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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B

검은 백조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0 01:20
최근연재일 :
2021.11.10 12:00
연재수 :
79 회
조회수 :
66,589
추천수 :
1,629
글자수 :
403,656

작성
21.05.27 06:00
조회
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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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글자
12쪽

50. 육첩의 방 - II

DUMMY

“육첩 방은... 남의 나라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거 뭐냐.”


“시. 윤동주,”


“그런 시도 있어? 바람 별 날아다니고 그러지 않아?”


“윤동주가 일본에서 유학할 때 쓴 겁니다.”


“가방끈은 길어서 나쁠 거 없구나. 좋은 것도 떠올리고.”

“내가 무슨 가방끈이야. 심심해서 지방대 간 건데.”


“그런 말 하지 말아. 그래도 부러운 사람 있어.”


“형, 이상하네. 형은 대학에 프라이드 없어?”

“누가 그래.”


“형도 학력 마피아 레벨 되지 않아?”

“아니. 잘못 들은 거야.”


“진짜야?”

“그만해.”


“나라고 뭐 너무 좋아 낭송하고 그러겠습니까.”

“아니, 나쁘다 이상하다 이해 못 한다, 그런 뜻이 아니야.”

“마음에 드쇼?”


박진 얼굴에 땀이 흐른다. 땀이.


“육첩이 뭐야?”


이종인은 그 땀에 놀란다.


“방의 크기. 평보다 작은 단위 같은데, 아주 작은 방에 있다는 말이야. 꼼짝도 할 수 없는 방. 고시원 같은 정도. 우린 일본어 잘하는 사람이 일본 땅에서 말할 때, 돌아다닐 때 생김새로 알아보나? 알아보고 차별이 가능한가 모르지만, 일제강점기 말기에 맘 놓고 돌아다닐 수는 없었겠지. 그때 아마 전시라 밤에 통행제한도 있었을 거야. 그런 시야.”


“니가 말할 때 알았지. 지금 우리 처지라는 거. 시란 게 그런 거냐?”


“... 그렇지. 뭐... 그 당시는 일본 땅의 유학생이 여기 와 있는 우리와 비슷하지. 믿 놈이 없고. 도움받을 놈 없고. 그때 일본은 관동대지진 때 한국인 졸라 죽이고 지랄한 상태고.”


“밤비가 속살거려? 시가 마음을 차분하게 하네.”


이제 둘은,

마음에 뭐가 스치면 상대가 금방 깨닫는다.

이종인이 갑자기 박진의 눈을 본다. 뭐야...

하지만 말을 않는다.

박진이 먼저 입을 연다.


“광교산 동무.”


“이 마당에 무슨 광교산이야.”

“이종인 중사님.”

“그래 박진 중사.”


“어느 영화 대사 같은데, 그래도 옛날이 좋았지?”

“언제. 나 중사 진급해서 형이랑 술 먹으러 다닐 때?”

“빙고.”


“월급 다 날리게 해놓고...”

“그냥 만기하고 나가서 복학이나 하지 왜 남았어?”

“나한테 왜 물어. 형은 왜 남았는데.”


“이제 진짜가 왔지. 죽음이 목전에 오니까. 여기서.”


“형, 형이 좀 다쳤다고 내가 나은 게 아냐. 피고 지고 피고 지고 순서만 다를 뿐이야. 이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멋있다고 개소리하는 게 아니라.”


“무섭지?”

“무겁긴 무서운데, 그냥 무섭다 그런 게 아니네.”

“그럼?”


“사람이 죽음에 임박하면 머리가 복잡할 줄 알았는데, 형이나 나나 똑같지 않아? 어차피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죽음은 이제 곧 현실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주 이상하지도 않아. 그리고 이렇게 힘이 드는 줄 몰랐어. 지쳐. 죽을 만큼 지쳐. 죽는 게 나지 않나 그런 생각까지 들어. 형은 안 그래?”


“더러워서 죽고 싶지. 하지만 순순히 죽긴 싫다.”

“오케이. 나도. 나 죽을 때, 많이, 많이 죽었으면 좋겠어. 씨발.”


“죽음이 이 정도로 하찮을 줄 몰랐어.”

“하찮게 생각하려고 우리가 노력하는 건 아닌가?”


“내가 옛날에 어땠다, 그런 소리 하려면 그만두고. 그래서, 넌 지금 어떠냐.”


“나?”

“그래.”

“뭔 이상한 소리 하고 그래.”


“아니, 들어보고 싶어.”


“내가 옛날에는... 좀 이상한 말일 겁니다. 옛날에는, 이 세상에서 저 자신이 제일 무서웠습니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두려웠죠. 만취해서 뭐가 나올까 두려웠고. 그런데 지금. 별것도 아닌 것으로 혼자 마음고생 했다는 기분이 듭니다. 난 여기 있었어요. 그냥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절 알겠습니다. 충분히 이해하게 됐다는 건 아니고, 느낌으로 알겠습니다. 덩어리가 보입니다. 그리고 결국 지금이나 늙어서나 죽어가는 과정에 있다는 겁니다. 말 이상합니까?”


“뭐가 이상하니. 나 같은 놈은 그런 재주가 없어서 정리가 안 될 뿐이지. 알겠다. 말.”


“막연하게 날 불신해왔다는 기분이 듭니다. 몰라서 내가 두려웠던 거죠.”


산에 바람이 분다. 오후부터 추우려 한다.

나무가 별로 없어서인지 산의 고각들이 더 장엄하다.

외국에 있는 것 같다.


‘이 다리로 저런 산을 어떻게 가지?’


질주하던 놈들이 사라지니까 조금 쓸쓸하다.


“종인아. 할 거는 하자.”

“옙. 형. 할 걸 안 하면 사람이 아닙니다.”

“니가 말로 정리는 잘하는구나.”


하루 전,

동이 트기 전에 위장하고 누워 자다가 깨어났다.


드디어 보고 싶은 것을 보았다. 산길을 무리 지어 뛰는 북한군. 전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전연지대에서 본 조선인민군이 아니다. 정말 빠르게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둘은 이 광경을 보면서 굉장한 스릴을 느꼈다. 드디어 마음에 드는 상대들이 나타난 거다. 어쩌면 어젯밤도 그들이었다. 그 징후가 보였다.


그리고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


만약 전쟁이 며칠 미뤄진 거라면, 원래 둘의 전시작계 3단계와 비슷하다. 그때는 오히려 적을 끌어들여 제2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목표다. 제2전선. 적 병력이 게릴라를 잡기 위해 병력을 투입하는 것, 그러다 그러다 생각보다 많은 병력을 투입하고 끌어들이는 것.


‘불편했던 것이 대수롭지 않게 변했다. 처음 이틀간은 긴장 때문인지 변이 나오지 않았다. 훈련소 첫 주처럼, 그러다 굵은 것이 터지고 나서 편해졌다. 게릴라는 똥을 쌀 때 항상 삽을 든다. 냄새도 흔적. 항상 싸고 묻는다. 시간이 없으면 보행이 가능한 장소에서 멀리 가 싸고 흙이라도 덮는다. 넓은 잎사귀를 보면 반갑다. 마무리는 항상 더럽다. 그러니 손에도 냄새가 밴다. 손을 씻을 수도 없다. 엉덩이와 하의 엉덩이 부분이 가끔, 약간 축축하다가 무엇이 가루가 되어 떨어진다. 우수수. 웃는다.’


‘그 첫 똥은 기억이 멀다. 피로 때문인지 우리가 한 일이 과연 우리가 한 것인지, 자연적으로 이질감으로 남의 일이 되어버린다. 비무장지대 그 사람도 아마 특수 계열일 것. 복장과 총기 장비 그리고 3인조. 전형적이었다. 그거 발견되었을까? 그래도 죽고 나면 모욕할 생각이 없다. 살아있을 때는 죽이고 싶고 죽여야 하지만, 죽고 나면 적의가 사라진다. 모든 착한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그때 되돌려 중지되고 남쪽으로 복귀했으면 어땠을까. 그 사람이 첫 똥 냄새였다.’


‘여기 말끔하게 처리할 화장지는 없다. 하여, 북한군은 그 똥 냄새가 난다. 처음에는 그냥 자연의 냄새로 느꼈다가, 알고는 역겨웠다. 이리나 늑대 떼가 다가오는 기분이다. 같은 인종 민족이라기엔 이질감 컸다. 그래서 처음에는 북한군 가까이 가면 그 똥 냄새를 맡았다. 이젠 잘 안 맡아진다. 우리 몸에서도 나는 것 같다. 그리고 이제 그 똥 냄새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더 고도화된 똥 냄새들이 나타난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그놈들이다.’


눈으로 본 놈들.


군대의 편제는 비슷하다. 10명 12명의 분대. 그러나 분대까지만 똑같고 굉장히 제대가 부풀어 오른다. 경보여단이 4천 5천 명이라니. ‘특수’가 20만 명이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북한의 저격경보는 분대 규모로 출발하나 명칭이 ‘조’다. 그 위가 ‘대’ 그다음 중대-대대-여단이 된다. 그들이 이동 모습은 전형적인 북한 경보였다.


10~12명의 ‘조’는 다른 조와 상당히 독립적이다. 목표가 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훈련에서 경쟁한다. 목표에 따라 차량반 열차반 중장비반을 따로 교육받는다. 그리고 저격/경보에는 ‘조’마다 여성 간호병이 붙는 경우가 많다. 일반상식이 아니겠지만 북한은 그렇다. 여성 간호병도 남조선 특전사 의무주특기처럼 똑같이 행군하고 똑같이 걷고 쏜다. 경무장이므로 즉석쌀밥이나 밥을 누룽지로 만든 것과 염장 무를 휴대하고 강행군을 하다 반합에 끓여 먹고 자고, 또 일어나 간다.


‘형, 저 봐. 여자. 여자.’

‘어 씨발 진짜네. 3차 초병대회 하냐?’

‘말이 진짜구나!’

‘저거 특수 맞아. 일반 보병은 분대에 여군 없어.’


그 여군과 팀 의무 주특기는 이유가 있다. 특수전 제대는 소수인 반면, 한둘이라도 죽거나 다치거나 낙오하면 전력이 급하강한다. 특수전은 사람을 많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목표:타켓]에 대한 작전을 완벽하게 수행해야 특수전이다. 사람 죽이는 건 부수적이며, 작전목표를 완벽히 해야 ‘특’자의 의미가 있다.


그걸 수행 못 하면, 아무 군인이나 거기 데려다 놓은 것과 무슨 상관인가.


팀의 의무는 ‘조금만 조력하면 가능한’ 대원을 끌고 가기 위함이며, 목표타격이 끝난 다음에는 전력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목표타격에는 딱히 쓸모가 없을 수 있지만, 비정규전 게릴라전에는 의무 주특기와 간호병이 필수다.


“그래도 경주와 지연이가 좀 편해지겠지?”

“아무래도. 우리가 잘한 겁니다.”

“모여라 씨팔. 여기로.”


‘그런다고 반무장지대 경계가 풀리진 않아. 사건 커.“

”한술이라도 덜어주면 다행이지 뭐.“


분대 규모가 제각기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뛰고, 그 중간에 여성으로 보이는 대원도 목격했다. 복장이 똑같았으나 여성 분명했다.


박진과 이종인이 알고 있는, 적어도 경보가 들어왔음을 알았다. 총참모국은 분석에 들어갔다. 남조선의 이 부대, 이동 거리, 방향, 목적, 특징을 분석한다. 이미 분석되었다. 비무장지대 살인사건, 공장 공격, 헬기를 쐈다. 각은 이미 완성되었다.


병력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경향이 달라 보이는 부대도 지나쳐 갔다. 정찰여단이나 정찰대대로 분류되는 우드랜드 패턴도 상당히 지나갔다. 오히려 전통적인 인민군복, 다시 말해 ‘구형’ 군복을 입은 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북한의 ‘특별한 부대’의 상징.


AK-47이 아니라,

AK-74.

74 밑에 유탄발사기가 무척 보인다.


그들은 다음 차단선을 향해 뛰는 듯했다. 수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산 아래 도로는 모두 차단되고 장악되었음을 상상할 수 있다.


고요해지고 바람소리만 들리니 서늘... 하다.


“그래도 쏘고 던지니까 군장 좀 가벼워졌지?”


문득 꺼낸 박진의 말에 이종인이 웃는다.


“개그야, 근자감이야?”


“이것들이 요즘 들어 자주 개기네...”

“그런다고 군기가 잡혀?”

“좀 노력해서 잡아봐. 형 아프다.”


“알지? 여기 있다간 죽어.”

“......”

“둘 다 죽어.”

“......”

“심지어 굶어 죽을 수도 있어.”


육첩 방은 남의 나라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형. 물 떠올게. 뭐 좀 먹을 게 있을라나.”


박진이 눈으로 말한다.

‘너, 나 두고 가도 나 이해한다.’


이종인의 눈이 휑하니 변한다.


“정신 똑바로 차려. 아직 덜 끝났어. 저격총 잡고 있어!”


“알았어. 내 너의 뒤를 봐주지. 후후.”

“하여간 박진은 박진이야.”


“피는 나지만 죽지 않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요즘 들어 머릿속이 헤까닥 하냐?”


“셰익스피어. 윌리엄 셰익스피어야.”

“셰익스피어...”


“오셀로 4막. 칼을 맞고도 버티며 하는 소리야.”


박진이 처격총을 들어 스코프 뚜껑을 올린다.


“물은 뜨러 가지만 죽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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