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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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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1,928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4.26 00:08
조회
390
추천
8
글자
9쪽

톰비(솔개)

DUMMY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가니 주차장에 미니버스와 기사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아리와 비슷하거나 더 작았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걸 보니 전형적인 일본의 서비스 감각과는 꽤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그는 시끄럽지 않을 뿐,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는 오히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를 더 닮아 있었다. 조상대에서 부산인의 피가 섞였을 수도 있겠지 뭐.


아리는 느릿느릿한 노인 일행이 모두 버스에 올라탄 후 가장 늦게 탄 덕분일까? 제일 입구 부분에 앉아 커다란 앞 유리로 내다보이는 제 기준상 최고명당을 얻었다.


하지만 환갑을 족히 넘었을 외모의 시마노라는 아저씨가 운전하는 모습을 흘끔 본 순간, 그녀는 신나서 잡은 그 자리가 결코 명당이 아님을 깨달았다.

운전대를 잡은 시마노 상의 면장갑 낀 오른손은 간헐적으로 경련하듯 덜덜 떨고 있었다. 그러니 바깥에 펼쳐진 야생의 풍경에 온전히 집중하려고 해도 그 손이 신경 쓰여서 아리는 미칠 것만 같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버스 안의 분위기 또한 최악이었다.

비가 들치니 버스 창을 열 수도 없는데, 일행 중 한 할머니가 가방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하자 갑자기 버스 내 모든 노인네가 약속이라도 한 냥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비흡연자인 아리로서 그야말로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습기 차서 쾌쾌한 버스 냄새에 담배 냄새. 거기에 꼬링한 노인 냄새까지 더하니 그야말로 미치고 환장하고 팔짝 뛸 판이다.


아리는 그래도 무려 해외여행이라고 여행용 향수까지 마련해서 정성스레 뿌렸는데 지금은 이게 다 뭐야! 그도 모자라 이젠 어라? 또 뭐지? 어디선가 지하철 1호선이나 이른 새벽의 옛날 경의선에서 맡을 수 있는 생선 말린 비린내까지 나기 시작했다. 아 젠장!


‘이 분위기는 완전히 어촌마을 장터잖아? 난 나름 비싼 돈을 주고 해외여행을 온 건데 어째서 이런 상황에 시달려야 하느냐고!’


담배 연기에 숨이 컥컥 막혀왔다.

하는 수 없었다. 비가 들치든 말든. 아리는 차창을 훨쩍 열고 노인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노인들은 그녀가 그러든 말든, 어째서인지 각자만의 세상으로 침잠한 듯 조용하게 허공을 응시하며 담배 연기를 푹푹 뿜어댈 뿐이었다.


결국, 수면 부족에 똥물까지 올려낸 심한 멀미로 속도 망가진 아리는 심한 탈력감과 좌절감을 느꼈다. 그리곤 비가 차내로 들치는 걸 좋아할 리 없는 시마노 상에게 보란 듯, 열어 재낀 차창의 틈으로 얼굴을 꾸역꾸역 끼워 넣었다.


그러자 차창 밖으로 윙윙 부는 비바람이 얼굴을 거칠게 때렸다.

아리는 그제야 상쾌함에 기분 좋아진 고양이 눈으로 야생의 맑은 공기를 허파에 가득 채워 넣었다. 버스는 얼마 달린 것 같지도 않았는데 섰다. 벌써 인터넷으로 그토록 환상을 품었던 미우다 해수욕장에 다다른 것이었다.


“우와!”


아리는 그제야 여행의 참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후둑후둑 비가 내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피곤도 다 가신 얼굴로 신이 나서 저 혼자 바닷가 모래밭을 망아지처럼 마구 뛰었다.


반면 노인 일행들은 한참 떨어진 곳에서 자기들끼리 뭔가 조용조용 이야기를 나누며 거닐 뿐이었다.

아리는 그들이 그러든 말든, 새벽부터 기차와 배와 버스 안에서 꾹 참아왔던 야생성을 마음껏 떨치며 뛰어다녔다. 그렇게 한창때의 처녀가 지닌 젊음은 빗속에서도 눈부시게 빛났다. 질끈 묶은 포니테일이 쉴 새 없이 허공에 떴다가 등을 묵직하게 철썩철썩 때렸다. 누가 봐도 좋게 말해 미친년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신나는 걸 어떡해.


‘이거야. 이거였어. 이거! 이거!!’


빗줄기는 더 굵어지지도 가늘어지지도 않았다.


미우다 해수욕장의 수면은 악천후에도 소녀의 달콤한 꿈처럼 차분하고 고요했다.

오락가락하던 비에 단단하게 젖어 뭉쳐진 모래밭은 균일하게 고왔고, 군데군데 시냇물처럼 파여서 흘러들어온 바닷물은 당장에 손을 모아 퍼마셔도 될 듯이 맑았다.


그런 풍경을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흡입해 버리겠다는 듯, 난리 부르스로 설쳐대는 아리의 미친 모습을 먼발치서 할매할배들이 어떤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을까?

그렇게 얼마나 뛰어다녔을까. 결국 숨이 턱에 차고 허파가 당겨오는 것을 느끼고서야 아리는 헉헉대며 뜀박질을 멈추었다.


‘그러고 보니 나 왜 뛴 거지?’


아리는 헉헉 숨을 고르면서 미우다의 해변에서 바다로 조금만 헤엄쳐 가면 디뎌 오를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서 있는 작은 돌섬을 바라보며 다시 헤헤 웃었다.


풍광이 예뻐서 정말 좋았다. 날씨가 화창했더라면 얼마나 더 예뻤을까? 하지만 워낙에 비 오는 날도 좋아하는 아리이기에 우중충한 바다와 내려앉은 먹구름 사이에 선 작은 돌섬을 보며 연신 싸구려 디지털카메라의 셔터를 눌러댔다.


그렇게 그녀는 세상에 홀로 선 한 마리의 짐승이 되었다. 일행이 있었다는 것도 잊었고 이 멋진 자연을 정해진 시간 동안만 즐겨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처음부터 자신의 것인 세상을 마땅히 누린다는 묘한 여유까지 느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아리는 멀리서 시마노 상이 부르는 목소리에 핫! 하고 다시 정신이 들어 현실이라는 늪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급격한 추락감을 느꼈다.


‘현실이구나.’


그제야 그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그동안 못 봤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현실이었다. 어디선가 떠내려온 산더미 같은 바다 쓰레기들. 언뜻 봐도 거의 다 우리나라에서 밀려온 것이라 추측이 되는 컵라면 용기와 그야말로 종류도 다양하고 양도 엄청난 쓰레기들 말이다.

농약병도 있고, 습기 제거제 통도 있었다. 그걸 본 순간, 아리는 아름다운 야생만 만끽하다가 저도 저 쓰레기들처럼 어딘가에 처박힌 느낌이었다. 이런 깨끗한 야생에서도 어김없이 인간의 폭력이 침범해 있었다니.


그리고 이젠 떠날 시간.


“······.”

“많이 놀았나?”

“허헛 학생이 너무 재밌어 보여서 10분 더 기다렸지 말이야.”


노인들이 처음으로 아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런데 ‘학생’이라고 했다. 그 소리에 예쁜 해변에서 떠난다는 생각으로 시무룩했던 암울한 아홉수, 29세 여성인 손아리는 다시금 기분이 떠나갈 듯했다.


“젊은 게 확실히 좋긴 좋아? 우린 오늘 같은 날씨에는 무릎이 시려서 그렇게 못 뛰는데.”


할매 할배들이 서로 한마디씩 그리 주고받았다.

아니 그러니까 그건, 무릎이 시큰거린다는 이런 날씨를 잡아 여기까지 고집스레 온 할아바이들이 이상한 거라니까?

뭐, 어쨌거나 아리는 ‘학생’이라고 불린 것 하나만으로도 가슴에 날개가 돋친 듯 그저 좋아 헤헤거렸다.


그나저나 이 미우다의 바닷가에는 톰비라고 불리는 거대한 솔개들이 정발산에 무리 지어 사는 까치만큼이나 흔했다. 그런데 이놈들은 일행이 버스에서 내릴 때만 해도 하늘 저 위에서 빙빙 돌고 있을 뿐이었는데, 사람들이 조금 거닐다 보니 뭐라도 있는 줄 아는지. 이제는 아리의 머리 바로 위까지 까맣게 내려와 있었다. 무서웠다.


시마노 상이 아리를 부른 건 어쩌면 가야 할 시간이기도 하지만 그 솔개들 때문인지도 몰랐다. 날개를 활짝 펼치고 위협적으로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솔개들은 어림짐작으로도 2m는 족히 넘어 보이는 너비였다.


그런 놈들이 때로 달려들면 사람인들 어찌 못 할 것 같아 보여 아리는 슬슬 움츠러들었다. 만약 자신이 혼자서 이 해변을 누렸다면, 혹시 몇 시간 후엔 솔개들로 뒤덮인 변사체가 되어 있지는 않을까? 그런 무서운 상상이 현실처럼 떠오를 지경이었으니까.


인간을 노리는 건지, 인간이 지니고 있으리라, 혹은 줄 것이라 생각하는 먹을 것을 노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확실한 점은 지금도 머리 위에 가까이까지 내려와서 퍼덕퍼덕 거리는 놈들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아예 몇 놈은 땅에 내려와서 펄쩍거리며 일행 주변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땅딸막한 몸에 오른손을 떠는, 게다가 잘 보니 한쪽 눈까지 경련을 일으키듯 움찔움찔하는 시마노 상은 서둘러 노인들을 바다를 배경으로 짜라라 세우곤 기념사진을 몇 방 찍어주곤 재빨리 버스에 태웠다.


그 단체 사진에 아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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