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밝은 별의 서재.

그 섬

웹소설 > 작가연재 > 일반소설, 드라마

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1,917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4.26 12:23
조회
396
추천
6
글자
10쪽

눈물도 말라버린 이야기

DUMMY

대마도에 오게 된 이유는 모두 한 번도 해외여행을 해 본 적 없는 노인들이었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멀리 가 보기에는 다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형편이 그다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까운 일본이라면 일제시대의 교육을 받아 아직 기억하고 있는 말도 몇 마디 있기에 다른 나라보다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의견이 모였고 ‘뒷정리’도 다른 어느 나라보다 두루두루 수월할 것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세상을 위한 배려는 딱 거기까지였다.

모두 일생을 고생만 하며 살아왔던 탓에 이 사회에 대한 정은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은 노인들이었다.

그 때문에 자신들로 하여금 결국 타인들이 고생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훌훌 털고 가는 마당에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평생 처자식이다 남편이다 자식새끼다 시댁 식구다. 그렇게 남들 배려만 하고 뒷바라지만 하며 살아온 노인들에게 남은 마지막 이기심이었다.


‘우리는 뼈 빠져라 이 나라를 이렇게 발전시키기 위해 온 인생을 다 바쳤는데 나라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 주었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우릴 위해 누구 하나 눈물 한 방울 흘려 준 적 있었나? 손 한 번 내밀어 준 적 있던가?’


모두의 가슴에는 그렇게 서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그래서 이제는 세상천지에서 내가 하고 싶은 건 다하고 후련하게 가련다. 라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모였다.


하지만 문제는 뜻하지 않게도 손아리였다.

처음에는 아리 덕에 대마도행 배를 탈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을 뿐 덜렁덜렁 붙어 온 아리에게 별다른 생각은 역시나 없었다.

모두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길이었기에 타인에 대한 배려심 따위는 진즉에 버렸고 똘똘 뭉친 이기심만이 가득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우다 해수욕장을 시작으로 여기저기. 버스에서 내렸다 하면 그저 신나 하고 즐거워 뛰는 저 애기 ―노인들의 눈에는 29살의 아리도 그저 아기와 같았다― 가 나중에 크게 상처를 입을 생각을 하니 모두는 기분이 떨떠름했다.

결국 노인들의 추후일정은 저녁 식사시간에 이미 할아버지들끼리의 상의 하에 송두리째 바뀌어 있었다. 모든 결정을 내린 것은 할아버지들이었다. 그래서 모두는 이 밤을 빌어 분주하게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를 이렇게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노인들의 거사가 오늘이든 내일이든 어차피 아리의 여행은 이러나저러나 결국엔 엉망이 될 것이다. 그럴 바에는 먼저 맞는 매가 낫겠지. 하지만 이 궂은 날씨에도 망아지처럼 신나게 뛰놀던 아리 처녀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니, 역시 누구도 그 앞에서 몹쓸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의 계획과 약속은 이랬다.

버스 기사야 상처를 입든 말든. 이틀째의 코스인 대마도 최남단 쓰쓰자키 공원의 벼랑 끝에서 모두 손을 잡고 웃으며 하늘을 만끽하기로.

하지만 이젠 모두 변경되었다. 무슨 일이든 아리 처녀가 직접 보지 않도록. 또 어떻게든 늦게 발견이 되도록. 모두들 숨어서 일을 치르기로 했다. 그래서 일행은 제각각 마음에 드는 코스로 이동해서 각자 편한 방식으로 세상에의 울분을 주장하기로 했다.


노인들은 돋보기안경을 쓰고 지도를 더듬더듬 짚어 보며 각자 인생의 끝을 꽃피울 장소를 고르며 대화를 나누고, 최후의 육성을 남기기 위해 그 비좁은 스위트룸에 모여 밤을 지새웠다.


다음 녹음 차례는 전주에서 내려온 노부부였다.

나이 순서로 하자면 화성에서 내려온 부부가 먼저였지만, 그 부부는 이번 여행에 나름 ‘총무’를 맡은 상황인지라 뭔가 분주했다. 그래서 전주의 부부가 먼저 녹음기에 새 테이프를 갈아 끼운 후 준비해 온 글을 육성으로 남기는 작업을 진행했다.


「내 이름은 강종말입니다. 나이는 올해 일흔.

바깥양반은 김왕산이라 하고 올해 예순일곱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열 살에 일곱 살짜리 남편을 맞아들여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남들은 언제나 둘이 꼭 붙어 다니는 우리에게 백년해로하라며 늘 우리 부부를 부러워했지만, 그런 남들에게 웃어주는 나와 바깥 양반에게는 죽지 못해 살아야 했던 고생스러운 평생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자식이 셋이 있었는데 모두 아들이었습니다. 이 또한 다른 사람들은 부럽다고 난리였지요. 하지만 그 아들 셋, 우리에게는 열린 지옥의 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나서부터 소아마비였고, 둘째는 성격이 포악했고, 셋째는 둘째 때문에 제대로 자라 보지도 못했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출생 얼마 후 소아마비로 판정이 나서 열아홉 살 나이에 죽을 때까지 온전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죠. 하지만 열아홉 살에 세상을 뜰 땐 참혹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습이었지요.

둘째는 첫째와는 두 살 차이인데 바깥양반이 대폿집 과부를 건드려 낳은 후 들여온 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놈이 어느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제 형에게 솥 가득 끓인 폐기름을 천천히 부어서 죽였습니다. 눈에도, 코에도, 입속에도 끓는 기름을 부어서 튀겨 죽였다고 자기가 주장했습니다.

그 시기는 한참 모내기 철이었던지라 바깥양반과 나는 밭일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집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바깥양반이랑 나는 뭐라 말도 못 하고 서 있었어요. 그런데 둘째 놈은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며 스스로 여러 가지를 당당하게 털어놓았습니다.

“이딴 병신은 키워 뭐 하게!”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말이지요. “저놈은 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야! 저건 양육도 뭣도 아니야! 사육이지! 저대로 언제까지 살게 놔둘 건데! 제 손으로 치우지도 못 하는 똥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더 벌어먹여야 하는 건데!”

그것이 둘째가 열일곱 살에 저지른 살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놈의 살인은 그것이 이미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놈의 첫 번째 살인은 열두 살에 저질러졌고, 그 대상은 셋째 애였습니다.

그건 나는 짐작도 못 했던 일이었습니다. 셋째는 바깥양반의 노름빚 때문에 내가 두 달가량 바깥양반의 친구에게 팔려가 있는 동안 생겨서 낳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핏덩이가 무슨 죄라고, 둘째의 첫 번째 살인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둘째가 처음으로 사람을 죽였을 때. 녀석은 기껏 열두 살이었습니다.

당시에도 바깥양반과 나는 가난에 허덕이며 새벽부터 밤까지 밭일과 논일에 정신이 없었고, 어쩔 땐 시장에 나가 좌판을 깔기까지 했기 때문에 우린 둘 다 해가 떨어지고 깜깜해야 집에 돌아올 수 있었지요.

내가 불행한 과정으로 셋째를 낳은 후에야 바깥양반도 겨우 정신을 차려 그때는 정말 열심히 일에만 매달리며 놀음 따위 잊으려고 애를 쓰고 술도 끊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런데 7월의 어느 밤이던가? 나는 종일 굶었을 첫째와 둘째를 생각하니 피곤해도 밥은 해 먹여야겠다 싶어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솥에 보리밥을 안쳤습니다. 그리곤 잠시 옆집에 꾸었던 곡식을 갚으려고 보릿자루를 들고 다녀오는 사이에 그 일이 일어난 것이지요.

종일 업고 다니느라 너무 피곤했었죠. 그래서 나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 셋째를 부뚜막 구석에 포대기 채로 놓고 다녀왔어요. 그런데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더니 아기가 없었습니다.

아직 걸어 다니지도 못 하는 아이가 어디로 갔나. 좁다란 부엌을 아무리 뒤져도 아이가 없어서 그때부터는 정말 사방팔방을 찾았습니다.

어차피 부엌은 어디 숨을 곳도 없고 집도 초라하고 작았기에 만약 아이가 어디론가 기어가기라도 했다면 혹여 집 뒤의 뒷간에 빠진 건 아닌지. 뒷간 옆에 논두렁에라도 빠진 건 아닌지. 분주하게 집 밖을 뛰어다니며 찾았는데 도무지가 보이지가 않았던 겁니다.

결국 맥이 빠져 다시 부엌을 볼까 해서 집으로 돌아오는데, 그제야 부엌에서 뭔가 평소에 밥하는 냄새와는 다른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이기에 비로소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당장 눈으로 봐서는 뭐가 어떻게 달라지고 이상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아니, 어쩌면 그땐 이미 어떤 불길한 감이 뇌리에 스쳤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애써 눈을 돌리려 하지 않았어요.

가마솥에는······.」

“······.”


종말 할머니는 거기까지 원고를 읽고는 잠시 녹음기를 껐다. 그리곤 음료수를 마시기 위해 할아버지들이 이것저것 담아온 100엔샵 비닐봉지를 뒤적거렸다.

그러자 일행은 가슴 한가득 꾹 참은 숨을 몰래 토하며 서로 눈치를 보았고 남편인 김왕산 할아버지는 담배를 움켜쥐곤 잠시 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신음을 흘리며 턱을 문지르던 화성의 고준대 할아버지도 이윽고 자신의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끔찍한 이야기가 이어지는데도 정작 당사자인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슬퍼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일이 일어났었는데도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혹은 소설책을 읽듯. 돌처럼 굳은 무표정한 얼굴은 변화가 없었다.


역시나 눈물도 말라 버린 것인지, 이젠 그 애들을 따라갈 마당이라 슬퍼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는 건지. 종말 할머니는 시종일관 건조한 얼굴과 목소리로 원고를 읽었고, 지금도 단지 입이 건조해 잠시 음료수를 마실 뿐이었다. 그리곤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 작성자
    Lv.42 myco
    작성일
    15.06.17 16:54
    No. 1

    나이 소개에서 이른 - > 일흔 오타 아닌가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Personacon 밝은스텔라
    작성일
    15.07.08 01:15
    No. 2

    헛; 댓을 지금 발견했습니다. OTL 지적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말씀대로 오타를 친 것 같아요. 지금 고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 드립니다. ^^

    찬성: 0 | 반대: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그 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26 곤드레만드레 외국인 여자 15.04.28 312 6 12쪽
25 손아리와 무로이의 만남 15.04.27 183 7 15쪽
24 무로이의 첫 취조 +2 15.04.27 228 8 11쪽
23 시마노 부인의 가택사(死) 15.04.27 165 6 9쪽
22 損あり(손아리 = 손해있음) 라…. +2 15.04.27 260 6 12쪽
21 손아리는 안전하다 +2 15.04.27 253 6 17쪽
20 번개가 내리칠 것 같다 15.04.26 244 7 14쪽
19 무로이의 불길한 예감 15.04.26 199 6 13쪽
18 무로이 관리관 15.04.26 400 5 16쪽
17 돈 때문에 사람은 추해지고… 15.04.26 299 6 17쪽
16 “이 여행은 자살 여행이라고!” +2 15.04.26 420 6 14쪽
15 혐한(嫌韓) 택시기사 혼마 이야기 15.04.26 303 6 15쪽
14 영 찝찝해 15.04.26 314 8 10쪽
13 기묘한 꿈 15.04.26 392 6 13쪽
12 노인들의 한(恨) 15.04.26 340 8 10쪽
11 영원히 구천을 떠돌게 내비둬야 혀 +4 15.04.26 366 7 15쪽
» 눈물도 말라버린 이야기 +2 15.04.26 397 6 10쪽
9 <늙으면 죽어야지> 카페 +4 15.04.26 397 6 13쪽
8 비바람 몰아치는 대마도의 밤 +2 15.04.26 387 7 13쪽
7 손아리의 순수한 빛 15.04.26 371 9 11쪽
6 대마도와 부산은 가깝다 15.04.26 268 9 9쪽
5 톰비(솔개) 15.04.26 390 8 9쪽
4 개뿔이 블랙 펄 호 +4 15.04.25 374 8 8쪽
3 저렴한 여행 상품 +2 15.04.25 580 10 7쪽
2 타로카드 +6 15.04.25 610 11 11쪽
1 그 섬 +8 15.04.25 1,142 18 10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