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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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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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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7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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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26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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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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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3쪽

20화. 반격(3) - 수정판

DUMMY

이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럼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조차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그것을 부르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마저도 답이 없었다.

그럼 지금 묻는 이는 누군고 하니, 나는 누구인가?


"이봐."


소리가 울려 퍼진다.

단지 그것이라고밖에 표현을 못하는 것에 파문이 일었다.


눈을 뜬다. 그런데 눈이 뭐지?


"내 말이 들리는가?"

"네."


입으로 대답을 했다. 그런데 입이 뭐지?


"네 이름을 기억하는가?"


이름이 무엇일까. 나를 부르는 저것은 무엇인가.


"아씨. 내가 이것까지 해줘야 해? 진짜 제정신이 아닌 상태서 이래도 되나 싶은데..."


아까 전부터 들려오던 목소리가 잠시 멈췄다.


"네 이름은 '장현우'라고 해. 꼭 기억해라."


장현우. 장현우. 장현우.

입이 그 이름을 계속 불렀다.

장현우, 그래. 내 이름이었다.


* * *


현우의 눈과 입이 자리를 맞춘다. 얼굴이 만들어진다.

그가 제대로 눈을 떴다. 어느새 오롯한 자신이 만들어졌다.


"어... 제가 무얼 하고 있었죠?"

"그것을 나한테 물으면 어떡하니?"

"맞아, 제니 선배가."


그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잠깐 얼굴을 붉힌 현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은 누구죠? 여기는 어디인가요?"

"그것도 알려줄 수 없어. 내가 여기 있는 것도 꽤 힘을 쓴 것이라서. 지금 상태로는 나를 지각하면 안돼. 여기가 어디인지는 네가 스스로 생각해야 해."


현우는 머리를 짜내어 상황을 파악했다.

저 목소리가 제정신 운운 하는 것을 보면, 현실과는 거리가 먼 곳이리라. 그럼에도 그는 멀쩡히 사고를 하고 있었다. 정리하자면 이 곳은 현실이 아니고, 그럼에도 현우 자신이 오롯이 존재할 수 있는 곳이며, 다른 이가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정신세계?"

"오, 거의 비슷해. 정답에 가까워. 사실 거의 동의어나 다름 없지."


아무것도 없다는 말 조차도 할 수 없던 현우의 주변에 선과 점이 그려졌다.

수평선 하나로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다시 선을 빗겨 그어 산이 되었다. 점들이 모여 구름이 만들어진다. 논과 밭. 나무가 그려지고, 현우가 살았던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현우의 세계는 여전히 죽어있었다. 외곽선만 그려져 있는 개체들에는 색감과 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뼈대만, 그 구조만 세워진 셈이었다.


'정신세계랑 느낌이 비슷한 게 뭐가 있을까.'


정신세계와 비슷한 곳. 정신은 이성이다. 판단과 사고로 구성된 냉철함.


'여기에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 내가 나로서 존재케 하는 그것 중 지금 여기에 빠진 것.'


갑자기 제니의 모습이 다시 현우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쓰러지기 전에 느꼈던 그 감촉. 촉촉한 입술과, 이를 하나하나 스치며 입술의 연약한 곳을 건드리던 혀. 그녀의 혀가 입 안의 연약한 곳을 톡톡 칠 때마다 느꼈던 간지러움과 야리꾸리한 기분까지 모두가 한 번에 밀려들어왔다.


"아!"

"무엇인지 알게 되었나? 이곳이 어딘지 말이야."


지금 그가 느끼는 이 감정의 홍수, 이것이 부족한 것이었다. 이성으로 골격을 구성했다면, 이에 질감과 색을 입히는 것은 감성이었다.

현우의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에 추근대는 감정이 느껴졌다. 어서 빨리 답을 하라는 압박이었다.


"아, 듣는 이는 힘이 쫙 빠지겠다. 어서 답을 말해봐."

"네. 여기는 제, 심상이군요."


현우의 말을 시작으로, 그의 주변으로 색색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바람이 주변의 모든 것에 색을 입히기 시작했다. 하늘의 색, 땅의 색, 산의 색, 나무의 색, 구름의 색.

하늘은 푸르게, 하얗게, 노을 빛으로, 여명의 밝음으로 변해가고. 땅 역시 검고, 누런 색감과 질고, 딱딱하고, 거친 질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가 인식할 수 있는 그 한계까지 바람이 치닫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세계가 완전해졌다. 현우의 바람이, 인지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에서부터 개체의 뼈대를 세우고 이에 생생함을 불어넣었다.


"맞아. 여기는 너의 심상이 구현된 세계야."


현우는 이제서야 목소리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허공에 그려진 무언가의 얼굴, 있는 듯 없는 듯 이 세계에서조차 흐릿하게 보였지만 어쨌든 얼굴의 형상인 것은 확인할 수 있었다.


"당신은 여전히 흐릿하게 보이네요.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인가요?"

"아니, 아니야. 그렇지 않아."


얼굴이 고개를 저어 부정의 의미를 표할 때마다 상쾌한 바람이 현우의 귓가를 스쳤다.


"이건 내가 원래 그렇기도 하고, 지금은 편법으로 너에게 다가온 상태라서 그래."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설명하자면 좀 길어. 그보다는 너는 일단 정신을 차리는 게 먼저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여기서 어떻게?"

"마법을 사용해. 네가 가장 잘하는 것이잖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현우를 보며 얼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물론 얼굴만 동동 떠있는 상태에서 머리가 어디 있겠냐 만은, 그는 슬쩍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며 현우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으아. 그 녀석을 보다가 너를 보니까 열불이 터지긴 한다."

"죄, 죄송해요."

"여기는 너의 심상세계야. 네가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지."

"아무 마법이나 떠올려 봐라. 지금 너는 행운의 선택을 받은 거니까 무엇이든 잘 되겠지."


눈을 돌린 마법사는 자신의 심상을 바라본다. 회오리를 떠올리니 눈 앞에 회오리가 나타나고, 미풍을 생각하면 곧 잔잔한 바람이 현우의 눈썹을 어루만졌다. 실마리를 잡은 현우의 목소리가 한 줄기 흐름을 그렸다.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의 주문을 읊는다.


"바람아, 이리 오너라. 여기로 불어라. 나의 바람이 되어 고요히 이곳에 깃들어라. 내 너에게 형을 불어넣어 주리라. 내 앞에 자리한 적의 목을 물 그대의 송곳니를 원한다. 오너라, 풍호세."


현우를 중심으로 바람이 심상세계에 휘몰아쳤다. 거센 바람에게 속삭여 그것을 다독인다. 바람이 모여들어 야수의 형상이 되었다. 그것은 송곳니를 숨기지 않은 채 가만히 현우의 등 뒤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곁에 나타난 호랑이가 둥둥 떠다니는 얼굴을 바라본다. 그것이 제 적인지를 가늠하더니, 갑자기 그 녀석은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조아렸다.


"어, 어라. 이 녀석이 이러는 건 처음인데."

"허. 이게 된다고? 원래부터 요 동물이 이렇게 반응했었니?"

"저도 이 녀석이 머리를 조아리는 건. 아니, 애초에 달려드는 것 이외의 행동을 하는 건 본 적이 없는데요."


얼굴 씨는 그를 바라보는 현우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기꺼이 이 마법사를 위해, 바람에 둥둥 떠다니는 그것은 오랫동안 쌓아온 자신의 지식을 풀어내었다.


"아까 내가 이건 행운이라고 했던 것, 기억하니?"

"넵."

"잘 들어. 심상세계는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세계야. 이건 너희 쪽에서 말하는 마법사, 검사 이런 걸 가리지 않고 모두가 해당되는 거지."

"그런가요?"

"어떤 풍경을 상상한다고 해보자. 울창한 숲 속, 푸른 바다, 거기에 세세한 요소들까지도 상상을 한다고 할 때, 그것들은 너의 어디에 펼쳐져 있다고 생각할까?"


현우는 그의 앞에서 살짝 손가락을 움직여 숲과 바다를 그려보았다.


"앞이요?"

"그래. 보통은 그렇게 생각해. 네 눈으로 보이는 1인칭 시점으로 생각하지. 그런데 여기는 어때?"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본다. 휙휙 지나가는 모든 배경들은 고유의 색을 뿜어내며 그의 눈에 담겼다.


"이 곳은 바깥 세상과 똑같아. 그럼에도 너는 네 자신을 멀리 떨어져서 느낄 수 있어. 너 자신을 3인칭으로 보고 있다고. 이건 아무나 못하는 거지, 암. 나한테 감사해라."


나 자신을 객관화하여 볼 수 있는 곳. 머리가 조금 지끈거린 마법사는 눈 앞의 얼굴에 답했다.


"가, 감사합니다."

"네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줄까? 원래 6서클 이상의 고위 마법사들만이 꿈꿀 수 있는 건데 말이지. 어때?"

"으어..."


훨씬 더 높은 경지의 이들마저도 꿈꿀 수밖에 없다는 경지. 이미 육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는지, 현우는 새로이 펼쳐진 그만의 세계에 푹 빠져들었다.

허공에 떠다니는 얼굴은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 스승이나 제자나 그건 똑같네."


저 마법사는 방금 저 바람으로 이루어진 호랑이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동물이나 식물은 단지 껍데기를 씌웠을 뿐, 기본적으로 마력 덩어리이다.

간단한 명령만 듣는다. 싸워라, 나아가라, 부숴라, 돌진해라.

애초에 마법을 구현할 때, 주문으로 제약을 걸지 않는가? 그래야 소모되는 마력의 양을 줄일 수 있고, 세계가 이를 마법으로 쉬이 허락하기 때문이었다.


제피가 그의 말을 들어보건대, 원래 저 마법도 단지 형상만을 빌려 공격을 받아치는 것이라.

그러나 현우는 제피와 심상세계라는 조건이 붙긴 했지만, 분명히 마력으로 이루어진 형체에 생을 깃들게 했다.


저 호랑이는 허공에 떠다니는 자신을 '인식'하고, 지 힘과 겨루어 자신을 '비교'했으며, 자신의 실체를 파악했을 때 '스스로'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이것이 생명체가 아니라면 무엇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무생물,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원소로 가정해보자. 이들이 모여 형체를 이루고. 세계로부터 생명을 부여 받는다면, 이 객체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인간은 그것을 '정령'이라고 부른다.


제피로스는 아직 젊은 나이의 마법사를 바라보며 그 재능에 감탄했다.

아직은 능력이 크게 모자라긴 했다. 어차피 그의 수준을 볼 때, 다시 이 세계는 닫히리라.

하지만, 한번 전개된 세계는 다시 열기 쉬워진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빗장이 풀려있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시어도어가 이 녀석을 키울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다시 한 번 세계의 기록에 '그 녀석'처럼 전설을 남길 지도 모른다. 마침 이 아이도 이오니아 출신이니까.


"자, 이제 대충 감을 잡았나? 계속해서 육체의 통제권을 놓고 있으면, 정말 죽게 될 텐데."

"하지만 제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죠? 아니, 애초에 여기서 제가 마법을 쓴다고 하여 제 몸에 걸어진 제한을 풀 수 있나요? 외부와 차단되어 남는 마력도 얼마 없는데."


콧바람을 내뿜은 얼굴이 현우를 한 바퀴 돌았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가 당당히 말했다.


"마력은 내게서 끌어다 써라."

"남의 마력을 그렇게 쉽게 끌어 쓸 수 있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되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되지."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제 이 정도로 구현된 세계면 내 소개를 해도 되겠는걸."


둥둥 떠다니던 얼굴에 바람이 모여 희미한 형체를 이루기 시작한다.


"나의 이름은 제피로스."


현우의 등 뒤에서 발등을 핥고 있던 호랑이가 그르렁거리며 울었다.


"이 세계의 바람과 거하는 자, 누구보다 자유로운 자, 가장 순수한 바람이 나야. 가장 순수한 바람이란, 가장 순수한 마나를 가지고 있다는 거지. 세계로부터 생을 받아 모든 바람을 둘러싸는 가장 큰 바람."


완연한 인간의 몸을 가진 채, 제피로스는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어디 한 번 마음껏 네 바람을 보여봐. 너를 감싸고 있는 저 신성의 막을 깨부수거나 날려버릴 정도로."


* * *


"23번 침대의 환자가 깨어났습니다!"

"네? 어떻게?"


귓가에 사람들이 분주하게 달리는 소리, 의료 도구들이 덜커덕 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현우는 감았던 눈을 떴다.

오랫동안 입을 다문 채라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입술이 겨우 벌어지고 끈적끈적한 침이 입술의 끝에 달라붙는다. 입으로 숨을 몇 번 뱉고 나서야 현우는 겨우 답을 표할 수 있었다.


"어, 여이가 어디죠."

"전투학부 치료실인데, 자네 상태는 괜찮은가?"

"현우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아랑곳 하지 않고, 현우는 슬쩍 자기 몸만 이리저리 만져보고 있었다.


"이만하면 혼자서 한 것 치고는 꽤 단련하긴 했네."


약품을 들고 다가오던 치료사와 현우의 옆에 있던 윤화, 지미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무리 봐도 직전의 그 발언은 현우가 한 것 같지는 않아 보였으니까.

마치, 무언가가 그의 몸을 빼앗은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다, 당신 누구야."

"나? 아니, 저요?"


갑작스레 두통이 왔는지 한쪽 눈을 찡그리며 이마를 부여잡는 현우에게 지미가 완드를 겨눴다.


"누구냐. 어째서 장의 몸을 빼앗은 거지? 대답해!"

"아, 아니에요. 저 맞아요, 지미, 그리고 윤화 선배."


살짝 숨을 헐떡이는 그를 바라보는 둘, 아니 이제는 곁에 다가온 치료실 직원들까지 하여 대여섯의 시선아래, 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아, 아니. 좀 조용히 좀... 여기선 내가 있는 게 더 나아... 아직 어린 마법사야. 잠시만 몸을 빌려주겠니?"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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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화. 비밀 과외(1) 19.08.13 86 1 14쪽
36 36화. 눈덩이 효과 19.08.12 74 2 14쪽
35 35화. 말달리다(3) 19.08.11 155 2 14쪽
34 34화. 말달리다(2) 19.08.10 82 2 14쪽
33 33화. 말달리다(1) 19.08.09 79 2 14쪽
32 32화. 청란마방 19.08.08 73 3 14쪽
31 31화. 다렌 행(行) 19.08.07 96 2 15쪽
30 30화. 호신 마법 강의(3) 19.08.07 93 2 15쪽
29 29화. 호신 마법 강의(2) 19.08.06 75 2 14쪽
28 28화. 호신 마법 강의(1) 19.08.05 84 2 15쪽
27 27화. 설탕 세 스푼(3) 19.08.02 81 2 15쪽
26 26화. 설탕 세 스푼(2) 19.08.01 111 2 15쪽
25 25화. 설탕 세 스푼(1) - 2권 시작 19.07.31 102 4 14쪽
24 24화. 서로 다른 두 개의 도서관에서(2) 19.07.31 142 3 15쪽
23 23화. 서로 다른 두 개의 도서관에서(1) - 수정판 19.07.30 149 3 14쪽
22 22화. 폭풍과 뇌우는 그 끝이 있다(2) - 수정판 19.07.29 135 2 15쪽
21 21화. 폭풍과 뇌우는 그 끝이 있다(1) - 수정판 19.07.27 168 3 14쪽
» 20화. 반격(3) - 수정판 19.07.26 155 2 13쪽
19 19화. 반격(2) 19.07.25 145 2 15쪽
18 18화. 반격(1) 19.07.24 148 4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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