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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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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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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2
글자수 :
916,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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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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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도버의 봄 (7)

DUMMY

168화


대꾸 한마디 못하고 눈알만 뒤룩거리고 있는 브리갠트의 군주 험프리 사세를 바라보며, 하지운은 결국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초보존에서의 마지막 이벤트인 만큼, 뭔가 축구의 티키타카처럼, 험한 말이 정신없이 오고 가는 활기찬 공성전을 기대해 왔던 하지운으로서 다소 김빠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문득 ‘친근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초기 버전 로저의 외형으로 방문할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잠시나마 하지운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험프리 놈뿐만 아니라 성벽 위의 전사들 대부분이 하지운의 외모만 보고 지레 겁을 먹어, 상황극의 진행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냉담한 하지운은 시답잖은 잡생각을 깨끗하게 지워 버리고, 미련 없이 계획을 수정하였다.

기왕 공포 분위기가 조성된 마당에, 아예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개무섭게 만들어 주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장난스러운 소시오패스 하가 놈은, 적당한 재료를 발견하자마자, 염동력의 진정한 위력을 보란 듯이 과시했던 것이다.


“어이, 험프리. 너 오늘따라 너무 과묵한 거 아냐? 너 원래는 더럽게 말 많던 놈이잖아? 고작 몇 달 사이에 취향이 바뀐 거야? 이제는 중년의 중후한 멋을 추구하기로 한 건가? 아니면... 내가 널 너무 지루하게 만들고 있던 건 아니지? 좀 더 강렬한 걸 보여 줄까?”

“아, 아니다... 피, 필요 없다...”


화들짝 놀라 버린 험프리가 전심전력으로 거부 의사를 표했지만, 군왕의 간절한 바람은 불측한 신하에게까지 닿지를 못했다.

하지운의 기괴하고 끔찍한 이적을 목도하고는 극도로 위축돼 있던 탓에, 그의 세치 혀가 제대로 작동을 못한 것이다.

물론 청력이 쓸데없이 발달한 하지운은 험프리의 웅얼거림을 완벽하게 포착하기는 했지만, 뻔뻔하게도 들은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


“대꾸도 않는 걸 보니, 내가 아주 우스운 모양이구나! 그럼 더 이상은 장난치지 않고 진지하게 상대해 주마!”


줄곧 회전 중이던 펄크 노빌의 압축된 육신이 갑자기 잔상만 남기고 사라졌다.

지독히도 불길한 예감이 든 험프리가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며 늙은 용병의 육신을 찾아 헤맸다.

그러던 중에 성벽 위의 용사들 중 누군가가 하지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였다.


“폐하!!”


이어지는 말을 다 듣지도 않고 험프리는, 부하들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뻘건 구체가 험프리의 머리통으로부터 십오 미터 상공에 떡하니 나타나 있는 것이다.


“피하십시.”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약삭빠른 험프리가 몸을 날렸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몸부림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구체가 터져 버린 것이다.

그와 동시에 험프리와 충성스러운 친왕파 귀족들이, 피할 틈도 없이, 검붉은 액체를 다 뒤집어써 버리고 말았다.


‘혹시나 해서 거리를 둔 게 다행이었네. 건더기가 남아 있을 정도로 적당히 압축해서, 면상 앞에서 터뜨렸으면 재밌었겠는데.’


“끄아아악!”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양물이 바짝 쪼그라들 정도로 기가 죽어 있던, 근엄한 군주 험프리는 세차게 쏟아져 내린 걸쭉한 액체에 기함을 하며 자지러져 버렸다.


“크하하하! 병신아, 울지 마! 네 졸개들이 다 보고 있잖아! 이제 겨우 시작이야! 나 오늘 할 줄 아는 거 다 할 거야! 어차피 뒈질 거 왕답게 뒈져야지! 사서에 ‘폐하께서는 똥오줌을 싸 갈긴 채로 울면서 싹싹 비셨다.’라고 기록되고 싶은 거야? 좀 더 힘을 내, 이 병신아!”


하지운의 정성을 다한 격려에도 험프리의 상태는 딱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주위에 있던 지체 높은 총신들도 꼬라지가 거기서 거기였다.

더 이상 지휘관으로서의 역할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여긴 근위대 전사들이 왕과 총신들을 업고 왕궁으로 내달렸다.


“어이구, 잘한다! 잘해! 어디 가, 이 병신아? 도망가면 안 죽어? 내가 금방 따라 갈 거야! 행여나 비밀 통로로 튈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이미 싹 다 막아 뒀어!”


하지운의 유쾌한 악다구니가 끝나기가 무섭게, 수도의 관문 주위가 돌아 버릴 것 같은 침묵 속으로 푹 잠겨 버렸다.


“네놈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다. 네놈들 중, 작년 유월부터 현시점까지, 우리 가문 사람들과 특별히 시비가 붙은 일이 없는 놈은 성문을 열고 나와서 내 앞에 한 줄로 서라. 내가 직접 한 놈씩 확인한 후 잘못한 게 없는 놈은 바로 집으로 보내 주겠다. 물론 본인이 아니더라도 피붙이가 지은 죄가 있거든, 그냥 거기서 계속 버텨라. 어차피 같이 죽일 거니까. 잽싸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짜증 나게 굴면, 그냥 다 죽여 버릴 것이다!”


그 순간 성벽 위 곳곳에서 황홀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지옥의 입구에 이미 다리 한쪽 정도는 들이밀고 있던 용사들이, 무사히 살아 나갈 방도가 생겼다는 희망에, 철딱서니 없는 애새끼들처럼 기쁨을 마음껏 표출해 버린 것이다.


대략 한 시간 전쯤, 왕성에서 서북 방향으로 2.8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세워진, 요새 하나가 언덕과 함께 자취를 감춰 버린 괴이한 일이 있었다.

그 신비로운 대자연의 기적을 사실 웬도버의 모든 거주민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왕성 웬도버는, 상대적으로 저지대인, 웬더강 유역의 평야 지대에 자리 잡고 있으며, 파무어 언덕과 웬도버 사이에는 어떤 장애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하지운이, 정확하게 오십이 분 전에, 저지른 짓거리를 왕성의 모든 사람들이 빠짐없이 낱낱이 다 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괜히 웬도버의 모든 이들이 간이 콩알만 한 울보가 돼 버린 게 아니었던 것이다.


환희에 가득 찬 청년들이 개천에서 솟구치는 드래곤처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고서는 너도나도, 힘차게 고함을 내지르며, 미칠 듯한 기세로 성벽 위를 가로질렀다.


“로저 공! 저희 집안은 그날 콘체스터 근처도 안 갔습니다! 저희는 그저 록퍼드주의 왕령지에서 동원된 별 것도 없는 놈들입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저도 바로 옆의 헌팅엄주의 왕령지에서 온 놈입니다. 저희 집안사람들은 주 밖으로 나가 본 적도 없는 촌놈들입니다! 굽어 살피소서!”


성벽 위에 있던 사천 명에 가까운 용사들 중 무려 천오백에 달하는 용사들이 이탈을 시도하자, 다급해진 근위대 전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자리를 지켜라! 달아나는 놈은 반역으로 간주하고 즉각 사살하겠다! 혈족들도 예외가 아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모조리 다 잡아 와서 몰살을 시켜 버리겠다!”


험프리와 중신들을 피신시키기 위해 자리를 비운 십 인의 대원들을 제외한, 사십오 인의, 근위대 전사들이 사력을 다해 겁먹은 용사들을 윽박질러 댔다.

그걸 보고 있던 친왕파 귀족들과 그들의 자제들도, 정신을 차리고서는, 달아나던 용사들을 향해 흉기를 들이댔다.


잠시 후, 성벽 위의 소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려는 마당에, 난데없이 사십오 인의 근위대 전사들이 흉벽을 부수고 하늘을 부자유스럽게 날아가 버렸다.

열여섯 복제 인간 중 열다섯 개체가 염동력으로 각자 세 놈씩 납치해 버린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따로 정보 길드의 요원들과 잡담을 나누고 있던, 복제 인간 일 호가 성벽 위에 있던 놈들 중 유독 때깔이 좋은 세 놈을 다짜고짜 유괴해 버렸다.


성벽 위의 용사들이 다시 얌전해진 상태로, 미어캣이라도 된 듯, 고개만 쭉 내민 채 유괴된 엘리트 전사들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유괴된 전사들의 피붙이들도 안절부절 못하기만 할 뿐, 감히 나서지를 못하는 중이다.

이미 겁을 먹을 대로 먹어, 그저 몇십 초라도 더 살고 싶다는, 본능에만 충실한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걔들은 어차피 명단에 다 있는 것들이니까, 옷 벗긴 다음 팔다리 잘라서 모아 놔.”

“어.”


잠시 후 성문 앞 공터에서는 지옥의 밑바닥에서나 나올 법한 끔찍한 괴성이 난무하였다.

몸통만 남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근위대원들을 바라보며, 뭔가 있어 보이는, 세 신사가 아련한 표정을 지은 채 바들바들 떨어 댔다.


“아, 가운데 도다리같이. 아, 아니, 물고기같이 생긴 놈이 신임 무관장이라고? 저 새끼가 전임 무관장이 어떻게 죽었는지 못 들었나 보구나. 야, 가운데 너. 너 말이야, 무관장 새끼야. 전에 무관장 하던 존 매니거드 있잖아. 탤머스주에서 내 손에 죽었던 놈 말이야. 걔 죽기 전에 나한테 산 채로 낯가죽이 뜯겼었어.”

“히이이익...”


세 가련한 신사들은 다리가 풀린 채로 버티고 서 있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야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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