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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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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1,929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4.27 23:21
조회
228
추천
8
글자
11쪽

무로이의 첫 취조

DUMMY

“휴우······.”


같은 시간.

인사동의 상가건물 1층 정문 계단에 걸터앉아 있던 허은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했다.


지난달부터 TARA도 건물 밖에 건물 상인회에서 단체로 특수 주문 제작한 초가집 모양의 바퀴 달린 좌판을 폈더랬다. 그래서 은정도 아침부터 상점 내부와 좌판을 오락가락하며 알바 일에 열심히 임했었다.


하지만 오후 3시 무렵에 갑자기 흰색 구청 트럭에서 용역 아저씨들이 내려와 그 좌판을 물건 채로 트럭 위에 죄다 쓸어 올리는 것이 아닌가?


당연하지만, 상가의 사장님들 모두가 불이라도 난 듯 정신이 없었다. 물론 그런 일을 생전 처음 겪는 은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도 끌려가는 좌판에서 우선 물건들만이라도 건져내려고 발버둥을 치느라 정신 줄이 홀랑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른 상점의 물건은 하나하나의 단가가 그다지 높지 않은 것들이었다. 바닥에 떨어져도 전통 인형 정도고, 어깨 안마하는 물음표 모양의 나무 막대기 정도. 천연염색 쿠션이나 가방 정도였다.

그래도 깨지고 밟히고 하는 걸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데, 은정이 맡은 타라의 물건들은 몇몇 작은 동 액세서리들 외에는 하나하나가 나름의 예술품이라 모두 고가였다.

게다가 물건들의 덩치가 하나같이 크고 무겁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커다란 관우 동상에 달마 동상. 쌍마상에 청동 호랑이에 커다란 청나라 도자기며 티베트 불상 등등.

제아무리 힘 좋은 남자라도 혼자서는 구청 용역들이 쓸어가는 속도에 맞추어 물건을 다 내려놓을 수가 없는 것들이었다.

결국 은정은 노력은 하지만 속도를 맞추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며 울먹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키가 훤칠한 한 남자가 나타났다.


타라의 옆에 옆 부스에서 전통차를 판매하는 남자였다.

사장님인지 알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남자가 마치 제 일처럼 타라의 무거운 물건들을 은정과 함께 열심히 바닥으로 옮겼다. 그리고 나중에는 거의 방심상태가 된 은정을 많은 일을 해 주었다.


마치 슈퍼맨처럼.

은정은 그동안 그 남자의 전통차 판매점을 몇 번 스쳐 지난 적도 있고, 몇 번은 시음용으로 주는 차도 마시고 잡담도 나누고 했었다.

사람이 꽉 찬 듯, 혹은 좀 빈 듯. 묘한 이미지를 지닌 키다리 아저씨가 그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줄이야. 자기 가게에 손님도 있었는데.


큭! 감동했다.

사실 그 일로 아르바이트생일 뿐인 은정이 져야 할 책임은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사장님이 돌아왔을 때 고가의 물건들이 파손되어 있거나 비어 있거나 하면 인간적으로 얼마나 죄스러웠을까? 하지만 찻집 아저씨 덕분에 살았다.


어쨌거나 처음 겪는 무서운 일 앞에서 그녀는 오후 5시가 넘어서도 정신적 혼란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시리게 갠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상점 앞의 거리를 넋 놓고 서성댈 뿐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자신에게 일어난 일보다 대마도에 있을 아리를 향해 마음이 튀어갔다.


그런데 그러고 있을 때, 고마운 「찻집 아저씨」가 은정이 앉아 멍을 때리고 있는 계단 옆에 함께 앉았다. 그리곤 그 비싸다는 세작 한 잔을 시음용 일회용 컵이 아닌 멋진 전통 도자기 찻잔에 가득 따라 와서는 은정에게 내밀었다.


“많이 놀랐지요?”

“아. 참! 아까 전엔 정말 감사했습니다. 인사도 변변히 못 했네요. 아직도 뭐가 뭔지 정신이 없어서.”

“왜 아니겠어요.”


은정은 자신에게 내밀어진 찻잔을 받아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곤 안도의 한숨을 길게 토했다.


“그래도 오늘은 날씨가 활짝 개서 다행이네요.”

“네. 그렇죠.”


홀짝.

그런데 둘이 그러고 앉아 있으려니 딱히 대화를 나눌만한 화제가 없었다. 그래서 둘은 그냥 서로 다른 방향의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


반면 쓰시마.


자신의 일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노인 일행들에게는 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아리는 무너진 하늘 아래를 거북이처럼 기어 호텔에 돌아와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고생한 혼마 아저씨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 후, 자신의 호텔 방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뭘까? 살아남은 기쁨이랄까? 정말이지, 디스커버리 채널 따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기상이변의 중심을 체험한 기분이었다.

한국에서 남들과 함께 흔히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에 아리의 가슴은 흥분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택시 안에서 차창을 찍었을 뿐이지만, 심상찮은 사진도 가득 찍었다. 마치 허리케인을 보다 가까이에서 찍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닌 재난 기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지금 쓰시마 경찰은 완전히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혼마는 호텔 옆 택시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위댁 총각 무로이를 보았다.


“욕보셨습니다.”

“아, 뭐. 운전기사가 운전한 것 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한마디씩 오갔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잠시보다 좀 더 낼 수도 있네. 자네도 그걸 원하는 것 같고.”


혼마는 그렇게 말하며 무로이가 아니라 경찰에게 연행되는 묘한 기분으로 사돈댁에서 운영하는 토속 음식점으로 향했다. 날씨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오늘 힘드셨지요?”

“어휴. 말도 말아. 사람 둘이 탄 차가 바람에 날아가는 줄 알았으니까 말 다했지.”


무로이가 식당에서 누님이 내어준 미지근한 메밀차를 한 잔 받아 혼마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잠시 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있던 혼마는 허겁지겁 차를 받아 마시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아침에는 참 좋았는데 말이야. 쓰쓰자키에서부터 갑자기 하늘이 시커멓게 뒤틀리더라고. 그 전까지는 정말 즐거웠어. 하지만 어휴. 돌아올 땐 진짜 죽는 줄 알았지. 운전하는데 저 앞에 낙뢰가 떨어지지를 않나 나뭇가지들이 잔가지 굵은 가지 할 것 없이 후두둑 비처럼 떨어지질 않나.”

“게다가 가슴 아픈 혐한 감정 때문에라도 더더욱 피곤하셨겠지요. 오늘은 이래저래 재앙 같은 하루였겠어요.”


무로이는 직업이 직업인 데다가 상황도 상황인지라, 저도 모르게 사돈어른을 추궁하듯 했다. 워낙에 종일 신경이 잔뜩 날카로워 있었던 탓이니만치, 첫 마디부터 노골적으로 무례를 범하고 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놀라서 주의를 주는 유키짱의 시어머니인 무로이의 누님과는 달리, 정작 혼마는 얼이 나간 듯 멍한 얼굴일 뿐. 전혀 불쾌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 오늘은 즐거웠네. 정말 즐거웠어. 내가 얼마 만에 그렇게 웃어봤는지 몰라. 마치 어린 유키랑 함께 섬을 누비는 기분이었지. 혐한? 그래. 난 아직도 한국 놈들이 싫어. 하지만 오늘 모신 손님은 정말 좋았네. 빈 유리잔같이 투명하고 순수한 아가씨였거든. 이런 경우는 한국인이냐 일본인이냐가 아니야. 한 사람으로서 즐겁고 좋았다네.”


뜻밖이었다. 쓰시마의 대표 혐한이라 해도 족할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이야.

무로이와 그의 누나와 매형은 잠시 넋을 놓은 얼굴로 혼마를 말없이 응시했다. 그러든 말든, 혼마는 천장에 달아둔 티브이의 날씨정보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형사의 감으로 그의 말에 거짓말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날씨가 이래서 마무리는 구질구질해졌지만, 그럼에도 혼마는 정말 즐거웠던 것 같다. 지금의 그는 어린 딸과 종일 해변을 누비다가 기분 좋은 피곤함에 나른해진 아버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흡족한 얼굴로 추억을 더듬는 듯한 저 아련한 모습이라니.


“저 어르신. 그런데 혹시 손아리라는 그 손님에게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제가 좀 알아보니 본래 한국인 손님은 안 받으시는 사돈께서 오늘 그 손님을 맡은 것도 실은 어르신 자의가 아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직도 경찰 정복 차림인 무로이가 다 만들어진 시오라멘을 주방에서 들고나와 혼마의 앞에 차려 놓으며 그리 물었다. 그러자 눈을 뜬 채 꿈에서 깬 듯 혼마는 움찔. 놀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무로이군. 자네 그런 것까지 알아보았는가? 내가 참, 오늘 많은 사람에게 걱정을 끼친 것이구먼. 미안하게 되었어. 그렇지. 오늘의 일은 처음부터 내 뜻이 아니었네. 그러니 오면서 내내 이상했지. 자네는 어떻게 내가 한국인 손님을 모신다는 걸 알았지? 물론 경찰이 그런 일을 알아내는 건 크게 힘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일이 있었나? 경찰이 그런 걸 알아봐야 할 만한 어떤 특별한 일이라도 생긴 건가?”

“우선은 어르신. 제 질문에 차근차근 답해 주십시오. 제 이야기는 그다음에 들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그보다 이거. 요기부터 좀 하시고요.”


무로이는 혼마가 우선은 속을 채워놓기를 바랐다.

이 문제는 어쩌면 오늘 안에 끝나지 않을 문제일지도 모르니까. 그에게 아무 혐의가 없다 하여도 말이다. 그러자 잔뜩 시장했던 혼마는 크게 소리 내어 면을 빨아들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 그랬지. 간밤에 내 오랜 친구 시마노에게 전화가 왔어. 그 손님 일행을 담당한 미니버스 기사인데, 아. 이 정도는 이미 알고 있겠군. 아무튼 그 친구가 나더러 내 하루를 손아리라는 손님만을 위해 써 달라며 특별히 부탁하더군.”

“흠흠. 네에.”


혼마가 식사하는 옆자리에 앉은 무로이는 최대한 태연하게 보이려 노력하면서 슬그머니 가게 메모장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어르신. 오늘 그 손님과 함께 혹시 미우다 해수욕장은 안 가셨습니까?”


그 질문에는 너무 긴장해서 살짝 목소리가 떨렸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안 갔네. 손님이 처음엔 미우다에 가고 싶다고 오더를 내기는 하더라고. 그런데 그때만 해도 한국 놈들이 미워 속이 뒤틀리던 때라서 말이지. 수지가 안 맞는다는 말로 단칼에 거절했지. 하지만 생각해보게. 여기서 저 북쪽 끄트머리 미우다라고. 어제 이미 다녀왔다는 곳을 한 번 더 보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오기엔 너무 멀지 않은가. 택시기사로서 수지가 안 맞는 건 당연하지만, 여행자의 시간도 너무 아깝잖나. 여기 남쪽에 더 볼 곳들이 많이 있는데 말이지.”


무로이는 혼마의 대답에 머리를 끄덕이며 잠시 볼펜을 놓고 긴 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어르신. 어르신은 정말 이 섬에 뭐 볼 곳이 많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8 Larimar
    작성일
    15.06.11 15:38
    No. 1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밝은스텔라
    작성일
    15.07.08 01:01
    No. 2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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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무로이의 불길한 예감 15.04.26 199 6 13쪽
18 무로이 관리관 15.04.26 400 5 16쪽
17 돈 때문에 사람은 추해지고… 15.04.26 300 6 17쪽
16 “이 여행은 자살 여행이라고!” +2 15.04.26 421 6 14쪽
15 혐한(嫌韓) 택시기사 혼마 이야기 15.04.26 303 6 15쪽
14 영 찝찝해 15.04.26 314 8 10쪽
13 기묘한 꿈 15.04.26 392 6 13쪽
12 노인들의 한(恨) 15.04.26 341 8 10쪽
11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내비둬야 혀 +4 15.04.26 367 7 15쪽
10 눈물도 말라버린 이야기 +2 15.04.26 397 6 10쪽
9 <늙으면 죽어야지> 카페 +4 15.04.26 397 6 13쪽
8 비바람 몰아치는 대마도의 밤 +2 15.04.26 387 7 13쪽
7 손아리의 순수한 빛 15.04.26 371 9 11쪽
6 대마도와 부산은 가깝다 15.04.26 268 9 9쪽
5 톰비(솔개) 15.04.26 391 8 9쪽
4 개뿔이 블랙 펄 호 +4 15.04.25 374 8 8쪽
3 저렴한 여행 상품 +2 15.04.25 580 10 7쪽
2 타로카드 +6 15.04.25 610 11 11쪽
1 그 섬 +8 15.04.25 1,144 18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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