.


“당신은 화가 날 때 어떻게 하시나요?”


“화를 내지.”


“좋아할 일이 있을 때는?”


“술을 마시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는요?”


“앙?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


분위기 잡고 한다는 소리가 그거야? 무슨 얘기를 듣고 싶은 건데?


“당신이 다른 사람한테 호의를 표한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내가 무슨 괴물이야? 나도 남들한테 베풀고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하거든?”


“그럼 그걸 다른 사람들이 호의로 받아들였습니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아, 그, 뭐,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게 있는 법이야.”


아 씨. 나 그냥 나가면 안 되냐? 뭐 이런 문답에 답을 해야 하냐?


“혹시 호의를 표했다가 거절당해서 상처를 받는 게 두려우십니까?”


수정 구슬에 가슴을 부여잡고 떠나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걸 보니 왠지 울컥해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뭐 어쩌자는 건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란펑을 장막을 걷어냈다. 화가 난 것이 아닌 평온한 표정이었다.


“마리, 나는 네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몰라.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어. 언제까지고 사람을 밀어낼 순 없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사람을 밀어내든 말든. 애초에 사람을 그렇게까지 믿는다는 게 이상한 거 아냐?”


뭘 믿고 내 마음을 드러내? 다른 사람의 호의를 이용해서 등쳐먹는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야 신수니까 그런 거 당해도 충분히 보복 가능하고 피해도 적고 하니까 그렇겠지.


“시비 털려고 이러는 거면 여기까지 하자. 난 이제 좀 자고 싶거든?”


“솔직하게 말해. 리안 좋아하지?”


하? 하? 하? 여기서 왜 그 얘기가 나와?


“이거 이렇게 이어지는 거 맞아? 한참 심각한 이야기 하려는 분위기 아니었어?”


란펑은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한번 하고 싶기도 한데, 어차피 제대로 안 들을 거잖아?”


그렇긴 한데.


“언제부터 좋아한 거야? 아, 혹시 진도 다 나간 거야? 둘이 자주 놀러 다니더니.”


“그런적 없어. 자주 같이 다니긴 했는데,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 나랑 언제 같이 있었다고 그래? 그리고 정작 나랑 같이 있으니까 질투했잖아?”


“누가 질투를 해? 남의 자전거 멋대로 타고 있으니까 화 낸 거지.”


“그런 것 치곤 엄청 화내던걸?”


“멋대로 생각해.”


“그럼 마리는 리안을 좋아하는 거로.”


“왜 결론이 그렇게 나는 거야?”


“발끈하는 걸 보니 역시 맞나 보네.”


“그러니까 아니래두!”


이 녀석 갑자기 처음 만났을 때처럼 유치해졌어. 근데 지금 목소리로 저렇게 말하니까 적응이 안 돼.


“대체 뭐야? 내가 리안을 좋아하는 거로 만들어서 네가 얻는 이득이 뭔데?”


“재미. 맨날 마리만 놀리면 불공평하잖아? 나도 마리 놀려봐야지.”


망할 기지배. 키만큼이나 속도 좁아 가지고는.


“그나저나 찔리는 데가 있긴 한가봐? 반응하는 거 보면. 아니라면 진짜 그냥 무시했을 텐데.”


젠장, 당한 건가? 보기 좋게 걸려들었네. 솔직히 잘 모르겠는데. 내가 왜 이렇게 반응하고 이상한 기분이 드는지.


“글쎄. 솔직히 나도 내가 어떻게 느끼는 건지 잘 모르겠어. 리안이 갑자기 봐도 반가운 녀석인 건 맞긴 한데, 그게 좋아한다는 감정으로 이어지는지는 잘 모르겠거든.”


“그거 리안이 들으면 슬퍼하겠는데?”


“걔? 걔 소아성애자라 나는 눈에도 안 들어와. 너라면 또 모를까.”


“······그건 진짜 들으면 화 냈겠다.”


“그렇지 않아도 전에 한번 말해줬지. 길길이 날뛰던걸?”


“그럼 두 번은 하지 말자.”


란펑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날 보았다. 나도 지지 않고 콧김을 내뿜으며 란펑을 쏘아보았다.


“표현이 서툰 것도 마리의 매력이지. 내가 역으로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마리는 왜 리안을 좋아한다고 하기 싫은 거야?”


아직 안 끝난 거야?


“왜 이렇게 집요한지 모르겠네. 내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란펑은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나는 괜히 긴장이 돼서 마른침을 삼켰다.


“마리, 아까부터 근본적인 질문엔 답을 안 하고 있어.”


“뭐가?”


“마리는 리안을 이성으로서 보고 있는 거야?”


“리안은 남자잖아. 이성 맞지.”


“마리.”


“으······.”


이게 뭔 힘든 질문이라고 이렇게 답답하지? 아니면 아니다. 맞으면 맞다고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근데 왜 그 한마디가 이렇게나 말하기 힘든 거지?


“몰라.”


“응?”


“모른다고. 뭐가 뭔지.”


나는 의자에 늘어져 천장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줄을 타고 어떻게 달았는지 궁금한 장식들이 아무렇게나 흔들리고 있었다.


“그냥 잘 모르겠어. 난 그저 기껏 찾아온 일상이 반가울 뿐인데, 거기서 누가 좋냐 안 좋냐 하는 건 아무래도 좋은 문제 같고, 혹시 섣부르게 움직였다가 힘들게 찾아온 일상이 망가지는 게 두렵기도 하고, 아무튼 그래.”


젠장. 무슨 말을 한 거야. 나가 죽고 싶네.


“우리 마리······. 이렇게 기특할 수가!”


으엑, 뭔가 할머니 같은 반응.


“자신의 행동이 불운을 불러올 수 있다는 걸 자각하는 것부터가 깨달음의 시작이야. 아주 바람직해.”


“란펑 뭔가 할망구 같아.”


“흥! 원래 옛 선인들의 말씀은 고리타분하게 들리는 법이야.”


자기가 나이 먹고 낡았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젠장. 늙은이 주제에 융통성 있기는.


“그래서, 어떻게 할거야?”


“뭘?”


“고백할 거냐고.”


아, 제발.


“아니, 왜 이럴 때만 소녀 같이 굴어? 늙은이 주제에 아직도 두근거리는 일이 있어?”


“말했잖아. 난 마리를 놀리고 싶을 뿐인 걸.”


“이제 그만! 또 이 주제로 말하면 그땐 그냥 안 넘어갈 거야!”


혼자 좋아하고, 혼자 들뜨고, 혼자 결론 내리고, 아주 1인 오케스트라 납셨네.


“오호호, 그럼 리안이랑 해야겠네. 내일 언제쯤 오려나?”


“안 되겠다. 어서 여길 떠야지. 난 싱하네에 붙는 거로.”


“장난이야.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그래. 이만 자자. 내일 장사해야지.”


“그래. 장사해야지, 장사해야지. 에휴.”


나는 힘없이 일어나 내 전용 소파에 누웠다. 란펑도 조용히 수정구슬을 챙겨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뭔가 복잡한 기분이다. 길었던 하루를 회상하며 잠이오지 않는 밤을 지세웠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날이 그래도 좀 풀린 느낌이네요. 


이대로 더워지는 일 없이 가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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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암초의 바다 - 21 21.10.08 27 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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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암초의 바다 - 10 21.07.19 18 0 14쪽
70 암초의 바다 - 9 21.07.10 19 0 13쪽
69 암초의 바다 - 8 21.07.07 19 0 11쪽
68 암초의 바다 - 7 21.07.01 19 0 14쪽
67 암초의 바다 - 6 21.06.26 16 0 13쪽
66 암초의 바다 - 5 21.06.19 22 0 12쪽
65 암초의 바다 - 4 21.06.10 19 0 14쪽
64 암초의 바다 - 3 21.06.07 20 0 12쪽
63 암초의 바다 - 2 21.05.29 2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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