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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별의 서재.

그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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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밝은스텔라
작품등록일 :
2015.04.25 23:34
최근연재일 :
2015.05.14 17:49
연재수 :
56 회
조회수 :
21,922
추천수 :
459
글자수 :
318,833

작성
15.04.26 13:20
조회
340
추천
8
글자
10쪽

노인들의 한(恨)

DUMMY

“······.”

“······.”


밖에는 여전히 거친 비바람 소리가 윙윙 요란하고 비좁은 스위트룸에는 무겁고 후덥지근한 침묵만이 숨 막히게 깔려 있었다.

어쩐지 순서가 좀 잘못 된 것 같았다. 다른 노인들도 제 각자 참을 수 없는 불행과 노여움을 원고로 써서 녹음하기 위해 가져왔건만 강종말 할머니와 김왕산 할아버지의 사연은 너무 큰 마침표를 찍어버린 것만 같았다.


이곳 대마도에 오기 전에 사람을 죽이고 온 건 사실 종말 할머니 부부만이 아니었다. 진주에서 온 윤개년 할머니도 시동생을 죽이고 왔다. 화성에서 온 부부도 망나니 자식을 처리하고 왔다.

정말 참다 참다 못 해 썩은 세상을 정리하고 온 것이다. 노인들의 경우, ‘오죽하면 그랬으랴.’ 는 세상 사람들이 짐작 가능한 정도가 아니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심한 고통과 절망이 노인들을 살인과 자살로 몰아가는 것이다.


이 세상은 노인들의 일생을 피를 빨아먹듯 빨아먹고 자라왔다. 전쟁과 가난의 흔적이 이젠 보이지도 않을 만치 발전한 대한민국. 그 대한민국이 이 노인들을 빨아먹고 이만큼 컸다.

젊은 아이들은 이제 끼니 걱정 하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통금시간도 없어 마음껏 쾌락의 밤을 즐기고, 오냐오냐 풀어 키운 탓에 못 배운 예의범절 탓에 중학생들도 이젠 노인들을 보며 삿대질하고 놀려대기를 밥 먹듯 하는 대한민국.

노파심으로 몇 마디 옛날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면 수구꼴통이나 틀딱이라며 단박에 등을 돌리고 소외시켜 버리거나 인간 이하로 취급해 버리는 대한민국에서 이제 노인들은 쓰이고 버려지는 시기였다.


그들은 평생 손발이 닳도록 키워온 자식들과 손자들에게 냄새나고 추한 수구꼴통 노망난 틀딱 노친네 취급을 받으며 살 떨리는 고독 속에 방치되었다. 이제 아무도 노인들의 일생을 건 삶의 투쟁과 노력을 인정해 주지 않았고, 오히려 목숨 다 바쳐 키워놨더니 이젠 주먹질에 발길질까지 하며 홀대하는 자식과 이 나라.


노인들은 진절머리가 났다.

무엇을 위한 삶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가정을 위해 평생을 봉사하고 헌신했었는지. 누가 좀 시원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쳐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구도 외로운 노인들의 상대를 해 주지 않았다. 좀 친절하게 다가와 싹싹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주는가 싶어 기뻐했더니 보일러 사기꾼들이나 건강식품 사기꾼들이었다.

그래. 요즘 세상에 누가 노인네들에게 친절하겠어? 말 한마디 건넸다가 열 마디가 돌아올까 두려워 모두는 노인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마을버스에서 학생 옆에 타면 노인 냄새가 싫다고 노골적으로 코를 막고 눈을 찌푸리고 일어서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버린다.

시큰거리는 무릎으로 버스에서 조심스럽게 내릴 참이면 버스 기사들은 움직이지도 못 하는 노친네가 얌전히 집구석에나 처박혀 있지 뭐 한다고 싸돌아다니느냐며 꾸물댄다고 온갖 욕을 다 하며 신경질을 부리고, 두 발이 다 땅을 디디지도 못했건만 서둘러 버스를 출발시켰다.

젊은 아기엄마가 안고 있는 아기가 예뻐서 좀 만져보려고 주름진 손을 뻗어보면 독뱀이라도 본 양 펄쩍 뛰며 잽싸게 도망쳐 버리는 이 시대에 누가 노인들을 상대해 주겠는가.

거기다가 치매라도 걸려봐. 벽에 똥칠이라도 해 봐. 누가 노인들을 사람 취급해 주겠는가. 모두 말을 안 할 뿐이지 그런 노인 따위 살처분해서 소나 돼지처럼 대충 구덩이에 묻어버리고 싶은 것 아닌가?

노인들은 이렇게 편하고 발전한, 세상 만방에 자랑스럽게 코리아라고 외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제 힘이 빠지고 머리가 빠지고 이가 빠졌다. 그리고 버려졌다.

무슨 재미로, 무슨 희망으로 더 살아가야 하나. 더 살아 뭣 하는가. 무슨 욕을 더 보라고. 이 저주 받을 세상!


시간은 밤 11시 반이 지나가고 있었다. 노인들은 그대로 밤을 지새울 참이니 시간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아리에게도 그럴까? 그때 아리는 이제 막 머리를 좀 말리고 잠에 빠져들어 별스러운 꿈을 꾸는 시간이었다.


악몽까지는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썩 즐거운 꿈도 아니었다.

꿈속에서 아리는,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먹구름이 웅장하게 펼쳐진 대마도의 하늘에 먹구름과 함께 노인들의 얼마 남지도 않은 백발이 힘차게 바람에 붙들려 춤을 추는 걸 멍하니 보고 있다.


짧은 백색 모발은 깃발처럼 휘날렸다. 아니, 노인들의 짧았던 흰머리가 깃발처럼 휘날릴 만치 어느새 길어져 있었다. 하지만 아리는 그 놀라운 모습을 보고도 신기하게도 놀랍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노인들의 백발은 점점 길어져 이제 허리 아래로까지 늘어져 바닷바람에 미친 듯이 너울거리는데도 아리는 그저 태연한 얼굴로 노인들의 뒤에 서서 그런 모습을 바라보았다.


꿈이 좀 이상했다. 바닷가 벼랑 위인지라 당연히 들려야 할 파도 소리도 들리지 않고, 훅훅 휘몰아치는 바람이 장난이 아닌데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회잿빛의 세상. 그곳에 선 백발노인들의 뒷모습. 노인들도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서 지켜보는 아리의 눈에 노인들은 모두 소리 없는 웃음을 깔깔깔 웃는 것처럼 즐거워 보였다. 소리가 전혀 나지 않는데도 웃음소리가 시끄럽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노인들은 모두 웃고 있었고, 모두 기쁘고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가 얼마나 지났을까? 바람이 약하게 부는 것도 아닌데 노인들의 정신없이 출렁이던 백발의 춤이 아주 느릿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우주유영을 하는 우주인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백색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 내리지도 않는 빗물에 씻긴 듯. 무거운 물방울을 머금고 공간을 천천히 쓰다듬고 있는 그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다.

어두컴컴한 먹구름 아래에서, 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올라탄 이슬 같은 물방울은 묘하게도 은은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또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공기가 멈춘 듯했다. 바람이 멎었다. 노인들의 머리카락도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더니 저 바다 멀리의 먹구름 하늘에서 소리 없이 번개가 꿈틀꿈틀 몇 번 지나가는 것이 보였고, 이윽고 쏴—!! 하며 천지를 꿰뚫을 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늘에서 투창 같은 빗줄기가 강렬하게 내리꽂히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도 심장이 멎을 듯 놀란 아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노인들에게 버스로 돌아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빗소리는 나는데 자신의 비명소리와 목소리는 진공상태를 가르듯 전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말도 안 돼!” 하고 놀라고 있으려니, 이번에는 오장육부 구석구석까지 스며들어 오는 진동이 있었다. 그렇게 천둥번개 소리가 귀를 찢은 듯했고 일순 눈을 멀게 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아리의 목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그리고 노인들도 여전히 벼랑 끝의 난간에 일렬로 선 체 전혀 움직이지도 않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빨리 버스로 돌아가자고요!”


아무리 외쳐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아리는 노인들에게 달려가 그들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헉?! 옷자락을 잡아당기자 갑자기 허공에서 비를 맞아 축 늘어진 옷만 허무하게 따라 왔다. 어? 하고 다시 노인들을 향해 눈을 돌리니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다시 손을 보니 분명 움켜쥐었던 옷도 없어졌다.

뭐지? 뭐지? 놀란 아리는 ‘뭐지?!’ 하고 다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는 모두를 태우고 온, 그리고 모두를 태우고 갈 미니버스도 사라지고 없었다.


“······.”


맙소사······. 라고 입은 오물거렸지만, 역시나 자신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그저 화살처럼 두두두 내리꽂히는 빗줄기에 이젠 온몸이 다 아플 지경이다. 아리는 어디 비를 피할 곳도 없고 딱 울고 싶어지는 시점이었다. 아니, 딱 울어야 할 시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뜨기도 힘들 정도로 강렬한 빗줄기를 맞으며 우두커니 서서 노인들이 사라진 자리를 망연자실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아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건 어쩐지 남자의 손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처음에는 그 또한 빗줄기가 두드리는 감각이라고 느꼈다. 그러다가 뒤늦게 따뜻한 사람의 체온이 느껴져 화들짝! 그 누군가를 향해 후다닥 뒤를 돌아보았다.


“어······. 어?”


하지만 뒤를 돌아보자마자 갑자기 사방이 까매졌다.

잠이 깬 것이었다. 하지만 얼른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아리는 멍하니 컴컴한 천정을 응시할 뿐이었다.

아리는 귀로는 바깥에서 험하게 윙윙대는 바람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잔뜩 온도를 높여둔 온풍기 바람에 말리려고 걸어둔 옷이 천천히 흔들거리는 모습을 어둠 속에서 올려다보며 입만 뻐끔거리고 있었다.

딱히 악몽도 아니었고 가위에 눌린 것도 아니건만 어쩐지 모르게 그냥 눈이 떠졌고 양 눈꼬리에선 가느다랗게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뭐였지?’


아리는 부스럭부스럭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바람 소리 외에는 고요하기만 한 호텔의 비좁은 2인실을 휘 둘러보았다.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설레며 온 여행인데 왜 갑자기 자신의 일산 방이 그리워지는 걸까? 왜 이렇게 갑자기 잠자리에 서먹한 기분이 드는 걸까? 왜 흘렀는지 알 수 없는 눈물을 땀 닦듯 닦으며 아리는 구식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보았다.


새벽 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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