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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0 01:20
최근연재일 :
2021.11.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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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4.14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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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48. 1133이 진 자리

DUMMY

피고 지고 피고 지고

나만은 영원하리라 나도 모르게

그러나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차례는 누가 정하지? 주현아?


사람이 시뻘건 얼굴로 이를 악물고,

눈의 핏발과 살기로 사방을 물들이고,


정치사상을 끝까지 잃지 않으며 분노의 눈으로 쏘고 찌르고.... 그럴 줄 알았다.


하기는 하지만 그런 종류가 아니다. 거창한 이념보다는 살고자 강철과 기계를 든다. 그럴 거라고 믿는 경향은 이 땅이 강하지. 국가 자체가 반 정신병인 경우는 고대에 흔했으나, 현대에는 북한이 명맥을 유지한다. 정신. 총폭탄정신. 사상. 이념. 결국, 그렇지 않았던 일은 역사 전쟁사 어디나 존재한다. 정신적으로 가장 강한 사람들이 항복하고 전향했다. 정체도 불투명한 강함을 지나치게 내세운 국뽕 군대는 무너질 때도 강하다. 진짜 강한 군대는 어떤 시련에도 조용히 자기 맡은 바를 하는 군대다.


넓어진 군복.

끈이 남아돌아 발목에 돌려 묶은 끈.

한복을 입은 것처럼 훌렁한 천 속에서 손이 부들거린다.


두 사람은 주먹을 불끈 쥘 힘도 약해졌다. 기력이 떨어지면 눈과 표정에 힘을 쓸 가치가 없다. 뭘 하든 가만히 있게 된다. 힘을 아낀다. 감정도 강한 에너지다. 쓸 대만 딱 쓰고 다시 가만히... 가만히...


정신은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컨트롤이다. 힘이 없으면 자꾸 가만히 있고 싶고, 가만히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앉게 되고, 앉으면 눕고, 그러다 아무도 모르게 잠이 들고, 죽을 수도 있다.


포기가 가장 무서운 적. 오지에 조난된 사람 중에서 많은 수가 가지런히 누워 (미소마저 지으며) 죽은 사람들 꽤 많다. 포기한 것이다. 고난과 싸우느니 죽음을 택했다. 그렇게 죽은 사람은 외상도 거의 없이 깨끗하게 간다.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면 격렬함 없이 조용히도 간다. 그러므로,

살고 싶으면 계속 가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로 가든 가는 거다.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순서는 없는 것 같다.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먼저 떠나네.

그 ‘아무도 모르게’가 진짜로 사람을 분노케 한다.

‘너희가 날 알아? 알게 해주고 떠나주마.’


삶의 마지막에 진심은 간단한 것 : 살고 싶다...


이 생각하는 몸뚱이가 유지되고 싶다. 신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다. 죽으면 이 생각하는 물체가,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다 사라진다. 뼈만 남아 지워지고 - 내가 이런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군인은 ‘나’를 느끼지 못하도록 단체로 내모는 심리정책. 각자가 아닌 단체를 위해 살도록 세뇌한다. 군대 체계 안에서 사고(思考)가 굴러가도록 강제한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길은 일방통행, 다른 갈래 길이 없다. 조금만 생각하면 방법이 있음에도 병사들이 자살하는걸, 밖에서는 이해 못 한다.


무경험자가 보면 얼핏 사소한 것으로 자살한다고 생각하나, 그 사소한 것이 병사의 일상을 지배하는 모든 것이었다.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사고가 바뀐 것이다. 탈영은 더러운 놈이지만, 군대 다수는 탈영을 엄청 무서워한다. 어쩌면 탈영이 ‘정상적인 사고로’ 도망간 놈이다.


‘무슨 생각을 하면 죽었을까?’


아무리 그래도 죽을 때, 죽기 직전에 의문은 들 수 있다. 나는 무엇인가. 그것조차 없도록 완전히 뇌를 삭제한 군국주의 국가와 군대. 있지. 이 고정관념의 가치화는 반복의 시간이 길어야 강해진다. 2년, 4년 반, 6년, 7년, 10년...


그 와중에, 거창한 것보다 전우를 위해 죽으려는 생각은 있었다.


군인의 죽음은 전사와 자살 두 가지밖에 없다


“찍어보십쇼.”

문경주는 GPS를 꺼내 누른다.


저 건너편 봉우리를 바라보는 시큰둥한 눈.


‘여길 다시 돌아오다니.’


둘은 20분 넘게 관측하다 고개를 땅에 박는다.


‘이거 욕심 아냐?’


판단이 불가하다. 언젠가부터 보병 같은 북한군이 사라지고, 예민하고 고도화된 놈들이 대체되어 나타난다. 부대 모른다. 그런데 동종의 이미지가 보인다. 은밀. 정숙. 습격. 퇴출. 은거. 매복. 대-매복 같은 걸 훈련받은 상대들. 어제와 같은 산인데 무엇이 숨어 있다. 어디 숨어 있는지 가봐야 안다. 사소한 것까지 서로 감추는 경쟁. 북한의 수목이 이토록 적은 것이 위안이 될 줄이야.


“어때?”


둘은 서로를 보며 입맛을 다신다. 둘은 풍경이 아니라 산이 품고 있는 생명체를 관측하려 한다. 밤이 되면 모를까, 낮에는 더 이상 모르겠다. 우리나라 군대처럼 비닐 주머니에 주먹밥이나 전투식량을 지어오지도 않는다. 현재 산악에 돌출하는 인간들은 간단한 군장으로 적어도 3일은 재보급 없이 추격할 능력이 있다. 경보병 출신이 강연회를 왔을 때 놀랐다.


‘아무것도 덮지 않고 그냥 잔다. 그렇게 잘 수 있다.’


침낭은 고사하고라도 판초도 없이? 질문에 그는 답했다.


‘비 맞고도 그냥 잡니다. 그냥 피곤해서. 너무 피곤해서.’


그런 부대들이 여기 있다면 아무 징후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런 상대를 캐치하려면 주야간이 교차하는 시간이 될 것이고, 밤이 되면 그 병력은 비슷한 위치에서 아침까지 매복으로 전환된다.


하늘, 시계. 눈 맞춤.

저 위에 빛은 남아 있으나, 아래 계곡은 그늘이 빨리 지기 시작한다.


“해보자.”


둘은 보다 도전적으로 나선다. 쉬고 싶고 눕고 싶고 그러다 포기한다. 의도가 있으면 해봐야 한다. 군장 은익 지점이 발각되어 누가 있다는 가정 아래, 주변을 돈다. 징후를 찾기 위해 주변을 맴돌며 무엇이라도 보려 한다.


그러다 문득.

물. 물가.


‘아, 잘못 들어왔다. 여기, 물 떴을 자리.’


성지연도 알아차렸다.

문경주의 손가락.


‘저 바위 속으로 들어가서 대기.’


졸 졸 졸 졸 물소리.

적어도 위안은 주는 새 한 마리. 짹 짹 짹.


둘은 조용히 물가의 바위로 속으로 들어가며 자기 형상을 지우고, 천천히 자연과 하나가 되려 노력하면서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찾는다. 등에 닿는 차가운 바위. 위험한 곳에 내려왔다. 며칠 전이었는지 기억이 모호하다.


‘장소가 너무 안 좋아.’


이래서 눈으로 보는 지형과 가서 보는 지형이 다르다.


어느새 까칠과 띠따가 물을 뜨러 내려왔던 부근.


아닐 리가 없다. 큰 산속에서 움직일 때는 주기적으로 참고점을 봐야 방향을 안 잃는다. 같은 지형에서 빙빙 도는 일이 큰 산에서 놀랍게도 발생한다. ‘내가 독도법이라면 그래도 좀’ 장담하던 사람도 내륙전술훈련 깊은 고산에서 충격적으로 길과 방향을 잃는다. 한번 깊은 산에서 방향을 잃으면 나침반을 봐도 헛일이다. 나침반은 항상 ‘이동한 자리에서 보는 각도’이므로.


졸 졸 졸 졸.

소리. 징후.


잠시 후, 문경주가 바위 속에서 고개를 내밀고 다시 이동을 시작한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 어서. 자리가 너무 트였다. 발길에 자갈이 채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봉우리 반대편으로 - 물을 건너 숨으려 한다.


그늘이 더욱 짙어졌다.

성지연이 10m를 벌려 따라간다.


‘정지.’


문의 수기에 성지연이 자연스레 몸을 180도 돌려 후방을 본다.


‘뭐지? 이 얼룩? 흠흠. 피 아냐?’


문경주가 손가락으로 문지른 다음 냄새를 맡는다.


‘일루와 봐.’


그 손가락을 성지연의 코에 가져다 댄다. 거의 말랐지만 냄새가 있다. 소금에 절인 고기가 부패하는 냄새?


자리 얼룩은 크다. 그리고 유기체의 조각들이 거기 묻어나고 흩어져 있다.


문이 바위 그늘로 들어가 쪼그려 앉아 주먹을 턱에 대고 생각에 잠긴다. 그러다 손을 내려 K-7 스위치를 더듬고 원위치. 다시 생각...


“후...”


천천히 지형을 스캔한다. 서 있는 성지연도 똑같은 행동. 들려야 하지만 졸졸거리는 물소리가 귀에서 사라졌다. 물소리는 됐고, 다른 걸 보거나 듣고 싶어 집중한다.


거대한 허파같이 숨 쉬는 숲. 자연. 다만 나무들이 시원찮다. 어지간한 건 사민(민간인)들이 와서 손대나보다. 문이 높은 곳을 지시한다.


‘저기가 우리 있던 위치.’


바로 아래 땅을 찍는다.


‘여기서 교전.’


성지연을 본다.


‘그럼 어디로?’


성지연이 그 봉우리 반대편 계곡을 찍는다. 문이 고개를 끄덕이고, 저리로 가보자 손짓. 성은 높은 곳을 올려보며 새소리를 확인한다.


짹짹짹. 까르륵 까르륵.

물은 나중에 뜨기로 했다. 소리가 출렁거릴 것 같다.


둘이 이 자연의 주인공이 된 듯. 무수한 벌레와 동물과 기타 등등이 새로 등장한 주인공을 본다. 일상의 리듬을 깨고 등장한 동물체 둘. 원하는 것이 뭘까. 하여간 저 종류 생명체는 위험하다. 저 종류의 생명체에 대항할 수 있는 건 동종의 그런 놈들밖에 없다.


다시 이동.


문경주가 상향길 수풀이 덥수룩한 곳으로 오르기 시작하면서 성지연에게 손가락으로 귀를 지시한다.


‘소리 잘 들어.’


박진 중사가 얘기를 못 한 이유가 있다.

백주현이 어떻게 됐는지 박진도 모르는 거다.


물가에서 물을 뜨다 적과 마주쳤을 때, 둘은 순간적으로 서로 등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고, 추정컨대 백주현은 물가를 벗어나기 전에 총알에 맞았다. 수류탄 파편에 맞았든... 모르는 거다. 올라온 박진의 총열이 따뜻했던 것은, 어느 순간 도망치던 까칠 박진이 돌아서 사격을 시작한 것. 그러나 그건 박진의 말이고, 나머지 대원들이 의구심을 품는 건, 숨어서 끝낼 걸 박진이 먼저 쐈다는 의심이다.


어쩌면 박진은 백주현이 맞는 장면을 봤을 수도 있다. 아까 그 자리가 현장으로 보인다. 그럼 백은... 죽은 건가? 전사한 건가?


죽었거나 저 방향으로 도주했거나 둘 중 하나. 다친 상태로 저 위로 올라갔을 수도 있다. 박진이 제대로 조준경을 보고 쐈으면 쏘는 만큼 적도 맞았다. 물가 계곡은 폭이 좁고 양쪽이 트였다. 거리도 그렇고, K-7은 총구 발사속도가 느린 무성이고 권총탄이지만, 영점이 잡힌 상태에서 조준경이면 100%다.


박진은 언제까지 쏘고 올라온 것일까. 백주현이 혹시 죽지 않고 어떻게 도망치지 않았을까. 포로로 잡혔나? 모른다. 방송에는 몇을 죽였고 몇을 생포했다 소리가 없다.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안다. 욕심이 조금 과하다. 여기서 그만둬야 한다. 더 이러다간 정말로 문중사 성중사도 큰일 날 수 있다. 하지만 둘에게 끌리는 무엇이 있다. 저 계곡 위에서 누가 부르는 듯하다. 끌린다. 마음의 심금 같은 웅~~~~ 낮은 소리, 박자를 맞추어 이리로 오라는 기분이 든다.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인의 뒤태에 내 시선이 블랙홀처럼 빨려 들어가듯이... 저 위 검고 수풀이 우거진 곳으로 무엇이 부른다.


고양이는 숨어서 죽는다

차에 치이면 고양이 방식이 아니다

고양이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죽는다


문경주가 미소 짓는다. 성지연도 웃는다. 웃음이 자못 따뜻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허탈한 웃음 임이 분명하다. 미소를 지은 상태로 눈을 마주하고 30초 가만히 있었다. 다시 동시에 고개를 반대로 돌려 사방을 둘러본다.


‘너희들 어디 있니.’


얼굴이 핏기도 웃음기도 썰물처럼 천천히... 눈에서 광채가 난다.


그래도 백주현을 발견했음에 만족한다. 북한군모를 벗어 움켜쥐고 가슴에 댄다. 광채가 빛나는 눈에 입꼬리가 조금 올라간 아쉬움, 아쉬움... 이렇게 인간이 지워지는구나. 이렇게 생명이 모양을 잃고 생각도 잃고 흩어지고 지워지는구나.


공장 공격 직후 봉우리에 올라온 둘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백주현의 소리. 따로 떨어진 하나의 강력한 폭발음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광채가 짙어진다. 뭐라도 눈물을 흘릴 증표가 있는 건 행복한 거다. 군복 쪼가리, 수습되지 않고 부패해 구더기도 먹다 버린 자리. 그것이 적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것이 주현이라는 - 남들은 판가름을 못 할 - 증거를 본다. 문경주의 콧날이 시큰하고 미간이 찌그러지며 손가락을 입술에 댄다. 조용히 하자는 소리가 아니라...


‘차분하게 받아들이자.’


백주현은 자폭했다.


‘더 이상 적을 죽이지도 못하고 나도 죽게 되었을 때...’


모든 형제들아

즐겨 노래하며

베들레헴 성 밖에 달아가세

어서 가 경배하세

어서 가 경배하세

어서 가 경배, 경배하세


이제 곧 밤. 둘은 천천히 군장 은익 장소에 접근해보기로 한다. 백주현의 증표가 힘을 주었다. 과감해지기로 했다.


어둠 속에 성지연이 아무도 모르게 웃는다. 과학경연대회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본 교장 선생님처럼, 자랑스러운 미소.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 어떤 실마리.


‘너희도 우리도 죽는다. 다 죽었다. 남으로 안 가도 좋다.’


성지연의 미소는 지극히 천진난만하다.


‘1133 주특기 주현. ASAR.’


정말로 자랑스러운 점이 있었다. 정말로.

아마도 군인이기에 ‘자랑스럽다’ 말하겠지.

폭발 자리는 한 명의 자국이 결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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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50. 육첩의 방 21.05.13 499 14 11쪽
72 49. 810 +1 21.04.28 520 17 13쪽
» 48. 1133이 진 자리 +3 21.04.14 577 18 13쪽
70 47. 전투호흡 3 21.03.31 497 19 14쪽
69 47. 전투호흡 2 +2 21.03.17 507 18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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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45. My Way 21.02.03 557 19 14쪽
65 44. 가위가 놓인 그 자리 21.01.20 563 16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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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42. 가을하늘 공활한데 20.12.23 512 19 12쪽
62 41. 금야 밤바다 (3) +2 20.12.09 583 2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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