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
[이 이야기는 손아리와 무로이 신지의 과거를 회상하며 쓰는 이야기이다.]
2007년 2월 마지막 주.
29세 손아리는 게으른 하품을 하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 날은 아르바이트를 다니는 인사동의 모 대형 상가 건물이 전체적으로 전기 보수공사를 하느라 하루 쉬게 된 날이었다.
보수공사와 무관히 장사하는 집들이 대부분이지만, 티베트나 네팔의 고미술품 등을 다루는 [TARA]의 사장님은 좀 괴짜이신지라, 마치 좋은 핑곗거리를 만나 보충수업을 빠트려 먹는 고등학생처럼 즐겁게 휴무를 천명했다. 그래서 아리는 눈곱을 떼며 컴퓨터 화면 구석에 뜬 PM 12:03라는 숫자를 노려보며 하루의 첫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장소는 일산동구 의 마두동, 마두역 부근의 작은 평수 아파트 7층이었다.
현재 가족구성은 올가을이면 스물넷이 되는 여동생 손아라 뿐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부모님과 넷이서 좁아터진 집에서 뭉개고 살았는데, 작년 가을에 이제 노후를 즐기고 싶으시다며 부모님은 아버지의 고향인 진주로 내려가셨다.
그래서 지금은 동생과 단둘이 이제야 공간상의 여유를 만끽하며 지내게 되었다. 문제는, 둘이 남게 되자 잘나신 동생의 구박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것이었다.
마두역에 인근 한 통신사에서 승승장구 잘 나가는 동생은 수입도 안정적이고 키도 크고 몸매도 모델 몸매에 얼굴은 영화배우였다. 애인도 많고 소형이지만 최신 인기차종으로 자가용도 몰고 다녔다. 그야말로 우성 DNA의 독점인 것이었다.
그에 비해 6살 위의 언니인 아리는 몇 년 전에 모 편의점 사업부를 뛰쳐나온 이후로는 이렇다 할 정규직도 얻지 못하고 지금껏 아르바트에서 아르바이트로 전전긍긍하며 시집도 안(못) 가고 있으니, 잘 난 동생 입장에서는 똥차도 그런 똥차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동생은 언니와 눈만 마주치면 거의 노인학대 급으로 구박하고 지랄이었다.
‘싸가지 없는 년.’
아리는 모니터에 붙어 있는 형광색 포스트잍의 「오늘은 집에서 저녁 먹을 거니까 밥 좀 차려놔」를 동생의 면짝이라 생각하며 한 손으로 꾸깃꾸깃 구겨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곤 팍 잡친 기분으로 아리는 간만에 기분전환을 위해 <허은정의 블로그>를 펼쳤다.
인간은 왜 나이를 먹어야 하냐며 작년까지는 맨정신일 때가 드물던 그 인간의 블로그. 구정 설날을 살아서 잘 맞았나 모르겠다.
작년만 해도 배우 「장민성 신당」이다 「만월의 그림자」다, 제법 아기자기하게 볼 게 많았던 그녀의 블로그는 올해 들어서는 갑자기 몇몇 카테고리들이 비공개화 되면서 많이 심심해졌다.
다채로워진 건 배경음악이 몇 곡 더 늘어 있다는 점뿐. 연재하던 개똥 같은 창작소설이나 팬픽들은 모두 비공개로 돌리고 장민성 신당도 비공개로 돌렸다. 대체 그 인간, 요즘은 뭐 하고 사는지 안 그래도 슬슬 궁금해지는 시기였다.
아리가 허은정을 알게 된 건 4년 전인 2003년이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마음 정리나 할 겸 일본여행을 계획하던 중에 알게 되었다.
처음 만난 날, 아리와 은정은 마두 도서관의 해외여행 자료 코너의 일본여행 카테고리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서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가 남들 다 일하고 있을 평일 오후의 한적한 도서관에 나란히 서서 일본여행 관련 책자를 집요하게 뒤척이던 40여 분.
아리가 본 책을 은정이보고, 은정이 빌리려고 쌓아둔 책을 아리가 손을 뻗어 뒤적거리면서 운명의 고리가 연결되어 버렸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허은정이었다.
“거기 신주쿠 쿄엔은 은근 볼 거 없던데요. 입장료 비싸고 입장 시간도 제한되어 있고 내부에는 딱히 먹을 곳도 없고요. 입구에 먹을 곳이 있긴 한데 쓸데없이 다 비싸요. 차라리 거기보단 이노카시라 공원이 볼 만 했어요. 거기가 벚꽃도 더 끝내줘요.”
은정으로선 나름 아리를 신경 써 준건데 아리는 괜히 남이 이러쿵저러쿵하니 기분만 나빠졌다. 그리곤 “저 도쿄 갈 거 아니거든요?” 하고 살짝 쏘아주었었다.
그렇게 알게 된 <허은정의 블로그>를 펼친 아리는 스피커 볼륨을 높여 블로그에 걸린 ‘몇 물 간 노래’ —팝이든 가요든 최신곡은 없었다. 카사블랑카까지 나왔다!— 를 따라 흥얼댔다. 그리곤 조간신문을 살피듯 그녀의 블로그를 살폈다.
올해 초에 국민배우로 유명한 그 장민성을 매형이라 부르게 된 그녀는 그 매형에게 선물 받았다는 고급 만년필로 자신만의 우주적(?) 철학을 끼적댄 걸 사진으로 찍어 올려놓았다.
그 엉망진창 내용 중에는 그녀가 작년 봄에 다녀온 대마도에 대한 언급도 몇 줄 보여, 아리는 급히 흥미가 동했다. 그리곤 자세히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잘 난 고급 만년필이 끼적댄 대마도란······.
<대마도. 볼 거 하나도 없는 그것이 지구. 오히려 볼 게 없어서 풍부했던 여행!>
* 부제 : 2시간을 똥물까지 토하게 한 대한해협 동맥경화 포세이돈 개새끼! 아아, 대마도! 차들은 죄다 뒤로 세 번 당겼다 놓는 딱정벌레에 사람 보기도 힘들고 떠돌이 짐승 새끼도 없음.
<너를 잊고 싶다면 가라. 가서 지구가 무엇인지 배우고 오라!>
등등이 알록달록한 색과 들쑥날쑥한 크기로 산만하게 쓰여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언니, 그런 일이 있었지.’
아리는 그리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면서, 허은정에 대해서는 그녀가 시시콜콜 까발려둔 블로그 때문에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의 이제 문제의 대마도 관련 포스팅들을 자세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 2시.
아리는 지난밤에 먹고 남긴 치킨 두 조각을 오래되어 누렇게 뜬 밥의 반찬 삼아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고 허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이 인간. 요즘도 통화 기피증인가?' 길어지는 신호음에 슬슬 인내력이 바닥을 칠 즈음에야 겨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 개미네. ―아리는 일본어로 ‘개미’라는 뜻으로, 일본 관련으로 알게 된 기념이라며 허은정이 멋대로 지어버린 별명이었다―”
“전화 좀 빨리 받아라!”
“설거지 중이었어.”
“언닌 내 전화 받을 때마다 설거지 중이냐?”
“누구 전화를 받아도 난 늘 설거지 중인 거야.”
‘역시 강력하다 이 인간!’
“됐고, 언니. 3월 중반쯤에 나 대신 ‘타라’ 좀 뛰어라.”
“어? 거긴 왜?”
사실 인사동의 TARA라는 밀교 관련 고미술품점은 본래 은정의 아르바이트 일터였다.
그런데 몇 년 전 그녀가 갑자기 소설 집필을 해야겠다며 일을 관둘 때, 마침 백수 상태였던 아리를 그곳 사장님께 소개를 해줘서 지금은 아리의 일터가 된 것이었다. 그러니만큼 <타라>는 은정에게 전혀 낯선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밀교 관련이나 고미술품 관련의 안목은 오히려 아리 보다는 은정이 더 밝았다. 그러니 대타로 자리를 채우는 데에는 지금으로선 허은정 외의 인물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뭐? 여행?”
“어. 그때쯤이면 사장님도 물건 떼러 보름간 네팔에 다녀오실 계획이라는데 나도 그때 맞춰서 좀 나갔다 오고 싶어서. 별일 없으면 언니야. 너 보름 동안 타라 좀 뛰어라. 사장님한테는 내가 말 해 둘게.”
그러자 은정은 잠시 뭔가를 궁리하는지 조용해졌다.
“어이, 늙은이. 듣고 계시냐?”
“꼬박꼬박 언니라고 하란 말이다. 이 싸가지 없는 늙은이.”
지금 누가 누구더러 늙은이래.
“달력 보는 척하지 마. 한가한 거 알고 있으니까.”
“한가하다니! 그건 작가를 모독하는 발언이야. 정중한 사죄를 요구한다. 작가에겐 취침까지도 엄연한 업무라고!”
“됐고, 보름이야. 괜찮지?”
“정확하게 날짜가 정해지거든 다시 연락해.”
“왜? 이번 3월 중에 언니 너님 시집갈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사도 없을 테고 해외여행은 물론 못 갈 거면서.”
그러자 은정은 그치. 그치. 하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괜히 달력을 뒤적거렸다.
“부활절 전후로 매형(장민성)의 라이트한 촬영분이 끝나. 그거 끝나면 4월 넘겨서 언제 날 잡고 자기 가족이랑 2박 3일로 어디 놀러 가자고 했거든. 캬캬! 숙식 해결해 준데. 교통비만 내라고. 그러니 아마 해외일 거야. 하와이면 좋겠다!”
그 말에 아리는 질투로 눈이 튀어나올 뻔했다.
‘뭔 놈의 백수 주제에 저렇게 운이 좋아.’
글 쓴답시고 팽팽 놀면서 부모님 등골 빼먹으면서도 살아지는 데다가, 작년 겨울엔 무려 국민배우 장민성 님의 처남(?)이 된 거야.
‘아놔 짜증 나.’
아리는 거울 속에서 질투로 구겨지는 자신의 무서운 얼굴에 화들짝 놀라며 한숨을 토했다.
“좋겠다. 암튼 부활절이라는 게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사장님은 3월 14일에 출발 예정이셔.”
“보름이라고 했지?”
“어.”
“좋아. 콜.”
“어라? 꽤나 고민하는 것 같던데 금방 결정하는 거야?”
아리는 속으로 ‘빌어먹을 년. 어차피 여행 교통비 벌려면 돈 벌어야 할 것 아니야. 절호의 찬스를 내가 은혜로이 베풀어 주는 건데 뜸 들이고 자빠졌어!’ 라고 짜증을 토했다.
“손아리.”
“왜.”
“너 지금 나한테 ‘존나 재수 없는 년’이라는 파장 보내지 않았냐?”
‘젠장! 사이비 무당 같으니라고!’
아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허은정은 피식피식 웃었다.
“아무튼, 이번에 보름 대타 뛰어서 돈 벌거든 잘 챙겨놨다가 너 시집갈 때 제일 싼 중국산 다리미 사 줄게. 두어 번 쓰면 폭발하는 거로.”
“웃기지 말고 국산이나 독일제 스팀다리미를 부탁한다. 늙은이.”
“킥킥. 아무튼 접수했다. 사장님께 말씀 잘 드려놓도록. 참, 요즘은 새로 들인 물건들 뭐 뭐 있냐?”
그러자 아리는 꾹 참았던 숨을 토했다. 역시 이런 이야기는 만나서 나누는 게 맞는 것 같다.
“언니야. 그냥 좀 있다가 마두 도서관 나와라. 아무래도 오래간만에 나 할 말이 많다.”
“오! 뭔데, 커피 사 줄 거지?”
“어우 거지. 사줄게. 그러니까 나올 때 너님 타로카드 좀 들고나와.”
“오호라? 새 남자가 생긴 거냐? 사랑의 고민이냐?”
“닥치고. 이따 3시 반에 보자. 1층 현관 벤치.”
“싫어. 거기 추워. 2층 열람실로 와.”
“콜.”
- 작가의말
많이 늦었지만 참여에 의의를 두고 공모전에 도전해 봅니다.
옆 동네의 공모전 + 베스트 + 그리고 이것.
동시 3연재 2공모네요.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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