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왜 이렇게 꼬이지?
48. 왜 이렇게 꼬이지?
“나도 오늘 알았습니다.”
“그가 왜 절 피하는 거죠?”
“죄책감 때문 아닐까요?”
“죄책감? 죄에 대한 일만의 책임감이라도 느낀다면 도망치지 말아야하는 거 아닙니까?”
“8년 전 일 아닙니까. 당황스러웠겠죠.”
“당황스러웠다고요? 그 차에 저도 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저를 감싸셨던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죽음에 대한 언급이 나오자 그의 입이 닫혔다.
그동안 자신의 전력을 속이고 야구계에 몸을 담았지만 사실이 드러난 이상 이젠 그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몰랐다면 모를까, 고의든 아니든 한국야구의 전설인 아버지를 사망케 한 자가 버젓이 야구계에서 활동하긴 어려울 게다.
하기야 양심이 있는 자였다면 허겁지겁 도망치진 않았을 것이다. 밝혀지지 않은 여죄가 있는지 아직 확인할 순 없지만 지금 그의 태도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내가 설득해 보겠습니다.”
“무려 8년입니다. 설득될 자라면 진즉에 마음의 자세를 갖췄을 겁니다. 더욱이 요즘 언론에 제 이름이 자주 오르내렸을 텐데, 그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도 그렇군요. 여하튼 연락처를 남겨 주십시오.”
“파손시킨 기물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하니까 제 번호로 계좌번호 하나 보내주십시오. 청구하신 대로 이체하겠습니다.”
“아! 그건 괜찮습니다. 고 팀장과의 문제가 원활히 해결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허망했지만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놈이 꼬리를 드러냈다고 판단했다.
그저 만남을 청했을 뿐인데.
그렇다면 이제 토끼몰이를 하면 된다.
그래서 점찍어 뒀던 이와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어차피 자신은 그를 직접 쫓거나 손을 댈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강구했었다.
여러 경로를 거쳐 알게 된 이곳 소장은 특수부대 출신이며 국정원에서도 활약했던 상당한 실력을 지닌 자라고 들었다.
웬만한 일은 아니, 돈이 되지 않는 의뢰는 받지도 않으며 일단 의뢰를 맡으면 결과가 확실하다고 소개받았다.
[팔도 심부름센터]
이름은 촌스러웠지만 사무실은 그렇지 않았다.
임대료 비싼 강남역 인근 고층빌딩에 입주해 있었으며 안으로 들어가는데 보안도 확실했다. 신원을 확인하고 안내를 받아 이동하는데, 직원이 족히 스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건 아닌 게 확실했다.
먼저 실장이라는 자와 상담했는데, 그는 유성이 누군지 알면서도 알은척을 하지 않았다. 또한 긴말 필요 없고 소장을 만나겠다고 하자 그는 잠시 기다리라고 전하고 자릴 비웠다.
5분 뒤, 소장과 마주앉았는데 인상부터 녹록치가 않았다.
“어떤 의뢰를 하시려는 건지 설명부터 듣고 싶소.”
“독대를 원합니다.”
“아! 김 실장은 부르면 다시 들어와.”
“네.”
유성도 어디 가서 꿀릴 사람이 아니다.
기세와 실력 모두 갖췄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상대는 잘 벼린 칼날 같은 느낌이었다.
만반의 대비를 하지 않고 맞닥뜨리면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차갑고 매서워보였다.
말은 않고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자 그는 씩 웃으며 담배를 한 개비 빼어 물었다.
“도움이 필요해서 온 거 아닙니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럼 믿으십시오. 이 짓으로 밥 벌어먹고 살려면 무거운 입은 기본이니까.”
“좋습니다. 사람 하나를 샅샅이 훑어야 합니다.”
“정보를 많이 줄수록 실수가 줄어들 겁니다. 겨우 사람 하나 털자고 거금을 들이진 않을 거 아닙니까?”
잠시 고심했지만 어차피 일을 맡기려면 윤곽은 알려줘야만 했다.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았지만 기본 착수금이 5,000만원인 그를 움직이려면 믿지 않고는 거래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8년 전 교통사고를 언급했다.
“이런 말이 어떨지 모르지만 나도 최 감독님 팬이었소. 너무 허망하게 돌아가셔서 안타까웠는데, 뭔가가 있단 말이오?”
“그건 지금부터 소장님이 파헤쳐야 할 일이죠. 사고를 냈던 자가 실형을 받지 않고 풀려나 버젓이 야구계에서 일하고 있는데, 오늘 내가 찾아가 만남을 청했더니 도망가더이다.”
“도망? 허허허... 의뢰를 받겠습니다.”
소장의 이름은 정호인, 나이는 55세였다.
그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왜냐면 교통사고 기록을 확인하면 다 나올 것이며 그런 일은 전문이었기 때문이다.
유성은 그와 개인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착수금 이외에 소요경비는 물론 성공사례금까지 언급했다.
하지만 정 소장은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다른 얘긴 하지 않았다. 그래서 보안을 유지해 달라는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정도는 지킬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
걱정이 줄을 이었지만 조바심을 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기에 일단 정 소장을 믿고 정상일정을 소화하기로 했다.
차를 렌트해 미오랑 같이 서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부산까지 내려갔다. 중간에 아버지 산소도 들렀다.
“나랑 같이 일본에 가자.”
“일본?”
“응. 너도 좀 인생을 즐겨. 맨날 훈련만 했다면서.”
“그러는 넌?”
“나야 불안하니까 그러지. 갈 길도 멀고. 넌 이제 체력훈련만 하면 되잖아. 날도 추워지는데, 무리하지 말고 너한테 선물을 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나랑 같이 지내자.”
“좋아! 가자.”
그녀의 말처럼 연말까지는 체력훈련을 할 생각이었다.
딱히 체력의 한계를 느끼거나 불편을 느낄 부상도 없지만 체력게이지 6단을 달성하면 타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그런 목표를 세웠다.
어차피 배트를 잡는 것은 1월 전지훈련부터 하면 된다.
다만 일본에 가면 마음이 해이해질까 걱정했는데, 어디든 자기하기 나름이라고 판단하니 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미오랑 헤어지기도 싫었고.
“나 훈련하는 것도 도와줄 거지?”
“응. 하루 종일 체력훈련을 할 수는 없잖아. 이참에 나도 골프 좀 배워보려고.”
NLDS에서 패하며 허무한 시즌이 끝났다.
마이애미와 한국을 거쳐 열흘 만에 일본에 입국했다.
브렌트와 통화를 했는데, 알렉스 단장은 자릴 지켰고 코칭스텝은 교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했다.
가장 유력한 후보가 브라운이라는 소식에 힘이 났다.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아는 그라면 야구할 맛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확정되기까지 넘어야할 산이 많다고 했지만 긍정적인 결과를 기다려보기로 했다.
또한 정 소장에게도 연락이 왔다.
“벌써 성과가 있었습니까?”
‘순 엉터리더군요. 사고처리부터 재판까지.’
“흑막이 있다는 겁니까?”
‘그럴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판단 하에 이제 더 깊이 파보기로 결정했다는 소식 전해드리려 연락했습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는데... 안타깝네요.”
‘아직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진 못했지만 일본자금의 흔적이 보입니다.’
“일본이요?”
‘그래서 말인데, 일본에 있는 동안이라도 저희 측 경호원을 붙여드리면 어떨까 합니다.’
이제껏 아무 일도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교통사고가 아님을 전제로 할 때, 그 날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발각되면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였다.
이해하지만 사양했다.
자기 한 몸 정도는 지킬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심해야한다는 조언을 명심하겠다는 말을 남겼고 수고하시되 보안에 각별히 유념해 달라는 말도 건넸다.
일본에 와 놓고 집에 들르지 않을 수는 없어 미오와 헤어지게 되었다.
“올 거지?”
“엄마한테 인사만 하고 바로 움직일게. 이바라키 현이잖아.”
“응. 타이헤이요 골프클럽이야.”
미오와 유성의 교제에 대해 일본 언론들은 지겨울 만큼 많은 기사를 써 내려갔다. 거의 소설에 준하는 내용도 있었다.
그만큼 미오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하필이면 왜 한국계냐면서 악플을 다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국인도 아닌 한국계 일본인으로 인식한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배 아파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꼬라지가 어이없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둘의 마음이라고 생각해 신경 껐다.
그런데 오랜만에 만난 엄마의 표정을 마주한 유성은 뭔가 께름칙했다. 온 동에 사람들이 다 아는 미오에 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유성이 먼저 입을 뗐을까.
“미오랑 같이 한국에 다녀왔어요.”
“아빠 산소에도 들렀니?”
“네.”
“그랬구나.”
뭐래도 물어야 정상인데, 끝내 한 마디도 묻지 않았다.
결혼도 하지 않은 청춘남녀가 일주일 넘게 같이 지냈다면 조심하라는 말이라도 할 줄 알았다.
에밀리가 왔을 때와는 완전 딴판이라 의구심이 들었지만 일단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지은에게서 기이한 말을 들었다.
“료스케 아저씨랑 엄마랑 어릴 때부터 친했던 거 알아?”
“그래?”
“아저씨가 엄마를 많이 좋아했대.”
“그 얘기는 왜 하는데?”
“며칠 전 이혼하셨거든.”
“이혼?”
“이혼사유가 엄마랑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무슨 헛소리야!”
유성은 더 이상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은의 말을 믿기도 어려웠고 미오를 생각하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아버지 외에 다른 남자를 고려한다는 것 자체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혼자가 되신 엄마의 외로운 처지를 생각하면 좋은 남자를 만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하필 지금, 멀쩡한 가정을 깨고 엄마랑 무언가를 고려한다는 것부터 어불성설이었다. 6년간 일본에 살 때도 그런 느낌은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지 않던가!
‘그때도 좀 이상하긴 했어.’
두 사람을 함께 본 기억이 있었다.
자선골프의 밤, 미오와 입맞춤을 했던 그 날, 미오 가족들이 인사하러 다가왔는데, 미오 아빠가 과장스러운 몸짓을 보인 것과는 달리 엄마는 아예 본체만체 했었다.
두 가문이 오랜 교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너무 차갑게 대하셔서 역시 엄마는 도도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그 장면이 이젠 영 찜찜하게 느껴졌다.
‘절대 녹록한 분이 아니잖아.’
‘하기야 외가도 동류라고 봐야지.’
시코쿠 최대 야쿠자 조직의 보스라고 하지 않던가!
외가도 호텔, 관광, 스포츠, 파친코와 같은 사업을 해왔고 검은 조직들과 무관하지 않음을 진즉에 눈치 채고 있었다.
그래도 얽히는 것은 정말 내키지가 않았다.
하지만 엄마의 어색한 태도가 자꾸 마음에 걸려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하루 자고 떠날 생각이었기에 가급적 마음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아 하고 싶은 말도 꾹 참았다.
다음 날 도쿄에 볼일이 있어 며칠 다녀온다고 집을 나선 유성이 공항으로 향하는데, 낯선 자들이 앞을 막아섰다.
‘이건 뭐지? 설마?’
장 소장의 경고발언이 떠올랐지만 그건 아니었다.
정중하게 다가와 누군가의 말을 전했다.
다름 아닌 미오의 부친, 료스케가 만남을 청했던 것이다.
이미 언론에서 입방아를 찧고 있다. 딸 가진 아버지로서는 내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 초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불렀던 콜택시를 타지 않고 그들의 안내를 받아 미오의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와 봤지. 그 때...’
자선파티를 빠져나와 미오를 데려다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고 순진했다.
좋아하면서도 그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남자답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 같고 되지도 않을 오해를 해서 시간을 낭비했다.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것이 천행이라고 생각하며 기왕이면 오늘 미오의 부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자 했다.
하지만 인사하는 유성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차가웠다.
“앉아.”
“네.”
“어딜 가려는 거지?”
“미오 만나러 이바라키로 갑니다.”
“그만해.”
“뭘 그만하라는 겁니까?”
“우리 미오 만나지 말라고. 자네에게 줄 생각 없어.”
“미오는 아저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어엿한 성인이고 하고 싶은 일, 만나고 싶은 사람은 스스로 정할 수 있습니다.”
“어허! 내가 말려도 끝내 만나겠다는 거야?”
“이미 우린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고...”
“닥쳐!”
이렇게까지 완강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괜히 어제 지은이 했던 말까지 떠올랐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이지만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 설득할 수 없다면 굳이 언성을 높이거나 충돌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한 유성은 바로 뒤돌아 나왔다.
완력을 동원하는 일에 익숙한 그가 그런 방법을 동원하지 않은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인지, 나름의 배려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꼬이지?’
미오는 부모님이 이혼한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이렇게 유성을 불러 윽박지르듯 만나지 말라고 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할 것이다.
일단 조용히 물러난 것은 잘했지만 첩첩산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미오에게 가족들이 반기지 않는 결혼을 하게 만들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이 있어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자신은 어쩌지 못하지만 미오를 데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화를 했다.
‘치! 왜 그러는데?’
“아저씨를 만났어.”
‘우리 아빠?’
“응.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할 테니까 일단 숙소부터 옮기고 나한테 위치를 보내줘.”
‘알았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와.’
연락이 오지 않아 답답했다. 그렇게 극렬하게 반대했다면 미오를 감금해서라도 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연락했는데, 미오는 숙소도 옮기지 않았고 예정대로 연습라운드를 진행하고 있단다.
유성이 골프코스에 도착했을 때는 16번 홀을 그린 위에서 퍼팅을 하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선작과 좋아요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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