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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의 리루비안 연재지

기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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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
작품등록일 :
2020.08.29 17:54
최근연재일 :
2024.02.29 20:38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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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수 :
697,994

작성
21.06.07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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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암초의 바다 - 3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대체 언제까지 하려는 거야? 이러다 날 새겠다!”


똑똑하다는 것과 아는 게 많다는 건 다르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다.


란펑은 머리가 상당히 좋다. 이해도 빠르고 어지간하면 한 번만 설명해줘도 알아듣는다. 하지만 문제는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할 정도로 요즘 정세에 어두워서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려줘야 한다. 옷 입는 거랑 밥 먹는 거 빼고 다 가르쳐 준 것 같다.


탄트라면 강대국 아닌가? 그것도 할게니우스, 칸달레아, (인정하긴 싫지만)세르방트랑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런데 어떻게 도시에 발 한번 들여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굴 수 있을까?


“보채지 마! 모든 일엔 순서가 있는 법이야. 이 장식들이 얼마나 중요한데!”


가게에 쓸데 없는 물품은 최대한 없는 편이 좋다. 그래야 손님인척 가장하고 들어와 이것저것 집어가는 무리들을 막을 수 있고, 벌레도 덜 끼고, 어깨들이 들어왔을 때 돈이 없는 연기를 하기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벌레가 덜 낀다.


그런데 이녀석이 하는 걸 보아라. 마구잡이로 장식을 꺼내서 장식하고 있지 않은가? 가게 개점하는데 필요한 돈 마련한다고 꽤나 꺼내 판거 같은데 어디서 또 저렇게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말 듣기로 했어? 안 듣기로 했어? 나 성격 안 좋거든? 자꾸 멋대로 하면 안 도와줄 거야?”


어쩌다 이런 녀석을 도와준다고 해서 이 고생인지 모르겠다. 오늘 껀수 들어온 것도 마다하고 온 건데, 이래서야 보람이 없다.


“안녕하세요. 오, 좀 점집 같은 분위기 나네요.”


저놈은 또 왜 오는가? 쓸데 없이 엮여서 날 귀찮게 하는 2호 세르방트 샌님의 등장이다.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저 흡혈귀는 미적 감각이라는 게 없어.”


“아앙?”


“너무 미적감각이 뛰어나서 우리와는 관점이 다르다는 얘기였어. 아무튼 편히 앉아. 마실 건 마리가 내올 거야.”


“참내. 야, 곱슬머리. 목 마르냐?”


“하하, 참겠습니다.”


“아주 좋아. 자세가 되어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소파에 몸을 던졌다. 꽤나 고급진 가죽으로 만들어진 탄트라제 소파는 부드럽게 내 몸을 받아주었다. 어디선가 날 노려보는 신수가 있는 것 같지만, 무시하도록 하자.


“준비는 순조로우신가요?”


내 맞은편에 리안이 앉았다. 그럭저럭 봐줄 만한 얼굴이지만, 그닥 마주하고 싶진 않다. 세르방트 놈이니까.


“순조로워? 뭐가? 내가 실시간으로 후회하는 속도?”


“그거는 총알보다 빠를 테니 접어두고, 가게 준비요.”


“그거? 그거는 얼마 안 남았지. 네가 신수님을 조금만 설득해 준다면 더 빠르게 될 거야.”


기본적인 준비는 다 끝났다. 이 구역 실세한테 얘기도 해놨고, 가게도 적당한 위치에 있는 거로 잘 구했고, 자꾸 비싼 거로 하려는 란펑도 잘 말렸고, 리안의 소개로 만난 귀금속 업자랑도 잘 거래했고, 남은 건 이제 청소랑 정리마저 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일 뿐이다.


문제는 그 정리작업이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적당히 하라는 장식을 벌써 몇 시간이 넘도록 계속 하고 있고, 앞으로 더 이어질 것 같았다.


이제 가격 정하고 앞으로의 운영 방침 같은 것도 정해야 하는데 이래서야 끝이 없다. 가장 중요한 내 임금 문제도 남아있다. 설마 이거 정하기 싫어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마리 씨를 너무 곤란하게 하지 말자구요. 여기서 가장 고생하셨잖아요?”


“공 나누기엔 딱히 관심 없어. 돈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으면 돼. 그걸 위해서도 빨리 가게를 열여줬으면 하고.”


“너희는 잘 모르겠지만, 이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점이라는 건 결국 얼마나 신뢰감을 주느냐거든. 사소한 장식도 허투로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면서 장식 하나 다는데 5번씩 고민하는 자칭 수 천 세 신수 현무님. 참 이상한 거에 코 꿰였다 싶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껀수나 하나 뛰고 오는 건데.”


후회해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공무원 얼굴을 보았으니 오늘은 이미 다 갔고, 저녁을 뭘 먹을지만 남겨두었다.


“식사는 하셨나요?”


딱 가려운 곳을 긁어주네. 공무원 치곤 눈치가 빨라.


“아직. 슬슬 먹어야지.”


“볶음국수라도 하나 사올까요?”


“시원한 맥주도.“


“내꺼는?”


먹는 거에는 또 반응이 빠르다.


“신수님은 바빠서 못 드시는 거 아니에요?”


“난 밥으로 해줘. 새우는 빼고 돼지고기 넣어서.”


“여긴 돼지 없어.”


“엥? 왜 없어?”


“너랑 같은 종이 여기 안 사는 이유랑 똑같지.”


“음?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인데? 이 세상에 현무는 나밖에 없어.”


역시 대화가 안통한다. 너무 세상물정을 몰라.


“됐다. 그만하자. 너는 빨리 사와.”


리안은 느긋하게 나가선 금방 사서 돌아왔다. 주문은 미리 해놨고 그냥 의사만 물어봤던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공무원으로 썩을 인재는 아니야.


은은한 고수향이 풍기는 볶음국수에 라임즙을 살짝 뿌려 큼지막한 새우와 한입. 식비가 아까워서 술만 마시긴 해도 역시 사람은 음식을 먹어야 하는 것 같다.


“거긴가? 5거리 귀퉁이 근처의 노점.”


“오, 잘 아시네요. 단골이신가요?”


“자릿세 받으러 가면 얻어먹거든. 그래도 안 깎아주지만.”


“무서운 얘기를 당당하게 하시네요.”


이 집은 국수에 양파가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이 섬에선 양파가 나지 않지만, 대륙의 맛을 그리워한 사람들을 위해 넣었다고 하는데, 그게 또 이 가게만의 매력이다.


“언제 먹어도 별미야. 그나저나 너도 온김에 점이나 받고 가. 금전 감각은 없지만, 영감은 있어.”


“그럴까요?”


“음? 그거 내 의사는 안 물어보고 정하는 거야?”


“너도 내 의사는 안 묻잖아? 이른바 업보라는 거지.”


“업보가 그런 말이 아닐 텐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란펑은 하던 작업을 그만두고 수정구슬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리안은 포크로 국수를 퍼먹으면서 란펑의 맞은편에 앉았다.


“흠흠. 양파를 좋아하는 죄많은 아이야. 무엇이 궁금하느냐?”


“음음. 양파튀김이 먹고싶은데 여긴 어디서 파는지 모르겠어요. 어디로 가면 먹을 수 있을까요?”


란펑이 굳었다. 역시 공무원이라 그런지 진상의 행동양식을 잘 알고 있다.


“······나 앞으로 이런 질문 받아야 돼?”


나름 점술에 자부심이 있는 란펑은 자신의 능력이 이런 일에 쓰이게 될 거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 상당히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면 양반이지. 뭐 어느 조직의 약점, 약의 위치, 마음에 둔 사람의 약점 등등. 나랑 리안이 얼마나 신사적인지 알게 될거야.”


“아니, 리안이 친절한 사람인 건 나도 아는데. 그래도 뭔가 분위기 라는 게 있지 않아? 꼭 옆집 사람한테 식당 물어보는 것 같잖아.”


“식당 물어보고 있네. 그리고 왜 은근슬쩍 나는 빼냐?”


란펑은 대답하지 않고 수정구슬에 손을 올렸다. 맑은 수정구슬 안에 소용돌이가 치기 시작했다.


“와, 저 연기는 어디서 오는 거에요?”


“내 마력. 그리고 너의 마음. 네가 간절할수록, 나를 신뢰할 수록 명확하게 나와.”


리안은 감탄하며 수정구슬을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면서 손과 입은 국수를 퍼먹는 걸 보면 이놈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얼마 지나지 않아 연기는 형체를 가졌다. 다만 뭐라 말할 수 없는 독특한 형태가 되었다.


“너, 너어는 좀 의심을 해야 할 것 같아.”


수정구슬엔 지도 한 장과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글씨들이 빼곡히 떠올랐다.


대강 내용을 보니 지금 우리가 있는 위치에서 어떻게 가야 하는지와 가격은 얼마이고 어디서 재료를 공수해서 어떻게 만들고 있는지가 전부 적혀있었다.


거의 가게의 영업비밀 전부를 빼 온 것 같은 정보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란펑의 말에 격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 대체 얼마나 얘를 신뢰하기에 결과가 이렇게 상세하게 나오냐?”


“하하, 제가 잘 믿어야 결과가 잘 나온다기에 저도 모르게 그만.”


“웃고 넘길 일이야? 그러다 장기 빼간다?”


그렇게 말하고 란펑을 보니 살짝 얼떨떨해 하면서도 묘하게 기뻐하는 것이 보였다. 역시 저놈도 정상은 아냐.


“어때? 만족스러워? 또 질문해보고 싶은 건 있어?”


난 이제 란펑이 왜 점을 치는지 진지하게 궁금해졌어. 이짓을 왜 하고 뭐가 있기에 하고 있는지 말이야.


“란펑 씨의 본모습이 궁금해요.”


“아, 그건 안 돼.”


의외로 즉답. 나야 이게 본모습이긴 한데 신수는 본모습이 따로 있나? 아님 원래 크기가 됐을때의 모습?


“이제 와서 부끄러운 거야?”


“아니. 나랑 관련된 건 점을 칠 수 없어. 금기이기도 하고 안 보이기도 하고.”


뭔가 귀찮다. 저녁 메뉴나 가게 위치 같은 것도 보여주면서 자기랑 관련 된 건 안 된다니.


“그건 아쉽네요. 그럼 더 없어요. 내일 입항하는 배가 몇 대인지 정도 알고 싶긴 한데, 알면 왠지 더 힘빠질 것 같으니 그만 둘게요.”


공무원도 참 고달픈 직업이야.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힘든 건 아무도 안 알아주고.


공무원이 상납금 받기가 가장 쉬워서 난 좋아하지만.


“앞으로 너희 둘 한테는 점 안 칠래. 뭔가 회의감 들어.”


란펑은 그렇게 말하고 자기 몫의 국수를 깨작깨작 먹기 시작했다. 저것도 복채로 쳐주는 모양이다.


“탄트라에선 진상들 안 만나봤나봐?”


“고향에선 점 안 쳤어. 아니다. 500년 전까진 쳤었던가? 기억은 나는데 년도를 잘 모르겠네.”


대체 몇 살인 거야. 당장이라도 할머니 쉰내가 나야 할 것 같은데 아기냄새 밖에 안나니 원.


“방금 되게 실례되는 생각 하지 않았어?”


날카롭긴.


“다 놀았지? 맥주 안 사온 놈은 내일 출근하러 가시고. 신수님은 장식 마저 하시고. 나는 껀수 없나 다녀와야겠다. 자 해산!”


나는 손뼉을 치면서 리안에게 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기분이 상할 법도 한데도 리안은 사람 좋게 웃으며 그릇들을 챙겨 돌아갔다.


“내일 퇴근하고 다시 들릴 게요.“


뭔가 묘하게 여기에 올때보다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잘 놀았다는 거니 좋은 거겠지.


“쟤는 왜 우리랑 논다니? 너 매혹 걸었니?”


“그런 부도덕한 짓 안 한다니까?”


“그래요. 장하다 장해. 근데 진짜 왜 오는 거야?”


“사람의 인연에 이유란 없는 법이지. 그저 지금의 인연에 감사하며 살아가면 되는 거야.”


국수에 들어있던 견과류를 볼에 붙이고 그렇게 말해 봐야 아무런 위엄도 없다. 그 앵앵거리는 소리부터 어떻게 해보자.


“지금 되게 좋은 소리 한 것처럼 구는데, 요약하자면 자기도 모른다는 소리를 되게 길게 말한 거일 뿐이거든?”


란펑은 자랑스러운 자세로 굳었다. 예전이야 그렇게 말하면 철학자라고 칭송해 줬겠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다.


“너는 꼭 내가 언젠가 예절교육을 하고야 말겠어.”


“재미있겠네. 근데 그건 그거고, 일단 장식부터 하자?”


란펑은 할말이 없는지 투덜거리며 작업에 들어갔다. 란펑이 언제쯤 볼에 붙은 견과류를 눈치채나 궁금하긴 했으나, 나는 껀수를 알아보기 위해 가게를 나섰다.


내일은 가게를 여는 날. 또 어떤 귀찮은 일이 일어날지 지금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야근에 연재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늘어져버렸군요.


잔잔하게 일상적인 분위기로 갑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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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암초의 바다 - 9 21.07.10 19 0 13쪽
69 암초의 바다 - 8 21.07.07 19 0 11쪽
68 암초의 바다 - 7 21.07.01 19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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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암초의 바다 - 5 21.06.19 22 0 12쪽
65 암초의 바다 - 4 21.06.10 19 0 14쪽
» 암초의 바다 - 3 21.06.07 20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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