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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0 01:20
최근연재일 :
2021.11.10 12:00
연재수 :
79 회
조회수 :
66,686
추천수 :
1,629
글자수 :
403,656

작성
21.01.2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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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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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11쪽

44. 가위가 놓인 그 자리

DUMMY

“이상하니?”

“아뇨. 그냥 그렇습니다.”


“그런 말이 기억나네.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웃기지?”

“저도 그런 생각 했습니다. 어디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러냐. 그래 그럼.”


“그나저나 문중사님.”

“왜?”

“정말 행색이.”

“너는 뭐가 들라? 차암 이상한 소리 해.”

“우리 이거 너무 거지 아닙니까?”

“널 보니 거지는 맞는 것 같다.”

“재보급받은 그 많은 건 어디 갔을까요?”


한숨.


“그래서 말이다. 하지만 버린 건 없잖니.”

“버린 거 맞죠. 보급품 땅에 묻었잖습니까.”

“그냥 숨긴 거 아냐?”

“아뇨. 팠습니다. 선배님은 저격총으로 경계하고 계셨고.”


“너 정말 너무 거지다.”

“하하. 이러지 마시지 말입니다.”


“그건 그렇고 수염 좀 잘라야 할 텐데, 넌 솜털이라 별로 그렇지만, 이 수염이 북한군에게 보이면, 딱 보면 그놈! 그놈들 아냐.”


너덜너덜하다. 그리고 가볍다.

훈련 때도 경험은 했다.


근 한 달. 군복이 지금 때에 번들번들하고 찢어지고, 비누와 치약이 떨어지고, 그렇게 모든 것이 떨어질 때 천리행군의 시작이다. 그래도 출발 하루 이틀 전에 대대가 모이면 마지막 만찬을 준다. 고기라도 구워주고 삶아준다. 그렇게 걷고 걸어 거지처럼 부대에 입성한다.


하지만 실전은 훈련보다 더 거지 같다.


특히 수염이 굵고 빽빽한 앞사람이 체 게바라 같다. 그렇게 잘생긴 것도 아니지만 그래 보인다. 남자의 마지막 코디네이팅은 수염인가. 예수님과 체 게리바는 수염 때문에 잘생겨 보이는가?


수염은 길고 안구는 속으로 후퇴하여 눈빛이 깊다.


외모는 고사하고,


부대에서 일과처럼 운동하며 차오르던 힘과 약력이 없어졌다. 기력이 전반적으로 하강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기분이 이런 건가. 군복이 훨씬 넓어진 것 같고 신발 속도 넓어졌다. 신발 끈을 조이고 조이다 끈이 남는다. 혁대는 남는 부분이 너무 길어졌다. 걷는 건 땀도 안 난다. 쉬려고 누우면 한숨부터 길게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다.

넷이 둘이 되고 나서부터.

갑자기 가슴이 서늘하고 기력이 푹푹 떨어진다.


‘그래. 이건 확실한 목적의식이 사라져서야. 빨리 뭘 해야 돼.’


그 많은 던 식량 탄약 장비는 어디로 갔는가. 표. 백. 강은 어디로 갔나. 그냥 전사했나? 우린 우리 자신 외에 아무것도 모른다.


거지와 같다. 얼굴에 물을 묻힌 기억이 너무 오래전이다.

전체적으로 팔랑팔랑하며 가볍고, 더럽다.

하지만 정신만은 정말 또렷하다.


‘뚜렷한 목적의식. 하지만 진짜 생각을 감출 생각도 없다. 우린 중간에 떴다. 그렇다고 한쪽을 버린 것도 아니다. 우리는 대한민국 군인이라기보다, 그냥, 적을 적대시하고 죽이는 사람이다. 대한민국이란 단어가 추상적으로 변하지만, 이 개 같은 공화국을 적대시하고 죽이는 것은 끝까지 한다.’


‘이유는 없다. 그것 빼고 없다. 그냥 그거다. 돌아갈 곳이 없다고 원망도 안 한다. 그냥 이 상태다. 단 하나, 남조 북조 가능한가. 돕는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약하다. 지금 이 떨어진 기분. 사기가 없는 거다. 사기가 떨어진 거다. 그래, 우리 자신을 위한 노력. 우리 자신을 위한 게 없는 거야. 우리는 뭐지. 믿어라. 두만강 넘어간다. 우리는 탈출한다. 개지랄하고 올라간다. 중국은 그다음 문제다.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 없어. 정말, 나는 공화국을 탈출할 거라고 믿나? 그 전에 안 잡힐 수 있나?’


떨어진 정신은 말로 낚시가 안 된다.

무엇이 필요하다.

필요한 건 공격밖에 없다.

자신들을 도망자로만 생각하면 사기가 떨어진다.

못내 걸린다.

둘은 나머지 둘을 돕겠다는 생각이다.

도움을 받는다는 쪽은 가슴이 저민다.

누가 누굴 돕는다는 것일까.

이 상황에서.


‘이렇게 되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였어.’


겉이 거무죽죽할 정도인 줄 알았더니 속에 검은 반점들이 보인다.


‘촌에 살아봤어야 알지. 맛은 안 이상한데?’


겉을 깎아 슬라이스로 뜨다가 방법을 달리한다. 돌려 깎기로 편하게 껍질을 깎고, 적당한 크기로 잘라 먹는다.


서걱서걱. 오도독 바사삭, 오도독 바사삭.


자연스럽게 육즙이 입가로 흐른다.

식물의 육즙.


“뭐라도 들어가니 좋네.”


성지연이 대검으로 무 한 조각을 잘라 입에 넣는다.


“야, 한 조각 더 줘봐. 이거 배만 더 고픈 거 아냐?”


먹기 좋게 초코바 모양으로 잘라서 준다.


“어떡해요. 뭐라도 배를 채워야지.”


사각사각... 쩝쩝. 꿀꺽.


“목도 축이고 달달한 게 무만한 게 없습니다.”

“이거, 한 10분 걸으면 푹 꺼진다.”


“그래도 이거 귀합니다. 산 아래 민가라도 있어야 얻어요.”

“무가 귀하다니 정말. 황당무계하다.”

“낮에는 못 갑니다. 민가에. 밤에는 뭐가 뭔지 압니까.”


“워매. 남조선 깍두기 먹고 싶구나.”


“그나저나 이 지하족.”

“그거 벗긴 거 아냐?”

“네 맞습니다. 그런데 벌써 고무창이 벌어집니다. 곧 너덜너덜해질 것 같은데.”

“명령으로 교전 금지다.”


“이게 농구화지, 군화야!”


신체적으로도 문제가 있다. 살이 너무 빠지니 ‘삼키기가 힘들어’ 진다. 식도를 포함해서 모든 장기도 오그라들었나? 더 작게 잘라야 할 것 같다. 아무래도 식도도 좁아진 것 같다. 부대에서 누가 그랬다. 몸을 완성하는 것은 좋은데 단백질 보충제 먹지 말라고. 먹더라도 그 이상의 헬스용 영양제에 손대지 말라고. 그거 맛 들이면 운동이 아니라 보충제로 단백질 키우기 운동이 되며, 뛰는 것이 느려진다고. 몸 좋은(?) 원사가 그랬지.


‘다 무리 간다. 왜인 줄 알아? 근육은 커도 심장은 크기가 변하지 않아. 자기 주먹보다 작은 심장으로 몸이 감당하는 거야. 먹는 것으로 커진 벌크는 자연적이지만, 약이나 보충제로 키운 벌크는 심장에 무리만 가는 거야. 그리고 모든 보충제에는 알게 모르게 다 스테로이드 들어 있다. 그래야 효과가 좋아서 잘 팔리거든. 명심해라. 보충제 의지하면 몸 버린다.’


지금. 단백질 보충제 한 스푼만 먹어도 괴력이 나올 것 같다.


“벌써 배가 꼬르륵~~한다. 먹은 것도 없는데.”


“싫으면 드시지 말던가.”

“야, 무도 쉬어. 야채도 다 쉬어.”

“김치가 무 배추 쉰 거 아닙니까.”

“우린 소금이 없잖아. 소금이.”


수염을 타고 나름 단물이 흘러내리고, 그마저도 아까워 중간 중간 흡 흡 내려가던 액체를 흡입한다.


물과 먹을 것. 총과 칼만큼 중용하다. 몸이 멈추면 죽는다. 지금 살기 위해 움직인다. 서로가 상태를 지켜줘야 한다. 뭐가 이상하긴 하다. 입술에 딱지가 나고 피부에 뭐가 우둘두둘 오른다. 먹을 것이 극도로 불충분 하자 피부부터 이상해진다. 피부병이 아니라, 어떤 영양분이 모자라서 피부의 윤택이 사라지고, 심하면 곪기 시작한다. 특히 깨끗하던 피부의 이종인이 더 두드러진다. 키가 큰 문경주는 어느 새부터 허리가 앞으로 구부러진다. 군장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가 그렇게 변했다.


먹으면서도 계속 상하좌우 고개가 튀고 귀도 열고 있다. 조그만 소리가 나도 멈췄다가 다시 먹는다. 수풀 속 덥수룩한 두 사람. 애 같다고 생각했는데, 문경주가 보기에 성지연의 구레나룻, 생각보다 짙고 길다.


무심코 성지연이 무슨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문경주가 씹기를 중단한다.


“군장 은익처를 가자고? 미쳤어?”

“거기 폭약이 남아 있습니다.”

“어따 쓰려고.”


“화선에 도달했을 때, 그 근처에 도달했을 때, 정말로 돌파가 힘들면, 거기 한 10파운드는 남아 있을 건데, 그걸... 터트려서 완전히 아작을, 공황상태를 만들고 냅다 남으로 뛰죠.”


“통로개척? 햐, 생각 좋다. 식량도 남겼었나?”

“있지. 난 틀림없이 남겼어요. 적어도 나는. 땡겨요?”


문경주가 웃는다.

마냥 착한 애가 아니었다.


“거기 표상사 의무낭도 있지 않아?”

“중요 물품은 다 빼냈죠. 지혈대와 봉합 실과 바늘 연고 그런 거.”

“거기 가위 있지.”

“가위. 두 개 있지 않나? 군복 자르는 거랑 의료품 자르는 얇은 거.”

“수염 좀 깎는 것이 좋을 거 같다.”


“아... 그렇죠. 군복은 위장이 되지만 얼굴 보면 이상하죠.”

“그 가위면 말끔하게 수염이 잘릴 거야. 대검으로 하면 남아. 이상해.”

“제가 생각을 못 했습니다. 지난번이 운이 좋은 거죠.”


“전방? 전방에서?”

“그렇죠. 거기서 누구 조우하면 수염이 걸립니다.”


“그래서, 폭약은 정확히 어떻게.”


“제가 말하는 건 북방한계선입니다. 우리가 지날 때보다 당연히 강화가 있겠죠. 지금 거기가 우리 통과할 때겠습니까? 정상이겠습니까? 보초와 매복호 촘촘히 들어서 은밀 통과가 불가능하다면, 기어가서 그 중간쯤에 폭약 설치해서 비전기식으로 폭파하고 남으로 뛰는 겁니다. 최후의 방법으로. 10파운드 세죠. 그 정도면 대전차지뢰 수준 아닙니까?”


“뇌관은 있지? 비전기식.”


“당연히 있죠. 전기식 뇌관과 전기식 점화기는 우리가 잘 모르고.”


갑자기 똘폭이 떠오른다.

문경주는 봤다.

베레모를 넣을까 말까 고민하던 똘폭.

미쳤냐고 불호령을 내렸다.


“음. 흠! 음.”

어렵게 침을 삼킨다.


뱀. 뱀 없나. 뱀이 먹고 싶다.

진짜 아무거나, 노루 너구리 없나.


“오케이. 들러보자. 북한군이 파내 갔을 수도 있어.”

“냇가에서 은익처가 가깝지는 않아요.”


또 백주현이 떠오른다.

박진에게서 확실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일대를 다 뒤지지 않았겠어?”

“맞는 말씀인데, 운을 바라는 겁니다.”

“우리가 그 일대 지나면 지도 없이도 감이 오겠지?”

“네. 거기 공장 참고점, 큰 봉우리.”

“기억난다. 그래. 파내갔으면 땡이고.”

“그럼 그만이죠. 관측만 일단 해보고 가시죠.”


“지키고 있을 것 같은데?”

“글쎄요. 운에 맡깁니다.”

“알았다. 씨발 해보자.”


마지막 조각을 잘라 서로 입에 넣고, 장갑으로 입을 닦고, 칼을 군복 천에 앞뒤로 닦고 삽도한다.


먹는 걸 끝낸 두 명,

조준경과 쌍안경을 들어 도로를 조준한다.

남북으로 흐르는 잘 닦인 도로 두 개가 보인다.


운? 운 맞지.

지금까지도 운이었지.

큰 것도 안 바라고, 을지로 골목의 백반집 가고 싶다

살아서 그 거리를 걸을 수 있다면.

‘왜 거기가 자꾸 생각나지?’


고요.

이 동네는 산새 소리 벌레 소리도 적다.

나무는 함부로 자르는 거 아니다.


두 명의 렌즈는 움직이지 않는다.


잠시 후,

아직도 입을 조금 다시는 가운데,

천천히 되새김질이 멈추고...

둘은 쌍안경 조준경 접안구에서 눈을 떼...

놀란 눈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쌍안경과 총을 내려놓고...

둘은 북쪽을 바라본다.


어깨동무하고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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