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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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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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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06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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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도버의 봄 (4)

DUMMY

165화


로저의 조상인 위드링튼의 로저는 브리갠트의 용사들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천금 같은 교훈을 여러 개 남겨 주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교훈은 방심하면 엘리트 전사조차도 평범한 인간들의 손에 뒈지는 참사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괴물의 피를 처먹고 육신을 강화시킨다 해도 고환과 내장까지 도검불침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제 몸뚱어리 하나만은 진정으로 끔찍하게 위하는 하지운 또한 그 교훈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로저의 선조께서 내려 주신,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하지운이 특수 소재로 맞춤 제작된 낭심 보호대를 착용하고 전장으로 나서려 하였다.

고결하면서도 영광스러운 재질의, 두 손 두 발 다 든, 낭심 보호대가 이국적인 멋을 자랑하고 있었지만 좌중의 그 누구도 직언을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 자리에는, 하지운에게 못하는 소리가 없는, 복제 인간들이 무려 열여섯 개체나 함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그 어떤 도움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제 인간들 모두가 바닥을 구르며 웃느라 혼절 직전의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보 길드 영감탱이들은 복제 인간들의 약점을 찾아냈다는 사실에 고무된 나머지, 하지운의 밥맛 떨어지는 낭심 보호대 따위는 일찌감치 관심을 끊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 하지운이 자유분방하게 공성전에 임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소피아만이 홀로 발을 동동 구르며 입을 달싹거리고 있지만, 그녀 또한 몇 시간 전에 호되게 혼이 났었던 기억이 남아 있어 차마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는 중이다.


대조적으로 파무어 요새 안에서는 오로지 무거운 침묵만이 가득한 상황이다.

무려 삼백 명에 달하는 인원이 결사 항전을 준비 중임에도, 땀방울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나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 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성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하지운의 낭심 보호대를 목격하고도 침묵을 깨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대단한 집중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아머릭 왕가를 마지막까지 수호하기 위해 결연히 떨치고 일어선 삼백의 결사대 용사들은 집중력도 대단하였지만 그 못지않게 의리와 충성심도 빼어났다.

이 정도 되면 마을을 가로질러 산성으로 다가오는 신장 사 미터 이십의 괴수에게 희멀건 속바지를 벗어 휘두르며 항복을 외칠 만도 하건만, 여태 목숨 구걸을 하는 이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결사대원들이 보이는 결기의 근간에는 슬픈 현실이 깔려 있었다.


대략 석 달 전쯤 앨커스터주를 지나가던 하지운과 체험 마차 앞에 한 무리의 신사들이 일족들을 이끌고 들이닥친 적이 있었다.

그들은 하지운을 보자마자 말에서 뛰어내려 속옷 바람으로 흙바닥을 기면서 진심 어린 눈물의 사죄를 올렸었다.


그들의 진심에 감동한 하지운이 그 신사분들을 위해 고통 없는, 오로지 쾌감만 가득한, 마지막을 선사하였다.

준비성이 철저한 하지운은 이런 분들이 등장할 것도 염두에 두고, 사전에 대응책을 다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미리 준비해 둔 아리따운 처녀들을 신사분들에게 들이민 하지운이 수줍게 합방을 제안하였다.

벌건 대낮에 노상에서 말이다.

진심 어린 사죄에 대한 하지운의 보답은 복상사였던 것이다.


죽기 전까지 돼지머리들과 실컷 통정을 해야만 했던 신사분들과 피붙이들의 슬픈 전설은 브리갠트 왕국 전체에 끔찍한 교훈을 전해 주었다.

로저 드레이시의 손에 잡히면 가장 양호한 징벌이, 암수 할 것 없는, 돼지머리 좀비들과의 공개 교미라는 것을 말이다.


괜히 로저의 원수들이 하나같이 성문부터 걸어 잠그고 필사의 항전을 다짐했던 것이 아니었다.

친절한 하지운은 세 치 혀로 나불거려지는 사죄 따위가 얼마나 덧없고 하찮은 것인지를 일찍부터 명확하게 인식시켜 주었던 것이다.

혹여나 오판을 한 원수들이, 저항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말이다.


현재 산성 안의 결사대원들의 표정과 하지운의 낭심 보호대가 짓고 있는 표정이 대동소이한 상태다.

이국적인 낭심 보호대는 낯짝마저 달려 있는 가운데, 그 표정조차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풍부하여 많은 이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었다.

당장 죽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작동하지 않는 성대 대신, 상판대기 근육으로 절절하게 표현 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요새를 올려다보는 하지운의 표정도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건 무엇보다 결사대원들의 면면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들의 용모가 불량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생긴 것만 놓고 보면 대부분이 평범하게 생긴 어린 청년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모두 하지운과 전혀 이해관계가 없는 생판 모르는 청년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이 어디 시장통에서 삥이나 뜯고 다니던 양아치들도 아닌데, 서코트 같은 가문의 문장이 그려진 무엇인가를 걸치지 않은 이가 있을 리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몸뚱어리 위에 있는 표식을 보건대, 이 안에는 드레이시 가문과 원한 관계가 있는 놈이 단 한 놈도 없었던 것이다.


보나 마나, 왕성 인근의 가문 중 한미한 축에 속하는 집안의, 애새끼들을 전부 강제 차출하여 이 성안에 쑤셔 박아 놓은 모양이었다.

결사대원 삼백 명 중 엘리트 전사가 고작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걸 보니 뻔한 일이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시간이나 끌고 자잘한 피해나 입히라고 투입한, 자살 특공대 그 자체였던 것이다.


‘험프리 놈이야 뒈지기 직전까지 무슨 지랄이든 실컷 해 보고 싶을 테니,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닌데... 하아, 짜증 나네...’


“야, 거기 위에 꼬마들아. 그냥 보내 줄 테니까, 얼른 집에 가라. 너희는 내 손에 죽을 이유가 전혀 없어. 기사도가 빵 먹여 줘? 지랄하지 말고 그냥 집에 가.”


무려 오십여 미터 아래에서 말하는데도, 귓구녕에 명확하게 때려 박히는 부드러운 항복 권유에 청년들이 하나둘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운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급속도로 무너져 내리는 청년들을 보며, 결사대의 리더 리처드 햄블든 경이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잠시 후 깊은 한숨을 내쉰 청년이 흉벽 앞으로 다가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고귀하신 백작 각하, 자비로우신 말씀에 감사드리옵니다! 하오나 저희는 각하의 말씀을 따를 수가 없사옵니다! 누구보다 폐하를 잘 아시는 각하이시지 않사옵니까? 저희의 피붙이들이 지금 어디 있을지 짐작이 안 가시옵니까? 저희는 이미 죽음을 받아들였사옵니다! 부디 저희가 명예를 지키고, 기사로서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으휴, 씨발... 개가 똥을 끊지.”


이 성은 안 그래도 고지대인 마을의 뒷산 위에 지어진 천혜의 요새이다.

산기슭으로부터 삼사십 미터 위의 경사면 전부를 십 미터가 훌쩍 넘는 높이의 성벽으로 감아 버린, 리들스덴 성과 쌍벽을 이루는, 난공불락의 성채다.


그럼에도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전사들의 안색이 이미 죽은 시체라도 되는 듯 창백하기 이를 데 없다.

과거에, 권능 같은 거 없던 시절에도, 이 성을 한 번 털어먹은 전적이 있던 숲속의 마왕이 이제는 그냥 레알 마왕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사실 청년들의 안색이 밝으면 그게 더 기괴했을 일이다.


성벽 위를 가만히 올려다보던 하지운이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마력을 일으켰다.

금세 발밑과 그 주변에서 놀고 있던 흙의 원소들이 반응을 하더니 삽시간에 대지를 찢어발기며, 한 마리의 용을 승천시키듯, 높이가 무려 오십 미터를 넘는 거대한 흙탑을 쌓아 올렸다.

그러고는 거의 동시에 결사대가 몰려 있던 성벽의 반대편 동남쪽 성채를, 기반이 되던 경사면과 함께, 땅속으로 쑥 빨아들여 집어삼켜 버렸다.


성채의 삼분의 일이 산의 일부와 함께 갑자기 잡아 찢기듯이 뜯겨져 나가서, 어느새 생성돼 있던, 싱크홀 속으로 쓸려 들어가는 모습은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어 오히려 신비로운 느낌마저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흔들리는 정도를 넘어 출렁거리는 성벽 위에서 가까스로 중심을 잡으며, 산 밑에 만들어진, 거대한 무저갱을 내려다보던 청년들이 너도나도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서서히 미쳐 가기 시작했다.


“이건 꿈일 거야!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어!”

“그래! 아무리 마왕이라도 이런 미친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난 아직 꿈에서 안 깬 거야!”


싱크홀을 내려다보며 넋이 나가 있는 청년들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하지운이 오른손을 왼쪽 어깨 위까지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하게 허공을 그어 버렸다.

그 한 번의 손짓으로 충분했다.

흉벽과 감시탑들이 삼백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일격에 가로로 썰려 버린 것이다.


발밑의 흙을 도로 제자리로 돌려보낸 하지운이 싱크홀을 메운 후, 모든 분신들을 성안으로 들여보냈다.

원통하게 죽은 청년들의 시신이라도, 최대한 멀쩡하게, 수습해 주고 싶었던 게 하가 놈의 진심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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