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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의 리루비안 연재지

기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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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텐스
작품등록일 :
2020.08.29 17:54
최근연재일 :
2024.02.29 20:38
연재수 :
1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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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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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글자수 :
697,994

작성
21.08.25 2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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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암초의 바다 - 15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18년전 노르센텀 어느 저택. 나는 흡혈귀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났다. 레노르망. 한때 번성했다고 하나, 내가 태어났을 무렵엔 이름만 남아있었다.


대저택이 아닌 뒷골목에서 자라난 나는 뒷골목 출신 치고는 운이 좋게도 부모님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인간도 그렇지만 마족은 더더욱 교육받기 어려운 환경에서 교육을 받은 나는 꽤나 희귀한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살던 도시에 마물사냥이 일어났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부모님은 나를 피난시켰고, 그것이 내가 본 마지막 부모님의 모습이 되었다.


“워워. 초를 치려는 건 아닌데, 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가요?”


이야기가 진행되던 와중 리안이 태클을 걸었다. 기껏 얘기해주니까 뭐가 또 불만인 건지.


“이미 쳤어. 나 기분 상했다. 이제 얘기 안 해.”


“에이, 전 재미있게 듣고 있었다고요.”


“나도 잘 듣고 있었어.”


“나도.”


“넌 빠져 미역 머리.”


“쳇.”


나는 브랜디 한잔을 쭉 들이켰다. 숙성된 과일향기가 풍부하게 피어 올랐다.


“크후. 그럼 다시 이어가자면.”


혼자 남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사람을 해치는데 거부감이 없었고, 그걸 바탕으로 용병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용병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의외로 적성에 잘 맞았고, 대부분의 일은 협박 정도면 끝이 났다.


“어, 저기, 음. 아니요. 계속 하세요.”


“한 번만 더 이야기 끊으면 네 목숨도 끊을 거야.”


그렇게 뒷골목에서 살기를 8년. 계속된 용병생활에 염증이 난 나는 콜로딘으로 가는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우연찮게 그날 내가 살던 도시에서 마물사냥을 저지른 자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때마침 제임스에게 의뢰를 넣은 참이던 나는 곧장 계획을 실행하였다.


“설마 그때 그 추가 의뢰가 그거였어요?”


“그거라면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나나 너네나 별거 안 했으니까. 어차피 우리가 아니었어도 대가를 치렀을 놈들이고, 난 그걸 좀 더 앞당겨줬을 뿐이야.”


그 놈들의 적대조직에게 놈들의 정보를 풀었다. 그렇지 않아도 원한이 많은 녀석들이었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가 할 일은 그저 멀리서 지켜보다가 놈들이 들고 있던 부모님의 유품을 빼돌리는 것뿐이었다.


“인생 최대의 작전이었지. 실패했으면 여기에 없었어도 이상하지 않았어.”


“뭘 빼돌렸는데?”


“요거.”


나는 언제나 내 허리춤을 지키고 있는 칼을 살짝 들어 보였다.


“기념품으로 사셨다더니.”


“기념품이지. 대가로 저승길을 줬고.”


진짜 기념품이랑 진배없는 게, 이걸 뽑아서 누굴 찌르거나 한 적이 없다. 본토에 있을 때야 칼 많이 썼다지만, 이 녀석으로 바꾼 뒤론 뽑은 기억조차 몇 없을 정도로 희미했다.


“험하게 사셨네요.”


“오냐. 이제 됐지? 이제 나와 관련된 질문 금지야. 알았어?”


남의 과거 따위가 뭐가 듣고 싶다고 묻는지 원. 남들에 비하면 좀 험하게 산 것도 같은데, 그게 이야깃거리가 될 사유가 되는지 궁금해.


나는 한상 가득 차려진 아카라네 요리들을 와구와구 집어먹었다. 여기 종업원은 마음에 안 들어도 음식은 참 마음에 들어.


“저기 갑자기 훈훈한 분위기 연출하는데 미안한데, 결국 마리가 왜 애국심을 가지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미안하면 말하지 마! 왜 또 굳이 캐묻고 있어?”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그 얘기 들으려고 했었죠.”


거기 탐정네. 너 다 알고 있었잖아? 한 번도 까먹은 적 없었잖아? 이제 와서 모르는 척하고 있어. 좋아, 오늘부터 넌 3호다. 수법이 다른 놈들과는 전혀 다른 과네.


“몰라. 그냥 용병들이 꼴통들이라 나도 물들었나 보지.”


어색한 침묵.


“······.”


“야, 뭔가 숨기고 있다. 잡아!”


“제가요? 어떻게요?”


“어떻게든!”


“뭐야? 밥 먹는 데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리안과 란펑이 소란을 피우는 사이 탐정네와 아카라가 슬그머니 내 뒤로 다가왔다.


“망할!”


나는 나를 잡으려고 다가오는 손길을 널찍이 뛰어 피했다. 그러나 내가 착지한 곳은 가게 구석이었고, 나는 포위당했다.


“또 뭐! 뭐가 듣고 싶은 건데?”


“하다 만 얘기.”


“쳇, 너희들 노르센텀이었으면 다 깜방행인데.”


어느새 흥미진진한 얼굴로 빨대로 주스 빨아먹으며 지켜보는 아저씨까지 생겼잖아. 이놈이고 저놈이고 남의 과거사를 오락거리로 생각하고 있어.


“사람이 어떻게 자기 취향의 근원을 딱 집어서 말해? 란펑 너는 너가 언제부터 왜 탄트라를 좋아했는지 말할 수 있어?”


“나는 탄트라를 지킬 존재를 원하는 이들의 소망에서 탄생한 존재. 내가 탄트라를 좋아하는 건 필연이라고 생각하지 않니?”


아 예, 그렇죠. 신수셨죠. 거 참 편리하네.


“리안! 넌 뭐 좋아하는 거 없냐?”


“저요? 전 기계 만지는 거 좋아합니다.”


“왜 좋아해?”


“아버지가 그 일을 하시거든요. 저도 옆에서 도와드리는 거 좋아했어요.”


“젠장! 그럼 너는?”


“전 단 거 먹는 걸 좋아해요. 이유는 필요한가요?”


“나는······.”


“넌 빠지라니까.”


“쳇.”


진짜 세상이 너무 란펑 위주로 흘러가는 것 같다. 애가 어떻게 실패가 없냐?


“알았어, 알았어. 젠장. 어쩌다 보니 세르방트에서 일을 하게 됐는데 거기서 세르방트 놈들이 엄청 재수없게 굴더라고. 그래서 싫어하게 됐어. 이제 됐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물러나라는 손짓을 보냈다. 다들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었는지 내키지 않는 분위기였지만, 내가 진심으로 화낼 태세인 걸 보자 슬금슬금 제자리로 돌아갔다.


“너희들 말이야, 너무 나한테 막대하는 거 아냐?”


용병놈들이나 깡패놈들도 나한테 이렇게 굴지 않았는데. 간만에 그놈들이나 보러 갈까? 보스랑 얘기도 해보고 말이지.


“마리, 혹시 자업자득이라고 들어봤어? 인과응보는? 자승자박은 어때?”


“너 다른 사람한텐 친절한데, 나한테는 안 그러는 것 같아.”


“음. 확실히 요즘 마리한테 쌀쌀맞게 굴긴 했어. 마리도 그걸 자각했다면 좀 자중해야겠지.”


“그래. 자중 좀 해줘라. 죽겠다 죽겠어.”


나는 자리로 돌아와 브랜디나 마저 들이켰다. 참 사람 험하게 다루는 놈들이야.


“혼혈이라고 하셨죠.”


별안간 말을 거는 3호. 뜬금없이 뭔 소리래.


“엉. 히끅! 혼혈이지.”


마족과 인간 혼혈이 드물긴 하지. 보통 마족만 나오니까. 그나저나 쟤도 뭐 있다 하지 않았나? 설녀 뭐시기?


“어떤 느낌이에요?”


“어떤 느낌이긴? 아무 느낌도 없지. 혼혈이어도 마족은 마족이고, 난 다른 마족이 되어본 적이 없으니까 뭐 대충 다들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혼혈은 인간이랑 비슷하다는 얘기도 있긴 한데, 솔직히 둔한 거 말고는 잘 모르겠어.


“그런가요? 마리 씨도 저랑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했는데요.”


“어떤 느낌인데?”


“금방이라도 선을 넘어가고 싶은 느낌.”


경계선. 란펑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얘가 나보다 마족에 더 가깝다고 했지.


“설녀의 아이가 용케 인간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사실 좀 늦은 감이 있어.”


란펑은 조신하게 브랜디를 한 모금 마셨다.


“뭔가 아시는 게 있나요?”


그렇게 말하는 3호의 모습은 장난기가 쭉 빠진 진지한 모습이었다.


“잘 알지. 그게 그렇게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거였으면 세상에 설녀는 더 이상 없었을 거야.”


란펑은 그렇게 말하고 탐정네의 손을 잡았다. 탐정네는 잠깐 흠칫 하였으나 이내 란펑의 손길에 순응했다.


“아까 물어보려고 했었던 게 이거지?”


“네.”


“점이 아니니 편하게 대답해도 좋아. 너는 어느 쪽을 선택하고 싶어?”


차가운 침묵. 그리고 얼음이 깨어지듯 묵직한 한마디가 울려 퍼졌다.


“저는 제임스의 딸 라일라에요.”


라일라의 등 뒤로 거대한 한 쌍의 얼음 기둥이 솟아올랐다. 순식간에 가게 안은 한기로 가득 찼다.


“너의 저주는 깊고 단단해서 어지간한 방법으론 해제할 수 없어. 하지만 내가 그 짐을 좀 덜어 줄게.”


청아한 파열음. 얼음 기둥은 크리스털이 깨어지듯 산산조각이 나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깨어진 파편은 마치 설탕을 허공에 뿌린 것처럼 반짝이며 이내 가라앉아 사라졌다.


“아, 여긴 이렇게 더웠던 거군요.”


라일라는 못 믿겠다는 듯 몸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흰색 원피스가 어울리는 백발의 소녀는 지금까지 보인 가식의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웃는 얼굴이 되었다.


“좋아하긴 일러. 나는 네가 결심을 굳힐 수 있도록 도와줬을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간단해. 지금까지 해왔던대로 하면 돼. 선을 넘지 마.”


“힘들겠네요.”


라일라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나 체념하거나 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


저 녀석도 힘든 싸움을 하고 있었구나.


지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 같이 이후엔 조용히 식사가 이어졌다. 얼음이 깨어질 때 모두의 이야깃거리도 같이 깨진 것 같았다.


“오늘은 여러모로 도움을 받았네요. 다음에 또 올게요.”


돌아가는 라일라는 땀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인간임을 무엇보다 확실하게 알려주는 증거였다.


“마리는 어떻게 생각해?”


란펑이 물었다.


“뭐가?”


내가 대답했다.


“쟤는 너보다 훨씬 안 좋은 상황이었어. 그런데도 결정을 내렸지.”


리안이 날 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왠지 이 다음 말이 듣고 싶지 않다. 만약 듣는다면 굉장히 귀찮아질 것만 같다.


“네가 지키고 싶은 건 뭐야?”


그게 뭐야? 왜 그런 걸 물어봐? 나는 내 몸 하나만 건사하면 그만인데?


“노르센텀 사람인 마리? 레노르망 가문의 마리? 그것도 아니라면 흡혈귀인 마리?”


“자자,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여기까지 하자고요. 저는 내일 출근해야 하고, 두 분도 내일 영업해야 하시잖아요?”


맞는 말이지. 여기까지 하자. 언제까지 이 지겨운 얘기를 계속할 생각이야?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너무 늦게 주무시지 말고요.”


리안은 그렇게 말하고 돌아갔다. 그 뒤로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있긴 하지만, 역시 묘한 거리감이 느껴진다.


“나중에라도 생각나면 알려줘. 대신 꼭 생각해봐. 난 먼저 들어가서 잔다.”


란펑까지 들어가고 나는 이제야 현지인들이 활동을 시작하는 도로에 혼자 남았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


해가 졌음에도 거리는 분명 더울 것이다. 그럼에도 팔뚝에선 땀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내가 마족이라는 증거.


그러나 이 끓어오르는 것 같은 마음은 내게 인간의 피가 섞여 있음을 조용히 알려주었다.


나는 무슨 마리일까?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간단하게 마리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편이었습니다.


과거 이야기만으로도 장편이 하나 나오겠군요. 


좀 더 자세하게 다룰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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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암초의 바다 - 4 21.06.10 19 0 14쪽
64 암초의 바다 - 3 21.06.07 19 0 12쪽
63 암초의 바다 - 2 21.05.29 25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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