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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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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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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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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09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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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하는 날 (8)

DUMMY

152화


어디를 봐도 로저 드레이시가 있다.

성안의 그 어떤 곳에 서서 성벽 밖을 내다보아도, 어김없이 로저가 보인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열한 명의 로저가 보였는데, 마차가 도착한 이후에는 무려 열여섯 명의 로저가 성 주변을 배회 중이다.


물론 거대한 콘체스터 성을 그들만으로 포위 중이었다면, 윌러벌 가문 사람들을 비롯한, 콘체스터 성의 수비대가 성안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앞뒤 성문을 다 열어 놓고 탈출이라도 시도해 봤을 것이다.


천이백 마리의 소머리 좀비들이 성 주변 곳곳에서 야유회를 즐기지만 않았어도, 용맹한 친왕파 용사들이 뭐라도 보여 주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의 팔다리를 뜯어먹는 것을 즐기는 끔찍한 괴물들 때문에, 용사들은 용맹함을 감추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뿐이다.


오늘로부터 이십 일 전 하지운은 페어먼트 성 앞에서 패악질 중이던, 삼천여 마리의, 수컷 소머리 창병들 중 천여 마리를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냈다.

자비로운 미소를 가득 머금고 손짓하는 하지운의 반대쪽 손에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다리 달린 철퇴가 쥐어져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천 마리나 되는 소머리 괴물들을 때려죽이는 미친놈의 신위에, 족장이고 졸개고 할 것 없이, 죽지 않은 모든 괴물들이 똥오줌을 뿌리며 달아나 버렸다.

소머리 괴물들이 모두 떠나 버린 벌판 한가운데에는, 머리통만 남기고 전신이 파묻혀 버린 족장 한 마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흙먼지를 잔뜩 먹은 소머리 족장은, 미친 악귀의 손아귀에 자신과 똥오줌만 남기고, 멀어져 가는 동족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저주를 퍼부었다.

그 와중에도 옆에 서 있는 웃음이 많은 악귀를 쳐다보며 살을 날릴 용기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날 좀비로 만들었던 이천 마리 중, 천 마리는 재로 만들어 다시 대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천 마리만 데려와서 창을 쥐어 주고 콘체스터 성 주변에 쫙 깔아 버렸던 것이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 식은땀에 젖어 가던 친왕파 용사들의 시야 속에서 느닷없이 모든 하지운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로, 로저 드레이시가 사라졌다!”

“이쪽에 있던 로저 놈도 안 보여!”

“광장에 있던 놈도 마찬가지다!”


곳곳에서 보고를 빙자한 비명이 뿜어져 나왔다.

드디어 길고 긴 정신 고문이 끝나고, 육체적 고문의 시간이 도래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이다.


마차가 도착하는 순간부터 엄마를 찾으며 중얼중얼하던 한 젊은 용사가 단검을 뽑아 들더니 힘차게 자신의 모가지에 쑤셔 박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새끼야!!”


공포를 못 이기고 자진해 버린 동료를 바라보며, 윌러벌 가문의 젊은 용사가 자지러질 듯한 절규를 뱉어 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주둥이에 주먹이 꽂혔다.


“씨발놈이 존나 시끄럽네.”

“야, 이 새끼 아직 안 뒈졌어. 본체더러 얼른 와서 빨아먹으라고 해.”


성벽 위에 있던 수십의 전사들이 난데없이 기절해 버렸다.

그러고는 그 상태 그대로 외성 안마당에 대충 버려졌다.

잠시 후 외성의 도개교가 내려가고, 격자문도 제멋대로 열려 버렸다.


제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외성에 배치된 전사들은 어느새 기절한 채로 흙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성주와 최측근들은 이미 내성으로 피신해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열린 성문으로 소머리 좀비 천이백 마리가 오와 열을 맞추어 당당하게 입성했다.

어차피 좀비들이라 피를 흘리지도 않겠지만, 어쨌든 소머리 전사들은 진정한 무혈입성의 좋은 모범을 보이며 외성 안마당에 집결하였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기절해 있던 용사들이 머리를 흔들며 몸을 일으키다가,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소머리 좀비들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이내 모골이 송연해지는 괴성들이 터져 나왔다.

아직 좀비들이 입도 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용사들의 입에서는 이미 한쪽 팔이 뜯겨 나간 듯한 비명이 내질러지고 있었다.

보름 동안 성벽 위에서 시가지의 광장을 내려다보며 줄곧 봐 온 것들이 있다 보니, 용사들의 두려움이 임계치를 넘어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아성의 문을 걸어 잠근 로더릭 윌러벌과 측근들이 절망스러운 상황에 사시나무 떨듯 온 육신을 덜덜 떨어 댔다.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로더릭은 홀로 자신의 침실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를 아무도 붙잡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장남조차도, 아비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만 것이다.


그가 지금 어디로 그리고 뭐 하러 가는지 모두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말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건, 주변인들의 생각에도, 그가 하려는 행동이 최선의 선택으로 보였다는 얘기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에 있던 로더릭의 참모들도 하나둘, 거대한 아성 안 곳곳에 있는, 자신들의 침실로 축 처진 몸을 움직였다.

하나 남은 선택을 하러 말이다.


침대에 홀로 남겨 두었던 첩의 품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려 했던 로더릭은 침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 자리에서 졸도해 버리고 말았다.

침실 중앙에 있는 고풍스러운 탁자 위에 두 발을 올린 채 의자에 파묻혀 있던 하지운이 손을 흔들며 반가워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도 탁자 옆에서는 로더릭의 첩이 황금 술잔에 와인을 따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려서 술잔이 잘 보이지도 않는 마당에 두 손마저 미친 듯이 떨려, 술 한 잔 따르는 일이 마치 엑스칼리버라도 뽑는 듯해 보였다.


“야, 관둬라. 걸레 같은 년이 제 본업도 제대로 못해 가지고, 바닥에 질질 다 흘리고 자빠졌네. 넌 도대체 잘하는 게 뭐냐? 그런데... 네깟 년이 주제에 감히 내 집에서 안주인 노릇을 하다 보니 뵈는 게 없어졌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거야? 왜 그러고 있는 거냐?”

“예, 예? 제, 제가... 뭐, 뭐를 말씀하시는...”

“이 천한 년아, 네년의 모가지에 뭐가 걸려 있는지 그새 잊었어? 네년이 걸치고 있는 것도 어디서 많이 보던 건데. 어디서 주워 입었어?”

“이, 이건... 다, 당장!”

“천천히 벗어. 그러다 찢어지면, 네 낯짝을 잡아 뜯어서 푹 삶을 거야. 죽기 전에 한 끼 하고 죽어야지. 안 그래?”

“으허허억... 죄, 죄송...합...”

“지금 토하면 진짜 재미없을 거야. 겉옷이랑 금붙이들 다 정리해 놓고, 그다음에 토하든 싸든 해. 어머니 유품에 오물 묻히면, 넌 정말 험하게 죽을 수 있어. 난 지금까지 단 한 명도 험하게 죽인 적은 없었어.”


이건 분명 거짓말이 아니다.

하지운은 아직까지 단 하나의 개체도, 자신의 기준에서, 험하게 죽인 생명체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더럽고 추잡스럽게 죽인 이는 꽤 되지만, 험하게 죽인 이는 아직 없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잠시 후 로더릭 윌러벌과 그의 애첩 유피미아 클릭스튼 양은, 소머리 좀비들에게 머리끄덩이가 잡힌 채로, 계단을 끌려 내려가야 했다.

어린 나이에 제 아비가 모시던 상전의 눈에 들어, 신분을 뛰어넘는 부귀영화를 누릴 뻔한 유피미아 양이 절망의 눈물을 쏟아 냈다.


브리갠트판 정난정을 꿈꾸던 유피미아 양은 로더릭 윌러벌 못지않은 험한 꼴이 예정된 인물이다.

로더릭이 죽을 둥 살 둥 모르고 함부로 나댈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 치어리더가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다.


드레이시 말살 계획을 수립할 당시 험프리의 자문단 모두가 그 계획에 찬성했던 것이 아니었다.

당연한 일이다.

실패했을 때 불어닥칠 후폭풍을 생각하면, 누구든지 오장육부가 덜덜 떨리는 게 인지상정이었다.

총신들 중 그 누구도 이런 살벌한 계획에 앞장서고 싶어 하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서록의 영주인 로더릭 윌러벌이 다른 총신들에 비해 여러모로 격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이 거대한 콘체스터 성의 총관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가 왕궁에서 내일이 없는 것처럼 깝칠 수 있도록 야심만만한 유피미아 양은, 매일 밤 아비보다 나이 많은 늙다리의 근자감을 키워 주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내야 했었다.

그리고 결국 그 결실을 보았던 것이다.


반년 동안 그 어떤 백작 부인 부럽지 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즐겼다.

비록 벼락출세한 첩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귀부인 놀이는 끝이 나 버렸다.

고작 반년 동안의 부귀영화를 위해, 그녀는 족히 삼사십 년의 남은 삶을 헌신짝처럼 걷어차 버린 꼴이 된 것이다.


어제 날짜로 스물한 살이 된 유피미아 양은, 앞으로 영겁의 세월 동안, 하지운의 수중에서 비참함의 대명사로 살아가게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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