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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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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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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21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4.26 19:37
조회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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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글자
17쪽

돈 때문에 사람은 추해지고…

DUMMY

오전 11시 반.


아리는 이즈하라 북쪽에 접한 미쓰시마마치의 한 온천에서 느긋하게 노골노골 몸을 풀고 있었다. 날씨가 뭐 같아서 그런지 고풍스러운 온천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리가 처음에 들어올 땐 인접한 마을 주민으로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지만 막 목욕을 마치셨는지 금방 나갔고, 지금은 아리 혼자서 온천 하나를 통째로 대절한 기분을 마음껏 누렸다.


날씨는 다시 궂어졌고, 오래되어 보이는 온천탕에서 바라보는 창밖엔 다시 빗방울이 툭 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 아리의 마음에는 무지개만이 가득 차 있었다. 듣기로는 쓰시마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이라지? 물이 죽여준다. 부들부들 오예! 물 좋고 분위기 좋고!


이제 지난날부터 마음속에 고여 있던 아리송한 의문들이나 간밤의 ‘삐리리’한 꿈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비가와도 좋아 볕이 나도 좋아~ 아리는 창을 톡톡 두드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혼자 흥얼흥얼 천국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같은 시각.

시마노는 친구인 혼마가 이젠 아예 핸드폰까지 꺼 버렸는지 연락도 받지 않자 미치고 환장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말을 맞춰야 하는데! 시마노는 조바심이 나 미칠 것 같았다. 혼마가 이를 가는 한국인이 연관되어 있으니 아무리 친구라도 어디로 튈지 모르데. 그러니 더더욱 말을 맞춰야 하는데!


‘아, 이 친구 대체 지금 어디서 뭣 하고 있는 거야!’


초조함으로 잠시 집에 들른 시마노는 나름의 알리바이를 위해 사 온 도시락 6인분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는 고다츠의 이불을 향해 핸드폰을 집어 던지며 씩씩거렸다.

그는 이미 도요타마 마치 ―마을― 의 와이타에 있는 자신의 집에 도착해 있었다. 그 날 자신의 모든 일은 이미 다 끝나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난날 밤에 할아범들이 시마노를 식당 밖에서 따로 불러 긴히 이야기가 오가긴 했지. 그래도 어려운 일을 부탁한다는 것이 설마 이런 일일 줄이야. 지금까지도 전혀 현실감이 없었다. 하지만 시마노는 해냈다. 살아 있는 생선의 머리를 쳐 본 것 외에는 살아있는 것에게서 피를 뽑아 본 적도 없는 그가 말이다.


돈 때문에.


시마노는 잠시 숨이 차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무너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그 일을 자신의 손으로 해냈는데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숨이 컥컥 막히고 온몸이 떨렸다.

정작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악역에 심취해서, 그래. 연극의 한 역할을 맡은 기분으로 그 일들을 해 냈다. 노인들과 자신이 모두 연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한 것 같다.


자살을. 자살의 도우미를······.


‘으아아아!!’


시마노는 갑자기 머리가 쩡! 하고 깨지는 것만 같았다.

그것은 전혀 현실감 없는 그 부탁이었다. 하지만 듬뿍 쥐여준 돈 때문에 들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은 무슨 정신으로 운전해 집에 돌아왔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마치 몽유로 꿈속을 헤매다가 안개 속에서 절벽 밖을 향해 발을 디디는 기분이었다. 어쨌거나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는 갑자기 몰아닥친 현실. 그래. 끔찍한 현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난, 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는 물에 빠진 듯 허공을 휘저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갑자기 눈앞에 노인들의 마지막 모습들이 철컥거리는 기계 소리를 내며 필름 사진으로 각인되는 것만 같았다. 비좁은 그의 집 거실에 온통 노인네들이 가득 찼다.


시마노는 무릎을 꿇고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고다츠 이불 위에 신물을 토했다. 빈속이라 그저 시큼한 물만이 나왔다. 그리곤 잠시 멍하니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자신은 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게 무슨 짓인지는 알고 한 짓인가.


그는 사람을 죽였다. 칼을 들었고, 피를 보았고, 목을 졸랐고, 벼랑 끝으로 밀어버렸다. 처음에는 무슨 정신인 줄도 모르고 제 할 일에 열중할 뿐이었지만, 나중엔 급히 마음을 바꾸어 죽을 마음마저 사라진 노인들까지 제 의지로 죽여 버렸다.


시마노는 어둑어둑한 거실에 바닥에 거의 엎드려 있다가 이번에는 갑자기 무슨 생각인지 허겁지겁 옷을 벗어 보았다.

불현듯 옷에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다행이랄까, 육안상 옷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둘러 욕실로 가 거울에 얼굴을 비쳐 보았다.

뺨에 살짝 스친 핏자국 흔적이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었고, 그나마도 손가락에 침을 묻혀 비비자 금세 사라졌다.


그러자 다시금 현실이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처리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떠오른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선 정리해야 할 것은 할아버지들의 피가 묻은 장갑뿐인가? 그 정도는 뜰에서 태워버리면 된다.

그의 집은 허름한 건물 뒤가 나지막한 언덕 비탈의 텃밭이 겸해진 뜰이었다. 평소에도 낙엽이 모이면 모아다가 이것저것을 함께 태웠기에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일을 관심 기울여 지켜볼 이웃도 없다. 그야말로 쥐 죽은 듯 조용한 시골 동네다.


시마노는 계속 집의 이점 아닌 이점을 상기하며 마음을 달랬다.

이런 날씨의 새벽이었다. 오고 가는 길에서 사람 하나, 오가는 차 한 대 보지 못했다. 여긴 도쿄 한복판이 아니라 쓰시마다. 그 시간의 <그런 곳>에서 이런 악천후에 목격자 따위가 나올 턱이 없다. 그러니 이대로 침착하게 입 다물고 있으면 발견될 때까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무엇보다 그리 쉽게 발견될 리도 없다. 아예 며칠이 지나도록 모를지도 모른다.


이런 날씨다. 새로운 관광객이 오지도 않을 테고. 혹시라도 지금 있는 관광객들도 이런 비바람을 맞으며 미우다 해수욕장에 갈 리가 없으니까.

게다가 현지인들이야말로 이런 날에 거긴 안 간다. 이런 날씨엔 미우다도 안 갈 판에 쓰쓰자키는 더더욱 갈 일 없지. 그러니 시마노는 이대로 다시 나가서 빈 버스 몰고 이리저리 좀 쏘다니다가 다시 돌아오면 된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의 미니버스이니 어디를 어떻게 다닌들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은 자유여행이라는 걸 여행사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적당한 시간이 되면 오늘도 정상적으로 투어가 마쳐졌다고. 돌아다닌 곳은 대충 둘러대면서 보고를 하면 그만이다. 쫌생이 노인네들이라 입장료 내는 곳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하고 말이지.

남은 문제는 혼마였다. 우선은 그와 시마노 자신이 같은 시간에 마주쳐서는 안 되었다. 손아리가 텅 빈 미니버스를 보게 할 순 없으니까.


‘하지만 이 친구. 하필 이럴 때 전화를 꺼 두다니!’


혼자 패닉에 빠진 시마노는 다시 벗어놨던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새벽에 나갈 때 입었던 것과 다른 것을 입으면, 설마 그럴 리가 없음에도 혹여 모를 목격자에게는 의심의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리곤 피에 젖은 장갑을 싸 둔 검은 비닐봉지는 일단 뒤뜰, 낙엽을 태우기 위해 파 둔 움푹한 구덩이 안에 넣고 서둘러 젖은 흙을 덮은 후에 다시 거실로 들어왔다.


시마노보다 나이가 여덟이나 많은 부인인 미사에는 아직도 2층에서 잠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집안은 ‘죽은 듯’ 조용했다.

미사에가 지난날 부터 날씨가 엉망이 되면서 온몸이 쑤시고 결리고 몸살까지 겹쳤다고 주장하는지라, 아마 약을 먹고는 아마 꽤 오랫동안 자고 있을 것이다.

시마노는 거실에 서서 가만히 들릴 리 없는 미사에의 인기척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역시 조용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용히 현관에 서서 신발장 벽에 걸린 먼지 쌓인 부연 거울을 바라보며 돌처럼 굳어 있는 제 얼굴을 두 손으로 주물러 풀었다.


분명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자신은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 하지만 죄가 있고 벌을 받아야 한다면 오히려 노인들의 몫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괜찮다. 침착하자. 걱정할 것 없다. 목격자는 없고 자신은 자신의 할 일을 마쳤을 뿐이다.

노인들은 분명 곳곳의 관광 스폿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오후에는 도시락 6개를 사서 끼니를 채웠다. 그런 후에는 세상 잊고 느긋하게 온천욕을 즐기겠다고 하면서 기사 양반은 이제 들어가 보라. 뒤는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시마노는 미네 마치의 온천욕장까지 노인들을 태워준 후 퇴근했다. 일은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다음은 어찌 되었는지, 시마노는 전혀 알 바 없는 것이다.


행여나 시신이 생각보다 일찍 발견된다 해도 위치가 위치다.

쓰시마의 경찰들이 이 날씨에 그곳 쓰쓰자키에서 원만한 시체 수습작업을 할 수 있을 리도 만무하고, 할아범들은 할멈들과는 다른 곳에서 죽었지만, 그들 또한 마찬가지 상황이다.

사인이나 사망추정시간을 추측하기엔 이미 시신은 많이 훼손되어 있으리라. 비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을 때 톰비(솔개)들이 냄새를 맡은 것을 확인하고 왔으니까······.


그러니까! 남은 일은 혼마를 구워삶는 일뿐이다!

혼마와는 그야말로 절친한 친구이니 설령 시마노가 직접 살인을 했다고 주장 하더라도 그는 자신을 감싸주리라. 그는 그렇게 믿었다. 마침 그 친구는 마침 지독한 혐한 주의자가 아니던가? 그래. 그라면 한국인들이 Ep로 몰려와 죽었다고 하면 오히려 잘 뒤졌다 하고 손뼉을 칠지도 모른다.


그러니 위험한 일이지만 그와는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감싸주기 위해 협력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전화를 안 받느냐고! 시마노는 이번 일이 조용히 묻히거나 지나가는 동안에 친구 혼마의 등 뒤에 숨어서 납작 엎드려 있을 참이었다.


‘나만 알고 있었던 일이 아닌 원정 자살 여행.’ 이 되도록 말이다.


그리고 손아리.

노인들의 일행이니 아마 자살단과 같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그녀를 그에게 맡긴 이상, 미안하지만 이미 혼마도 제 의지와 무관히 자신과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지. 시마노는 모든 일을 제멋대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중요한 것이 떠올라 다시 신발을 벗고는 거실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점퍼 주머니에서 35만 엔이 든 봉투와 꼬깃꼬깃하게 뭉쳐지고 젖은 12만 엔 뭉치를 먼지 쌓인 티브이 뒤, 비상금 은닉용 고급 맛 김 깡통 안에 넣고는 다시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혼마에게는 10만 엔을 수고비로 받아서 총 4만 엔을 그의 몫으로 준다고 했지만, 실은 그가 노인에게 받은 돈은 35만 엔이었다.

전날부터 받은 웃돈까지 합치면 총 40만 엔을 노인들에게 받았다. 거기다가 비바람 치던 쓰쓰자키에서도 저승 가는 노잣돈의 의미로 노인들이 옷 구석구석에 박아 둔 돈들을 주머니째 잡아 뜯어가며 12만 엔이나 더 강탈해냈다.


아무튼 그것은 눈먼 돈. 여행사도 알지 못한다.

혼마에게도 자살여행단에 대한 이야기는 밝혀도 돈 이야기는 하지 않을 참이었다. 시마노는 혼마를 절친한 친구로 여겼기에, 손님들의 죽음에 대한 무거운 짐은 그의 어깨를 빌려 반쯤 덜어보려 하면서도 돈 문제만큼은 오로지 자신만의 것으로 하고 싶었다.


시마노는 혼마는 이제 딱히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부인은 먼저 갔고 딸인 유키짱은 봉을 잡아 동경으로 시집갔으니까.

그의 생각에 혼마는 무릎 아픈 것 외에는 건강한 친구였다. 딸이 보내주는 용돈만으로도 노인 혼자서 살만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자신의 처지는 달랐다. 혼마에 비하면 자신은 초라했다.

늙은 마누라는 매일 시름시름 아프고, 그도 철마다 부산에 가서 약을 때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빌어먹을 아들놈들은 둘 다 부산으로 건너가서는 학비나 용돈을 보내 달라는 연락 말고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이젠 제 몸 하나도 버거운 판에 저 늙은 마누라와 둘 있는 아들이라는 짐은 그에게 너무나 무거웠다.

모든 게 다 지긋지긋했다. 시마노는 절실하게 돈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 정도는 혼마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다.


‘설령 그가 알게 되더라도, 이번 문제만큼은 날 이해해 줄 테니까. 그냥 처음부터 입 다물고 있자고.’


— 찰칵. 문이 닫혔다.



***



— 덜컥. 문이 열렸다.


혼마는 차창을 요란스레 두드리면서 흘러내리는 빗줄기들을 보며 택시 안에서 느긋하게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유기체처럼 우득우득 소리를 내며 차창 위에서 우글우글 노니는 빗줄기 저 너머에서 택시를 향해 뛰어오는 아리를 보곤 서둘러 자동문을 열어 주었다.

온천에서 훈훈하게 몸을 덥힌 아리가 차에 올라타자 차창은 순식간에 김이 서려 부옇게 변했다.


“어때, 물(온천)은 만족하셨습니까?”


지독한 혐한 주의자였던 혼마가 웃는 얼굴로 아리를 반겨주자, 그런 사정 따위 알 리 없는 아리는 활짝 웃으며 엄지손가락을 쑥 내밀어 보이며 “넘버 원!”을 외쳤다.


그 모습은 마치 신이 나서 허리까지 휙휙 휘둘릴 정도로 맹렬히 꼬리를 흔들어 대는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숨기지 않는 그 미소와 행복이 다시금 혼마까지 행복하게 했다.

‘미친’ 시마노에게 다시 걸려올 전화가 두려워 아예 핸드폰에서 배터리를 빼 버린 혼마는 이제 마음 편히 웃었다. 그는 아리로 인해 최근에는 전혀 느낄 수 없었던 신선한 행복을 느꼈다.

유키의 일 때문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 “조선 놈들 따위 다 ‘일본해’에 처박아 죽여 버려야 해!”라고 외쳤던 그의 가슴속 응어리는 이미 많이 치유되어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단지 어린 딸과 드라이브를 즐기는 아버지의 마음일 뿐이었다.

젊은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늙음의 훈장과도 같은 무릎의 통증은 가시지 않았지만, 혐한주의자 혼마 이치로는 친절한 택시기사이자 딸을 가진 ‘아빠’가 되어 아리의 행복을 함께 즐겼다.

이런 보잘것없는 작은 섬에서 그것도 비수기. 게다가 이런 악천후를 이토록 극적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 정말이지 다시는 만나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 손아리는 더 이상 재수 없는 조선인이 아니라 한국에서 온 손님이자 귀인이었다.

비록 일본어로 하면 손아리라는 이름은 損あり。(손해 있음)이라는, 전혀 긍정적이지 못 한 묘한 이름이긴 하지만, 혼마에게 그녀의 존재는 전혀 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오늘 일을 마치고 시마노에게 가서 정말 미쳤느냐? 괜찮으냐? 거리를 둔 안부를 물은 후에 추가로 주겠다는 2만 엔도 사양할 생각이었다.

오늘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즐거움을 누렸으니 그걸로 됐다. 라고 할 참이다.


그렇게 세차게 내리던 비는 살짝 약해지더니 다시 그쳤다. 아무래도 온종일 그런 식으로 오락가락할 모양이다.

뭐 어쨌거나 날씨와 무관히 신이 난 아리는 패딩점퍼 속에 품고 온 뜨거운 캔커피와 우롱차, 생수 등의 음료수를 주르륵 늘어놓고 원하는 걸 마시라며 혼마에게 권했다.


“아저씨도 시장하시지요? 이제 출출하니 점심식사해요. 자 여기요. 호텔에서 받아온 도시락이에요. 이건 제거고, 이건 아저씨 잡수시면 돼요. 둘 다 2인분씩이니 넉넉해요.”

“도시락?”

“네. 오늘은 묘한 일이 있어서요. 아침부터 호텔 식당에서 저 혼자 2인분 밥 먹고, 도시락도 아저씨 몫까지 모두 4인분 싸 달라고 했어요. 일행 노인분들이 아침을 안 잡수시고 새벽부터 일찍 나가 버리셨다나? 그래서 뜻하지 않게 아침 점심 모두 제 것이 되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나까지 신경 안 써줘도 되는데······.”


들어보니 어쩐지 모르게 찜찜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어쨌거나 아리는 예의상 사양을 하려는 혼마에게 자꾸만 커다란 도시락 봉투를 밀어주었다.


그런 면을 보면 아리는 참 유키와는 달라도 완전히 다른 여자 ‘아이’였다. 유키는 지극히 수줍음이 많고 조용조용한 천상 일본여자인데 반해 아리는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렬한 에너지가 뻗치는 것이, 섬의 여느 총각들 보다 그 활력이 더 해 보였다.

그런데 그 모습이 또 사람 기분을 좋게 하는지라, 혼마는 고맙다. 고맙다 하면서 마지못해 도시락을 받아들고는 다시금 아리의 이야기를 잠시 곰씹었다.


‘노인들이 새벽부터 나갔다고? 모두 아침도 거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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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대마도 남섬 이즈하라 시내 쪽 어딘가를 걷다가 찍은 주택 사진입니다. 실제로 저런 주택들이 있습니다. 시마노의 집도 저렇게 가난한 분위기라는 설정입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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