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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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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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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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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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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도버의 봄 (6)

DUMMY

167화


삼월 육 일 오후 네 시경 마침내 풍성충 하지운과 그의 일행이 험프리네 집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험프리가 로저네 집 앞에 들이닥쳤던 게 전년도 유월 이 일 밤이었으니, 구 개월이 지난 시점에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정보 길드에서 로저의 부활에 대한 괴소문을 퍼뜨린 게 작년 팔월 초였다.

그 말인즉슨 험프리의 좋은 날은 고작 두 달이 다였고, 남은 칠 개월은 생지옥을 연상시키는 날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운은 별 관심이 없어서 몰랐던 거지만, 사실 험프리는 칠 개월 사이에 무려 다섯 번이나 암살 위험에 노출되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물론 정보 길드에선 첫 암살 시도를 포착하자마자 하지운에게 급하게 사람을 보냈었다.

그리고 신속한 일 처리에 대한 보답으로 ‘하찮은 돼지 새끼가 뒈진 것도 아닌데, 사소한 일로 귀찮게 좀 하지 마라.’라는 개떡 같은 소리를 들어야만 했었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왕좌를 지켜 낸 험프리 왕을 향해, 전직 외척 호소인, 하지운이 야속한 인사 비슷한 걸 날렸다.


“야, 이 돼지 새끼야. 그새 살이 좀 빠졌다. 그동안 재미가 아주 좋았나 보네. 내가 너 겁 좀 주려고 신경을 많이 썼는데, 역시 왕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가 봐. 대왕답게 개의치 않고 새 왕비 년이랑 밤낮으로 부지런히 붙어먹었나 보네. 볼살 홀쭉한 거 봐라. 큰딸년보다 어린년이랑 뒹구니까 좋아?”


별다른 노력도 없이 체중이 삼십 킬로 가까이 줄어 생존을 걱정해야만 하는 험프리 왕이 힘겹게 흉벽을 틀어쥐고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위엄 있는 호통을 내지르며 본데없는 어린놈의 말본새를 준엄하게 꾸짖어 줘야 할 터인데, 어째서인지 대왕의 입이 좀처럼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야, 뭐 해? 또 웃어, 이 병신아! 내가 전에 보복하겠다고 할 때는 미친놈처럼 잘만 웃더니. 어린년한테 시달리느라 기운이 없어? 내가 대신 웃어 줘?”


분노한 군왕이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부들부들 떨어 댔지만, 좌중의 그 누구도 주군을 대신해 나서는 자가 없다.

반란의 수괴에게 통렬하게 호통치는 충신 한 명이 없는 비참한 현실에, 더욱 기운이 빠져 가는 험프리였다.


하지만 성벽 위의 그 어떤 용자도, 왕 놈의 투정에 공감씩이나 해 줄 만큼, 마음에 여유가 넘치지를 못하는 상황이다.

그들로서는, 말인지 마계의 괴물인지 구분도 안 되는 초대형 생물체를 탄 사 미터 이십의 대괴수를 보고, 맨정신을 붙잡고라도 있는 게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그 지랄을 하고도, 이런 날이 올 줄을 몰랐어? 기대해. 오늘 너랑 네 처자식들이 밤새도록 돼지머리들과 오순도순 붙어먹게 될 거야. 네놈 집구석이 어떻게 끝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게 만들어 줄게.”

“닥쳐라, 이 역적 놈아!! 뚫린 입이라고 어디 함부윽.”


충신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웬 노인 하나가 끓어오르는 울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반군 두목 하지운에게 서릿발 같은 꾸짖음을 내질러 버린 것이다.

그러고서는 어느새 하지운의 삼 미터 앞 공중에 둥둥 뜬 채로 매섭게 눈을 흘겼다.


그런 용맹하기 짝이 없는 노인을 턱으로 가리키며 하지운이 입을 열었다.


“이 영감탱이가 누군지 아는 사람?”


순간 정보 길드의 영감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단체로 뿜어 버렸다.

그러다 하지운의 시선을 느끼고는, 급하게 진정을 한, 롱그레이 옹이 성심껏 답변해 주었다.


“용병 길드의 전전 길드장이었던 펄크 노빌이다. 험프리 왕에게 용병들을 제공하고 이권을 여러 개 따냈지.”

“아... 저번에 우리 집 앞에 와서 죽었던 게 이 영감 아들하고 졸개들이었어? 걔들은 그냥 받아들이던데, 이 영감은 납득이 안 가는가 보네. 제 놈들이 한 짓은 생각 안 하는구나. 나와 비슷한 부류의 종자네. 매사에 속 편하게 살아왔겠어.”

“알긴 아는구나, 네가 어떤 놈인지. 그런데 아는 놈이 왜?”

“그거냐 내가 본성이 글러 먹은 놈이니까 그렇지. 그런데 굳이 지금...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야겠어?”

“아... 자중하도록 하.”

“아, 됐어!”


그새 삐져 버린 덩치만 우람한 소심남 하지운이 용병 길드의 노인네에게 화풀이를 해 버렸다.


“이 늙은것은 죽여도 되는 놈인데, 그렇다고 며칠씩 너저분하게 갖고 놀 필요까지는 없는, 이벤트용으로 써 먹기 딱 적당한 놈이네. 짧고 강렬하고 고통스럽게 죽게 될 테니 안심해라. 네 나이에 더럽게 죽으면 얼마나 원통하겠느냐? 그럼 잘 가라.”

“이, 이노므윽! 우으으으윽!”


늙은 용병 펄크 노빌이 서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놀이공원의 다람쥐 통이라도 된 듯 머리와 발의 위치가 멈추지 않고 뒤바뀌는 모습이,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수천 명의 심장도 미친 듯이 펄떡이게 만들어 주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자 더 이상 늙은 용병의 이목구비를 식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저 하지운의 근처에서 무언가가, 원을 그리며, 고속으로 회전 중이라는 것만 확인이 가능한 정도였다.


웬도버시의 외성문 주변은 언젠가부터, 인구 밀도에 비해, 지나치게 정숙한 장소로 탈바꿈해 버린 상태다.

천오백에 달하는 하지운 측 병력과, 이중으로 된 성벽 위에 쫙 깔린, 사천에 달하는 험프리의 병력이 대치 중임에도 무언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요란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간간이 이빨 부딪히는 소리만 내고 있던, 양측의 정숙한 용사들이 난데없이 볼썽사나운 비명을 내질러 버리고 말았다.

회전 중이던 물체의 사이즈가 급속하게 쪼그라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농구공만 한 사이즈로 줄어든 것으로도 부족한 듯 회전을 멈추지 않던 물체가 급기야 야구공만 한 크기가 되고 나서야 서서히 속도를 줄여 갔다.

성인 주먹만 한 크기의 검붉은 덩어리가 허공에서 팽이처럼 회전하는 모습을 오천이 넘는 인원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관람 중이다.


염동력의 살벌한 위력에 대경실색한, 두 부활자, 루시아 먼틸리 호소녀와 컬버트 브리즌 호소인도 그저 식은땀만 줄줄 흘릴 뿐 꽉 다문 입술을 뗄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에 비하면 다른 초능력들은 하찮은 잡기 정도로 치부해 왔던 두 사람에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공포스러운 광경이었던 것이다.


성벽 위의 용사들이 하나둘 방광이 열린 채로 바닥에 주저앉는 와중에, 염동력의 달인 하 선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기특한 돼지 새끼야, 내 소박한 재주는 잘 봤느냐? 안타깝게도 너와 네 피붙이들은 이렇게 편하게 죽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한 짓이 있지 않느냐. 내가 너한테 궁금한 것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리고 방금 널 보면서 그 마지막 궁금증을 해결했지. 넌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너답다, 이 돼지 새끼야.”


그다지 크게 외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웬도버시 곳곳에서 웅크리고 있던, 오만 명이 넘는 시민들의 귓구멍 하나하나에도 하지운의 목소리가 명확하게 때려 박혔다.


“너에게 시집보낸 내 누이동생을 탑에 가둬 놓고 굶겨 죽였더구나. 그것도 임신한 아이를 말이다. 그 아이를 그대로 살려 뒀으면 인질이 둘이나 될 뻔했는데, 참으로 친절하기도 하다. 아무리 나라도 누이와 조카가 인질로 잡혀 있었다면, 그렇게 맘 편히 설치고 다닐 수 있었겠느냐? 네 마음 씀씀이에 감격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허어어윽...”


성벽 위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뜨끈뜨끈한 물웅덩이 위에 쭈그려 앉아 있던 용맹한 전사들이 흉벽을 긁어 대며 몸서리를 쳐 대는 것이었다.

마왕에게 자비를 기대하는 것이 처음부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걸 성안의 모두가 완벽하게 인지해 버린 것이다.


험프리조차 카리스마 있는 폭군의 모습을 전혀 보여 주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역적 놈 앞에서 당당한 군주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밤새도록 한숨도 자지 않고, 가혹한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아비뻘 되는 네놈에게 홀려서 집안의 장로들을 못살게 굴던 철없었던 누이를 원망하지 않는다. 네 같잖은 야망을 위해, 날 끌어들이겠다고, 딸뻘밖에 안 되는 아이에게 수작을 부린 네가 죽일 놈이지 않겠느냐? 그럼에도 한번은 누이의 행복을 위해 네 지랄에 동참해 주었다. 우리 가문이 네놈 따위가 없으면 벌어먹고 사는 게 힘들 것 같아 보이더냐? 어떤 놈이 왕이 되든 우리가 그런 하찮은 일에 신경이나 써 왔을 것 같더냐는 말이다. 네놈 때문에 우리가 손에 피라는 피는 다 묻히고, 쓸데없는 원한까지 잔뜩 짊어졌는데... 그런데... 네놈이 내 누이를 죽였다... 그것도 쫄쫄 굶겨서... 임신까지 해서... 그 아이가 배가 참 많이 고팠을 터인데... 돼지 새끼야, 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할지 상상은 해 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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