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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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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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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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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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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5 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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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도버의 봄 (8)

DUMMY

169화


브리갠트의 수도인 웬도버시는 본래, 칠만여 명에 달하는 압도적인 인구를 자랑하는, 브리갠트 왕국 최대의 도시였다.

물론 지금도 브리갠트 최대의 도시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만, 문제는 고작 서너 달 만에 인구가 삼분의 일 가까이 줄었다는 것이다.


시민들도 귓구멍이 딱히 막혀 있는 건 아닌지라, 상황이 대충 어떻게 흘러가는지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대부분이 자유민 신분인 시민들이 보기에도, 돌아가는 꼬라지를 봐서는, 조만간 왕성이 개박살 나는 게 정배인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슬슬 예비 싸움터에서 멀어지려는 자들이 하나둘 등장했던 것이다.

먼저 잔머리가 잘 돌아가는 상인들부터, 일상적인 상행위를 가장해서, 귀중품과 피붙이들을 타지로 빼돌렸다.

곧이어 형편이 좀 되는 자들이 상인들에게 뒷돈을 찔러주고는, 자식들을 상인들의 행렬에 동행시켰다.

아예 사람들을 왕성 밖으로 빼돌려서 원하는 지역까지 운송해 주는 사업이 점차 활성화돼 버린 것이었다.


하지운에게로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던 궁정의 중신들이 미쳐 버린 수준의 인구 감소를 감지했을 무렵에는, 이미 이만 명에 가까운 거주민이 증발해 버린 뒤였다.


물론 브리갠트가 모든 계층에게 통행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하는 시대를 앞서가는 국가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정신 나간 사태가 발생했다는 건 그만큼 왕성 내의 경비병들이나 하급 관리들이 정신을 어느 정도는 놔 버렸다는 얘기밖에 안 되는 것이다.


험프리나 중신들이나 한마음 한뜻이 되어 버렸다.

푼돈을 받고 눈감아 준 경비병들부터 달아난 자들의 피붙이들까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잡아 와서 냉큼 죽여 버리자는 의견에 모두가 동의를 한 것이다.

아무리 자유민들이 원래부터 거주 이전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신분들이라 해도, 천한 것들이 감히 싸움이 코앞인 상황에서, 왕과 중신들을 버리고 달아났다는 게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그 상상은 상상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관련자들을 다 죽이면, 왕성 인구가 절반 이하로 줄어들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분석이 나왔기 때문이다.

결국 상인 몇 명과 경비병 몇 명만 본보기로 죽이고는 흐지부지 끝내 버렸다.


웬더강의 북쪽 강변에 자리 잡은 웬도버시는 강이 흐르는 남쪽을 제외한 남은 삼면이 모두 성벽으로 둘러싸인 완벽한 성곽 도시이다.

시가지를 전부 성벽으로 빙 둘러쳐서 든든하기는 한데, 성벽의 가로 길이가 삼 킬로가 넘고 세로 길이도 이 킬로에 달한다.

성벽의 총 길이가 무려 칠 킬로가 넘는다는 얘기다.


이 어마어마한 길이를 엘리트 전사들로 다 채운다는 것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웃기지도 않는 망상이다.

엘리트 전사들은 긴요한 지점에만 집중 배치하고, 남은 부분은 개돼지 전사들이 지휘하는 순수한 인간들이 몸빵을 해 줘야만 한다.

즉 엘리트 전사들이 땜빵을 하러 다니기 전에, 시간을 끌어 줄, 고기 방패들이 대량으로 필요하다는 것이다.


왕성 안의 고령화가 극심해진 상황 속에서 구국의 영웅호걸 삼인조가 홀연히 등장했다.

그들은 먼퍼드의 백작 허비 먼퍼드와 템스퍼드주 켈베든의 영주 헨리 고더빌 그리고 록퍼드주 하트모어의 영주 오브리 런스니였다.

먼퍼드주의 지체 높은 대제후 허비 먼퍼드는 아름다운 막내딸을 왕에게 바치고 국구의 지위에 오른 왕성 내 최고의 권세가이며, 다른 두 영주도 왕성 동쪽에 인접해 있는 두 주 내에서는 손에 꼽히는 대영주들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드레이시 가문의 멸문 계획에 발을 담가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이미 버린 몸, 아주 가열하게 남은 생을 즐기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껏 권력을 누리며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올라 보겠다는 그들의 열정을 감당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왕조차 그들의 열정에 감동하여 장인인 허비 먼퍼드에게는 호국경(Lord Protector)의 칭호를 그리고 다른 두 중년의 신사들에게는 부마의 자리와 백작 작위를 선사하였다.


“아, 그러니까 저 왼쪽의 늙다리가 험프리의 새로운 장인어른이라고? 뭐, 호국경? 그거 섭정 같은 거 아니야? 험프리 요즘 많이 바빠? 저 새끼 딸년이랑 밤낮으로 뒹구느라고, 왕 노릇할 시간이 없는 건가?”

“그건 아니고, 그냥 호칭만 준 게다. 이미 가진 게 많은 놈이라 실질적인 건 더 줄 수가 없었던 거지.”

“아... 험프리가 아주 미친 건 아니었구나. 그리고 저 가운데 새로 무관장이 되었다는 놈은 이름이 뭐라고?”

“어차피 외우지도 못할 거면서...”

“뭐? 이 다리 긴 영감탱이가!”

“헨리 고더빌이다. 템스퍼드주 출신인데, 브런들 백작 작위와 왕실 무관장(Lord Constable) 관직을 받았고, 지지난달에 이저벨 공주와 혼인을 올렸다.”

“템스퍼드주? 바로 이 옆에 있는 거? 잠깐, 거기는...”

“맞다. 네가 마차에 걸어 놓은 서록의 영주 로더릭 윌러벌 경의 이웃이다.”

“아아! 로더릭 저 새끼가 벼락출세하는 걸 보고, 탄력을 받았구나! 역시 질투의 힘이란!”

“......”

“그런데... 이저벨? 험프리의 큰딸? 걔... 내가 낯짝을 뜯어 버렸던 매니거드의 마누라 아니었어? 내가 또 대충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다, 네 기억이 맞다. 존 매니거드가 네 손에 죽은 후, 놈이 누리던 모든 것이 저 자에게 돌아갔다.”

“매니거드의 아들놈은?”

“전처소생이 하나 있었는데... 네가 죽였잖느냐, 앨커스터주에서. 그때 노상에서 야습했던.”

“아, 그때! 됐어. 사소한 일은 대충 넘어가. 이저벨 그 계집애는 무관장 전용 마누라인 건가. 험프리 놈은 참... 딸들을 요긴하게 잘 써먹네.”

“이놈은... 말을 해도...”

“저 오른쪽 놈은?”

“워스터 백작위와 원수(Lord Marshal)의 지위를 받은 록퍼드주 출신의 오브리 런스니다. 셋째인 메리 공주와 혼인을 했지.”

“크흑... 혹시 이전 워스터 백작이었던 해멀린 브리워의 아들놈도 내가 죽였냐?”

“아니, 대신 두 딸과 예비 사위를 같이 죽이지 않았느냐. 네 집인 페어먼트 성에서 말이다. 원래 아들은 없고 딸만 둘이었다.”

“아, 그래. 그럼 쟤들은 모두 내 덕에 빈자리를 차지한 행운아들이네. 그러면 내 손에 당장 죽어도 날 원망할 처지가 아니겠구나.”

“참으로 편리한 논리의 흐름이구나.”

“뭐 어쨌든. 저 세 놈이 왕성에 인접한 네 개 주를 돌면서, 만만한 집구석 애새끼들을 모조리 다 끌고 왔다는 거잖아. 나를 성가시게 만들어 보겠다고.”

“그래, 그 공으로 얻은 직함들이다. 저 성벽 위에 있는 자들 중 네 목록에 없는 집안의 사람들이나, 아까 파무어 요새에 있던 아이들이나 다 저 세 명이 데려온 이들이지.”

“아주 날 귀찮게 만들려고 작정한 새끼들이네. 그러면 또 적당한 게 있지.”


세 눈물 젖은 야심가들을 둘러싸고 열두 개의 시커먼 마법진이 등장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늠름한 소머리 좀비 열두 마리를 토해 내고 사라져 가는 마법진들 위로 누런 물결이 넘실거렸다.


상사와는 달리 딱히 결벽증이 없는 부하 직원들은, 세 신사들의 짭짤한 팔다리를 하나씩 붙들고, 이른 저녁 식사를 함께 하였다.

그동안 깐깐한 상사에게, 꼭꼭 씹으면서 천천히 식사하라는, 잔소리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징글맞게 많이 들었던 좀비들이다.

어느새 소머리들은 그들 나름의 고상하면서도 품격 있는 식사 예절을 과시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세 명의 신사들이 겪는 고통의 강도도, 이전 죄수들에 비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폭증해 버리고 말았다.


“이래서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거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몰라도 돼.”


세 신사들의 끔찍한 육보시를 지켜보는 사천여 명의 용사들이 이성과 혼돈의 경계 사이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방황을 하였다.

그런 그들에게 하늘도 무심하시게 또 다른 자연의 기적이 찾아와 버렸다.


현재 하지운이 깽판을 치고 있는 북문을 중심으로 좌우 오백 미터 길이의 성벽이 천천히 하강을 시작한 것이다.

북쪽 성벽의 삼분의 일이 조금 안 되는 일 킬로 길이의 방벽이, 좌우 가장자리 부분이 쩍 갈라진 채로, 땅속으로 꺼지고 있는 중이다.

물론 이중으로 된 안팎의 두 성벽이 동시에 말이다.


다리가 풀린 용사들이 흉벽을 붙들고는 구슬픈 비명을 내지르며 지랄 발광을 하였다.

파무어 요새의 참극을 잊어버리기에는, 한 시간은 너무도 짧았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흙먼지와 굉음이 사라진 자리에 마왕의 부드러운 음성이 내리꽂혔다.


“다시 기회를 주겠다. 방금 전에 달려 나오려던 놈들은 지체 없이 내 앞에 한 줄로 서라. 아, 그리고! 또다시 방해하는 놈이 나오면, 그 자리에서 발가벗긴 후, 웬더강에 생식기만 담가 버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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