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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미학

웹소설 > 자유연재 > BL, 로맨스

쓰다A
작품등록일 :
2020.05.16 20:45
최근연재일 :
2020.11.10 23:35
연재수 :
17 회
조회수 :
606
추천수 :
15
글자수 :
110,014

작성
20.05.16 2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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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05. 친근해지려고.

DUMMY

“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은행, 대출, 대출 받을 수 있습니다!”


절제는 미학의 전 회사 막내, 별명처럼 반짝이는 머리가 두 눈에 들어오는 머리가, 가뜩이나 모자란 머리카락을 더욱 쥐어뜯으며 ‘은행, 대출’을 외치는 것을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절대로 파산만은 할 수 없다면서 딱 벌어진 어깨와는 어울리지 않게, 두 눈 가득 눈물을 그렁그렁 매다는 그 모습에 절제가 시선을 보드로 내렸다.


그저, 보드 게임, 아무 것도 걸린 것 없는 그냥 브루마블인데도 지난 일주일 간 당황스러울 만큼 미학의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 모두가, 브루마블만 시작하면 이상증세를 보였다.


그 덕분에 묘하게 현실감도 느껴지고, 그 하는 양을 구경하는 것도 꽤 재미있긴 했지만 자신들이 판에서 이기기라도 하면 두 눈을 반짝거리며 칭찬해주길 바라는 것이 역력한 표정으로 미학을 바라보는데, 그 행태는 볼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제는, 하마터면 절제보다 10살이나 많은 병태에게 육성으로 욕을 뱉을 뻔했다.


“대출 담보로 뭘 내놓을래.”


이번에는 관람만 하겠다며 은행 역할을 맡은 세현이 두 눈을 번쩍이며, 22살이라기엔 그 겪은 역경이 너무 컸을지 모르겠다고 느껴지는 머리에게, 자비심 따위 조금도 담기지 않은 매우 냉혹한 목소리로 물었다.


“담...담보....”


“서울 내놔. 서울. 파산 직전인데 서울이 무슨 소용이야.”


울먹이는 머리의 앞에 있는 서울카드를 세현이 집어 들었다.


“혀...형...그건, 그래도, 그건....”


“아님, 파산해!”


절박한 표정으로 세현을 보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울카드의 끄트머리를 잡고 있던 머리가 힘없이 카드를 놓았다.

그에 미학이 옆에서 ‘역시...머리 넌....’하고 중얼거렸고, 머리가 갑작스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꺾더니, 더 공부하고 오겠다며 목청껏 외치는 바람에, 마침 오렌지 주스를 마시던 절제가 놀라, 두 눈에 눈물을 찔끔 매달고서 연신 콜록거렸다.

그리고 분위기는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아, 괜, 괜찮...켁, 괜, 콜록, 괜찮.”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미학을 본 절제가, 거의 반사적으로 세현의 손을 자신의 등에 올렸다.

미학의 그 부담스러운 걱정과 도움 만큼은 받고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현의 손은 움직이지 않다. 오히려 뜨거운 것을 잘못 잡은 사람처럼, 절제의 등에서 퍼뜩, 빠르게 손을 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분 나쁜 세현의 반응에 기침이 멋은 절제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미학의 손이 절제 앞에서 멈추어 허공에 떴다.

세현의 옆에 선 머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턱을 달달 떨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 깐 머리는 눈을 불안 한 듯 이리저리 굴렸다.



“김세현 손-이 약-손-인-가 봅니다.”


미학이 천천히 손을 내리면서 몸을 뒤로 물렸다.


“굳이, 김-세-현-부터 찾는 게....”


세현이 마치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은, 상당한 공포를 담은 채로 절제를 향했다.


‘이, 눈새가! 어디서 내 손을 잡아?! 누구 앞이라고! 어?!’


보드게임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옆에 한절제가 앉아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간 이것, 저것 온갖 핑계를 대가며 보드게임에 참석하지 않은 탓에, 다른 형들이 억지로 브루마블판으로 끌려왔다가 울며 뛰쳐나가는 것을 반복하다보니 한 번도 참여하지 않은 자신에게 불똥이 튀어 어거지로 온 것이건만.


원래부터가 알 수 없는 사장 속이었기에 어느 포인트에 분노한 것인지 확정지을 수는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사장이 절제에게 상당한 애착을 느끼고 있으며, 절제가 사장 대신 자신을 찾은 것에는 확실히 기분이 상했다는 것이었다.


지난 해, 무지개다리를 건넌, 사장의 반려견 멍이와 같은 선상에 있다는 것부터가 절제가 특별한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간보다 동물을 더 편하게 대하는 저 사장이었다.


미학은 동물농장을 보면서는 곽 티슈를 안고 엉엉 울거나, 퍽 절망적인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미스테리나 스릴러, 가슴 아픈 로맨스를 보고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암암리에, 저들끼리는 사장을 들짐승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세현이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인위적으로 ‘아!’하고 무언가 크게 깨달은 것 같은 느낌의 외침을 내뱉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너무 괘념치 말거라. 이건 사장 눈에 띈 네 잘못이다, 한 절제.’


“사장님 손이 닿는 게 부끄러워서 그렇구나!”


세현 자신이 내뱉은 말이었음에도 쌍욕이 나오는 대사였지만, 세현은 아직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하게 남아있었다.

들짐승에게 붙잡혀 갈갈이 찢기기에 자신은 아직 너무 여리고 어렸다.


“뭐...?”


절제가 경악으로 물든 얼굴을 하며 세현을 올려보았지만, 세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야만 했다.


“하, 하, 사장님이 너무 멋져서 그렇겠지만, 괜찮아! 봐! 사장님도 괜찮아 하신다고!”


“미....”


질린 얼굴로 입을 여는 절제가, 두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 ‘미’다음에 예상되는 다음 음절-친으로 예상되는 그 음절-을 내뱉기 전에 세현이 절제의 등을 퍽 밀며 선수를 쳤다.

그 때문에 미학의 앞으로 고꾸라진 절제는 미학에게 보기좋게 안기고 말았다.


“하, 하, 이렇게 부끄러움이 많아서 어떻게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고. 참, 아까 병찬형이 주방 일을 좀 도와달라고 했는데, 사장님, 은행 역할은 사장님이 동시에 맡아주세요. 저는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폭탄을 던진 세현이 저 살길을 찾아 빠르게 거실을 벗어났고, 머리는 멍하니 사장의 가슴팍에 안긴 그대로 몸을 굳힌 절제와 미동도 없이 앉아있는 사장을 보며 다시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래서 게임이 끝난 거야, 아닌 거야. 나, 가도 되는 거야, 안 되는 거야.’


지난 일주일간 브루마블 모임에 다녀온 형님들이 분명, 절제만 건드리지 않으면 파산해도 용서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건 물 건너간 모양이었다.

머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무래도 지난 일주일 동안 형님들이 겪었던, 누구나 들으면 피를 토한다는 사장님의 3시간 제테크 강의를 받게 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쩐지, 가장 운이 나쁘다 자부할 수 있는 자신이, 다른 형들이 피해가지 못 한걸 피해가나보다 했다.


머리는 속으로 울었다.

아무래도 사장 몰래 부적이라도 써야 할 것 같다.



*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자리는, 가늘게 뜬 두 눈으로 절제의 정수리를 내려 보던 미학이 별안간 벌떡 일어나, 빠르게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기점으로 끝났다.

미학에게 안긴 것만 같은 모양새가 된 것에 당황스러워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절제는 당연히 바닥에 머리를 박고 말았고 말이다.


머리를 바닥에 찧어 ‘아’소리를 내며 아픔을 호소하였을 때에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벗어난 미학이, 저녁식사 시간이 되자 항상 머리가 앉았던 절제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곤 전 보다 더 심하게 이것, 저것 절제를 챙기기 시작해 절제는 다시 한 번 더 체 할 위기에 놓였다.


“저...제가...알아서 먹을게요.”


갑작스럽게 자신의 옆에 딱 붙어 앉아서는, 한 번이라도 절제의 젓가락이 향한 적 있는 반찬이라면 모조리 절제의 앞에 놓는 미학 때문에, 건너편에 세현과 나란히 앉은 머리는 물론, 둘째 날 부터 아침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기 시작했던, 도대체 왜 전 회사 부하직원이면서 미학의 집에서 함께 은거생활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미학의 전 회사 부하직원들 모두가, 울상을 지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흰 쌀 밥 이외의 반찬은 거들떠도 볼 수 없겠구나.

그리 생각하며, 다음번에는 절제 밥상을 따로 차려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절제의 앞으로 간다고 해서 반찬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누구든지 원한다면 팔을 뻗어서 충분히 먹을 수 있기는 했지만, 손을 절제가 있는 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절제의 시선을 피해서 안광을 번쩍이는 미학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는지 조금은 위축되는 부분이 있었지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처럼, 저 선비 같은 녀석은 미학 무서운 줄도 모르고 대들기까지 했는데 어째서, 뭐가, 어디가 그렇게 예쁘다고, 저렇게 편애하는 것인지, 머리는 미학에게 예쁨 받아 본 역사가 없던 자신과 확연히 다른 절제를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뭐, 무-슨 문-제-가 있나.”


절제의 밥 그릇 옆에 앞 접시를 두고서 굴비 살을 발라 가득 쌓아놓던 미학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특유의 느린 말투로 머리에게 물었다.


“아, 아, 아닙니다.”


미학의 눈동자에서 눈 돌리라는 무언의 압박을 받은 머리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와구와구 밥을 입 안에 넣었다.

그 옆에 앉은 세현이 작은 소리로 끌끌 혀를 찼다.


“괜찮다니까요. 도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체할 것 같은 분위기를 참지 못 한 절제가 결국, 밥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도대체가 이 집에 오고 나서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너무 어렵다.


절제가 최대한 담담해지려 애쓰며 미학을 똑바로 올려보자, 무뚝뚝해 보이는 표정과는 대조되도록 발갛게 물든 귀를 한 미학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친근...해 지려고? 부끄럽지...않을 만큼?”


“예?”


미학의 말에 대꾸를 한 것은 절제가 아니라, 놀란 세현이었다.

제 입으로 뱉고도 자신의 목소리에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세현이 미학의 눈치를 살폈다.


미학과 빵집에서 같이 일한다는 소리에, 멍이처럼 정 들겠다던 제 사촌 누나, 이원의 농담에, 미학이 뭐라고 했던가.


단 음식만 먹다가 머릿속까지 달아져서 뇌가 다 녹았냐고 하지 않았던가.

너도 그리 생각하면 네 뇌 친구랑 좀 더 놀 수 있게 설탕에 절여주겠다던 그 말에 얼마나 소름끼쳤는.


그 말을 또 굉장히 덤덤한 표정으로 해서 자신이 얼마나 무서웠는데.

당장에 설탕 통에 자신을 집어 던져 넣을까봐 얼마나 마음 졸였었는데.


그렇게만 끝났으면 다행이지, 미학이 어떻게 했는가.


저 사람이 세현 자신에게 어디 웃음 한 번 지어준 적이 있던가.


어디서 잠시 쉬고있을라 치면 언제 보고 온 건지, 지척에 다가와서 아무런 말도 없이 매섭게 자신을 노려보지 않았던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이었는데.


방문했던 누님이 아직도 그렇게 사이가 머냐는 말에 가까운 게 얼마나 가까운 거냐면서 자신을 징그러운 벌레마냥 쳐다보지 않았던가.


그랬던 사람이 뭐, 친근? 친근해 지겠다고?


절제가 사장님이 친절하셔서 다행이라고 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놀랐었는데! 그게 단순히 외부사람이어서 그런 게 아니었단 말이야?!

지금보다 더 친해지겠다고?!


여러모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 사장의 머리를 흔들며, 원래대로 돌아오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의 세현이었지만 제 목숨은 소중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뭐-지?”


미학이 한껏 찌푸린 얼굴로 일어선 세현을 보았다.


“그러고 보니! 저녁에 강수확률이 60퍼센트였어요! 빨래를 구하러 가보겠습니다!”


세현은 살기위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이번에는 머리가 옆에서 ‘그러게 놀라지 않는 연습 좀 하라니까....’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저 녀석이 뭐가 그렇게 예쁘냐고!’


마음속으로만 외쳐지는 그 외침을 들어야만 할 사람은 듣지 못 한 채, 세현은 자리에서 사라졌고, 식사자리에 남아있는 모두는 다 함께 체해, 서로 손가락을 따주며 끈끈하게 친목을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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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7. 관심과 스토킹의 차이를 설명해주지. 1 20.11.10 19 0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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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 파티 원 모집은 아찔하게. 20.06.13 37 1 14쪽
12 12. 휴게소에서 광란의 파티를. 20.05.31 29 0 15쪽
11 11. 빙구와 미미의 죽음의 레이스. 20.05.29 29 1 14쪽
10 10. 오구오구오구 = 오, 우리 빙구(×3). 20.05.27 23 0 14쪽
9 09. 납치 아니고, 야반도주. 20.05.24 26 1 16쪽
8 08. 그러니까, 위험하게, 누가 그렇게 사랑스러우래요? 2 20.05.22 25 0 13쪽
7 07. 그러니까, 위험하게, 누가 그렇게 사랑스러우래요? 1 20.05.17 27 0 15쪽
6 06. 먹이고, 재우고, 포동포동 살찌워서 잡아먹을 거냐고요. 20.05.17 31 1 11쪽
» 05. 친근해지려고. 20.05.16 42 0 12쪽
4 04. 사람은 오래 만나봐야 아는 거라더니. 20.05.16 61 0 15쪽
3 03. 일 하느라 그랬다고요? 20.05.16 46 0 14쪽
2 02. 미안합니다. 20.05.16 32 1 13쪽
1 01. 만남과 만남. +1 20.05.16 92 8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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