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가죠. 기꺼이!
66. 가죠. 기꺼이!
“너 이제 피칭 시작해야지.”
“피칭이요?”
“아낄 만큼 아꼈잖아. 아끼다 똥 된다!”
“하하하! 무슨 얘기인지는 알겠는데, 전 투수의 꿈은 일찌감치 접었습니다.”
“접은 게 아니고 감춰둔 거겠지. 너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그 누구도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질 못했다.
비슷한 말만 나와도 달라지는 유성의 표정이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믿는 성훈이었기 때문인지, 그런 반응은 나오질 않았고 그는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술술 말을 이어갔다.
“네 어깨는 그 어떤 현역 선수보다 튼튼해. 아냐?”
“그야 그렇겠죠.”
“특히 왼팔은 더 생생하잖아.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야. 너야말로 최고의 좌완이 될 수 있다고 난 믿어. 최 감독님의 전설을 세상에 알리고 그 계보를 이어갈 만반의 준비가 된 셈이지.”
“형은 마치 제가 이런 날을 대비한 사람처럼 말씀하시네요.”
“본의는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현실은 그렇잖아. 23살이 되도록 혹사당하지 않은 네 왼팔은 이제 성장통을 겪을 일도 없고 족히 10년은 그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는 정점에 와 있어.”
“부상 때문에 주춤했지만 저 그래도 MLB 최고의 타자로 성장할 평가를 받은 타자입니다!”
“타격을 접을 수 없다면 병행하면 되지. 이미 타격은 오타니의 경지를 넘어섰잖아. 장타는 물론 정교한 타격이 가능한 네 타격 솜씨를 사장시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아깝긴 해.”
마치 이날을 위해 대사를 준비한 사람처럼 유창했다.
그래도 오랜 습관처럼 굳어진 거부감이 여전했으나 그걸 드러내진 않았다. 마음 한 구석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꾸물꾸물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꾸는 줄이고 조용히 듣는 데 주력했다.
“물론 준비기간이 필요할 거야. 과연 최 감독님에게 물려받은 피칭천재 DNA가 살아있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하지만 그 피가 어디 가겠어. 그건 리틀 야구에서 충분히 증명됐잖아.”
“제 꼬마 적 기록도 알고 있습니까?”
“내가 그런 것도 모르면서 미국까지 따라나섰을까? 난 이번 오프시즌이 네 야구인생의 방향을 전환할 최적의 시기라고 생각해.”
“형님. 지금 제 처지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그건 준비된 사람에게 아무 문제가 되질 않아. 어디면 어때? 네가 가진 보석을 얼마나 잘 갈고 닦는지가 중요하지. 날 믿고 한 번 질러보지 않겠어?”
이전 같으면 약간의 분노라도 드러냈을 유성이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질 않았다.
성훈 입장에서는 서운할 만도 한데, 그 또한 그러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도 무겁게 느껴질 무렵, 그는 엉뚱한 화제를 꺼내들었다.
“난 한국야구가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봐. 일본야구를 무시하고 틀렸다고 떠들길 주저하지 않지.”
“그들이 옳다는 생각은 저도 하지 않습니다.”
“그게 벽이지. 더구나 넌 바로 옆에서 최 감독님의 고통을 지켜보고 자랐을 테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봐. 고통 없는 영광이 있을 것 같아?”
“고통이 아닌 땀과 노력이어야 합니다.”
“누가 강요한 건가? 난 기꺼이 그 고통을 받아들이고 감내하셨다고 생각해. 그래서 더 존경 받고 사랑받는 거라고 보고.”
강요하진 않았지만 그런 상황을 방치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당신의 의지가 워낙 굳건해 그 누가 말려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공감한다.
보다 체계적으로 관리 받지 못한 아쉬움이 혹사에 대한 편견을 양산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런데 성훈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셔서 네 편견이 더 큰 거야.”
“형님!”
“사고 현장에 같이 있었으니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도 없었겠지. 어쩌면 죄책감도 느낄 테고. 하지만 너 똑똑히 말해 봐. 네가 야구를 외면한 것을 아버님이 좋아하셨을까? 투수로 대성할 자질을 물려줬는데 타자로 성공하겠다고 악을 쓰는 모습이 정말 기쁘실까?”
유성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기내에서 피할 곳은 거기뿐이었기 때문이다.
성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와 박혔다.
답은 명확하다. 아버지는 야구를 하길 원하실 테고 투수로 성공하길 그 누구보다 간절히 바라실 게 분명했다.
고사리 같은 손에 야구공을 쥐어주면서 야구의 기본예절부터 가르쳐주신 기억들이 소환되면서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너 울었냐?”
“이 형이 진짜!”
“돌아서 앉아 봐.”
“괜찮아요.”
“어허!”
성훈의 따스한 손길에 촉촉하던 마음의 습기마저 말랐다. 뜻하지 않은 다그침이 더 이어질 것 같았으나 그러진 않았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바는 이제 명확히 알게 되었다.
솔직히 믿고 따라볼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과연 투수로 성공할 수 있을까?’
‘아버지 이름에 먹칠하는 건 아닐까?’
[바보 같은 소리!]
‘뭐야? 너 정말 사악하다.’
[저도 서운해요. 어떻게 그리도 무심할 수가 있죠?]
‘반사다. 반사!’
[결국 제가 먼저 입을 뗐잖아요!]
‘피칭 얘기가 나오니까 그런 거잖아. 이 엉큼한 암컷아!’
[헉! 너무하세요. 하지만 제가 한 번 더 참아드리죠. 그 대신 한 마디만 할게요]
‘그만!’
[두려워 말고 도전하세요. 제가 온 힘을 다해 응원할 게요]
정작 도움이 필요할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지 시스템이 불쑥 작동했다. 피칭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 순간에 출현했다.
사악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건 상대를 인격체로 인정했을 경우에 한한다. 어차피 시스템은 인간이 아니며 전문화된 야구도우미 역할을 수행한다고 봤을 때, 고마우면 고마운 일이지 원망할 대상이 아니다.
그걸 명확히 인지하고 앞으로 나아갈 때 든든한 지원군의 역할을 부여하고 도움을 받는 것이 바람직했다.
“너. 뭐라고 중얼대는 거야?”
“아닙니다.”
“아니긴. 내 말이 그렇게 충격이었냐? 자아의 충돌이 빚어질 만큼!”
“아니라니까요. 근데 형, 피칭에 대한 지식은 있는 겁니까?”
“유성아. 난 네 피지컬 트레이너야. 바랄 걸 바래. 다만 내가 워낙 유능하다보니 약간의 도움을 줄 순 있을 거야.”
전문 지식이 없음을 고백하면서도 성훈의 얼굴은 박꽃처럼 환하게 피어났다. 확정적이진 않지만 유성의 입에서 처음으로 긍정적인 표현이 튀어 나왔기 때문이었다.
“피칭은 아직 먼 나라 얘기야. 일단 피칭을 할 수 있는 몸부터 만들어야지.”
“투수의 몸이 따로 있습니까?”
“당연하지. 지금 네 몸은 타자로서 부족함이 없지만 투수로서는 아직 햇병아리 수준이지. 이리저리 치일 수 있는! 특히 어깨관리는 너도 상당히 민감하잖아. 내가 그거 하나는 확실하게 해주마! 흐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어깨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투수들이 겪는 부상은 보다 다양하고 복합적이니까.
그러나 약손임을 자부하는 성훈이 직접 케어 해준다면 고통을 땀과 노력으로 전환할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하는 짓은 매번 판타지에, 미신적 요소가 다분하지만 실제 그는 과학적 분석에도 능숙해 믿음을 저버리는 경우가 없다.
‘그럼 그를 믿고 한 번 저질러 볼까?’
[주인님. 사랑해요!]
‘헉!’
“야! 너 정신과부터 들러봐야 것다!”
“형님!”
그렇게도 오래 막혀있던 둑이 이리도 쉽게 허물어질 줄은 몰랐다. 어쩌면 바라던 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계기를 만들어준 사람이 성훈이라는 것은 핑계일 뿐.
그런데 생각의 변화를 가지자 시스템부터 격렬하게 반응했다. 무슨 놈의 시스템이, 아무리 여성 모드로 작동해도 그렇지 사랑한다니, 남사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티후아나 훈련캠프로 갈 건가?”
“아니요. 기왕 전지훈련을 할 거면 아예 마이매이로 가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팀에 보고하기도 편할 거고요.”
“그럼 LA는 왜?”
“만날 사람들이 있어서요.”
첫 번째 미팅은 역시 에이전트이자 후원자인 브렌트였다.
그는 겨울이 오기도 전에 건강한 모습으로 나타난 유성의 등장에 눈을 비볐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허름한 야구점퍼를 입고 연습구장 청소를 하고 있었다. 아저씨라고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돌렸는데, 자신을 향해 힘차게 뛰어오는 유성을 보며 착시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
“접니다. 아저씨 어제 과음하셨습니까?”
“정말 초이 너 맞아?”
“네. 이제 완벽하게 부상에서 회복했습니다.”
“이런, 이런!”
뒤늦게 도착한 성훈도 브렌트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괴상한 반응만 봐도 그가 얼마나 유성을 아끼는지 짐작하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셋은 브렌트의 사무실 소파에 둘러앉았다.
유성을 보자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확 껴안았던 여직원 엔젤은 사무실 문 앞을 지키는 2명의 가드를 매섭게 노려봤다.
그녀의 눈에는 과한 경호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미오의 추격에 성공한 이 비서가 젊은 후임 한 명을 달고 유성의 경호를 다시 책임지게 된 것이었다.
“알렉스가 대대적인 개편에 돌입할 것 같아.”
“무슨 연례행사입니까? 지구우승 했으면 됐지, 뭔 욕심들이 그리도 많은 겁니까?”
“팀 분위기를 알면서 왜 그래. 자네 위치는 변동이 없을 걸세. 한 시즌에 총상을 2번이나 입은 선수를 누가 넘본다고?”
“앤드류 프리드먼 사장이요.”
“어? 설마 자네한테 연락이 간 건가?”
“7월에 한 번 만났을 뿐입니다. 올스타 게임 이후에.”
“그렇다면 나한테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말인데...”
브렌트와도 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퀘이크스가 다저스 산하 팀이다 보니 피할 수 없겠지만 타 팀의 루키에 대한 언급은 흔치 않은데, 관심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 같았다.
“브렌트. 필요한 장비 좀 보내주십시오.”
“티후아나 캠프에 다 있잖아.”
“이번 훈련은 조용히 진행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조용히?”
왜 그러냐고 묻는 눈빛이 유난히 빛났다.
어차피 티후아나 훈련캠프도 보안이 유지되는 곳이다. 각종 훈련보조 장비들이 마련되어 있고 시설은 최고급이다.
그런데 요구한 장비리스트를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타격에 필요한 장비만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짓궂게 물었다.
“멜빈이 거기까지 가진 않을 테고 소로카라도 부르려고?”
“글쎄요.”
얼버무렸으나 브렌트는 더 이상 채근하지 않았다.
그는 유성의 피칭 능력에 대한 미련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미 타자로 입지전적인 기록을 쌓고 있으며 이대로 성장해준다면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성의 새로운 시도를 눈감았다.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여러 입을 통해 유성이 피칭에 더 큰 잠재력을 지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말릴 만한데, 기꺼이 보내주겠다고 답했다.
브렌트의 얼굴을 본 유성은 멜빈과 약속을 잡았다.
“6년 1억 2천만 달러? 어차피 4년은 묶인 몸이잖아. 2년을 더 투자해서 그런 거금을 손에 쥔다면 많이 남는 장사네.”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멜빈은 올 시즌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습니다. 17승 7패에 ERA 2.15, 다저스가 아닌 타 팀이었다면 팀의 리더로 인정받았을 겁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그 계약이 끝나도 서른 살이야. 초대박 장기계약의 기회가 한 번 더 있는 거라고. 그러고 보면 넌 정말 아까워.”
“핫하!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질문에 성훈은 화통하게 웃었다.
그 역시 유성의 잠재력을 그 누구보다 크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올 시즌에 부상이 없었다면, 적어도 2번째 부상만 없었어도 유성도 비슷한 전철을 밟았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는 애틀랜타가 다저스처럼 화통한 계약을 안겨줬을 가능성은 낮다. 아쿠냐라는 신성에게 이미 초대형 계약을 안겨줬고 그를 중심으로 타선을 재편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촉망 받는 젊은 투수들의 계약이 우선인 팀 상황 때문이다.
때문에 다저스 같은 빅 클럽으로 트레이드 되는 것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해서는 더 바람직하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지금은 입에 담을 얘기가 아니다.
“와우! 정말 멀쩡하네?”
“그렇다고 했잖아. 여긴 내 형님이야. 인사해.”
“친형?”
“내 전담 트레이너 겸 전문 인스트럭터이고 뭐든 다 해주는 형 같은 분이라는 거지.”
“아! 반갑습니다. 멜빈 히매네스라고 합니다.”
“아이고. 다저스 마운드의 미래를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임성훈입니다.”
멜빈은 무척 부러워했다.
그 역시 초대박을 터트린 상황이기 때문에 비시즌에 원하는 인스트럭터를 고용해 스케줄을 소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 책임지고 그런 일을 맡아줘야 할뿐더러 마음에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역할을 해줄 사람이 에이전트인데, 선뜻 실행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런데 성훈은 초면인데도 듬직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도 끼워줘.”
“노우!”
“왜?”
“나 마이애미로 갈 거거든.”
“왜? 티후아나도 좋잖아. 경험도 있고.”
“내가 새로운 도전을 해볼 거거든.”
“피칭?”
바로 그 단어가 튀어 나와 놀랐다.
유성은 물론 성훈까지도.
멜빈이 유성의 피칭 능력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유성이 대답하기도 전에 성훈의 입이 열렸다.
“멜빈. 당신도 포트 마이어스로 같이 갑시다.”
“포트 마이어스요?”
“유성을 좀 도와줘요. 아무래도...”
“형.”
유성이 만류했다.
멜빈이 오프시즌에 고국에 다녀오긴 하지만 열악한 환경 때문에 그곳에 오래 머물진 않는다. 이미 가족들을 모두 미국으로 데려왔고 추위가 몰려오면 가까운 멕시코 훈련캠프를 이용하면 된다.
때문에 마이애미까지 오라는 것은 무리한 부탁이었다.
그래서 말리려고 했는데, 멜빈의 대답은 의외였다.
“좋습니다! 가죠. 기꺼이!”
감사합니다. 선작과 좋아요는 제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67화 이후 약간의 원고가 더 있으나 교정이 되지 않았고 유료 계약이 어려워 야신의 전설은 여기에서 접어야할 것 같습니다.
홀인원으로 데뷔 이후 9년여를 부지런히 달려왔으나 한계를 느낍니다. 대략 작년 이맘 때부터 계약 없는 글을 써왔습니다. 미련이 남아 도저히 놓질 못하겠더라고요.
하지만 결실은 나질 않았고 이젠 그만 놔야할 것 같습니다. 50대 후반에 다른 일을 찾는 게 여의치 않을 것 같으나 언제까지 글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는지라...
다만 글 쓰기는 취미로나마 쉬지는 않을 생각인데,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간 애독해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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