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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백조

웹소설 > 일반연재 > 전쟁·밀리터리

조휘준
작품등록일 :
2020.05.20 01:20
최근연재일 :
2021.11.10 12:00
연재수 :
7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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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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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03,656

작성
21.05.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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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50. 육첩의 방

DUMMY

다 불타버린 것 같다.

이게 지구인지 화성 표면인지.

우리 지금 히말라야 가냐.


북한은 모든 나무를

모든 민가가 화목으로 태운다.

잡풀도 말려 태우고 소똥도 말려 태운다.


‘민가는 금방 알아봐. 밭에서 똥 냄새가 나니까. 하지만 우리 몸에서도 나는 것 같다. 선배의 몸을 보살피다 보니 북한 냄새가 난다. 북한군 시신에서는 소여물을 태운 것 같은 풀냄새가 난다. 시신이 불쌍한 기분이 드는 건 그 풀 냄새다. 이제 냄새의 구별이 사라진다. 우리도 여기 몸이 되어간다.’


속도가 느려진다.

박진의 걸음걸이가 느려진다.


이종인은 묻지 않는다. 대답은 뻔하다.

괜찮아. 괜찮다고. 혼자 가고 싶냐? 가! 그럼 가. 난 괜찮으니까.


‘이 사람의 성질. 성질 있다. 성깔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나에게 딱히 화를 내거나 시비를 건 적도 없다.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답답하다. 고집이 황소 같다.’


총알은 등과 허벅지를 때렸다. 동트기 전에 급하게 서둘렀던 지옥. 사방에 적. 왜 자기들이 안 쓰러졌는지 이해가 안 된다. 무작위적인 난사를 북한용 용어로 ‘눈먼 사격’이라 한다.

난세에 영웅 났나. 어떻게 깔려 있었는지도 설명이 불가하다. 매복이란 것도 교범처럼 말끔하게 되려면 그럴만한 지형에서나 가능하고, 그건 교범의 그림일 뿐이다. 파이고 바위가 튀어나오고 얽히고설킨 곳에서 1자로 매복차단선을 가려면 거기 가봐야 안다. 군인들은 말끔한 산과 말끔한 도로의 그림을 보고, 바로 그런 장소에서 매복을 교육받는다.


걷다가 ‘그 선’을 통과했다는 기분은 들었다. 통과하고 나서는 조명지뢰 같은 것이 터졌는지 등 뒤가 한동안 환했다.


다시 공기가 시원해지고 벌레가 찌르르 찌르르 새소리도 들리면서 동쪽 하늘이 파랗게 변했다. 그리고 족히 10km는 족히 걸었다고 생각할 때, 더 이상 가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자리를 물색해 기어들어갔을 때, 박진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박진은 중간에 깨달았지만 숨기고 있었다. 아프다. 정말 아프다. 이 아픈 것을 어떻게 문학적으로 문장으로 표현이 없다. 박진은 속울음을 울면서 ‘관통인가 봐. 관통이야.’ 걸었다. 동이 터올 때 이종인은 걸음걸이자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종인이 살펴보니, 어느 틈에 지혈대를 묶고 있었다.


“봐봐. 어디 봐.”


큰 혈관은 안 건드렸는지 피는 많지 않다.


‘왜 피가 안 나지? 이런 일도 있나? 내가 의무가 아니니.’

“다리 뒤쪽에 맞았으면 난 이미 죽었어.”


가끔 영화에 보이지. 자신이 쓰러지거나 낮은 자세를 취하면서 상대 허벅지를 공격하는 것. 허벅지에 포만 떠 준다고? 겁만 준다고? 핏줄은 근육의 크기에 따라 형성되고, 인체에서 가장 굵은 핏줄은 허벅지에 있다. 허벅지 잘못 공격하면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과다출혈로 빨리 죽는다. 그리고 굵은 핏줄은 허벅지 후면과 측면에 있다.


“개소리 말고. 이러고 걸어?”

“처음엔 몰랐어.”

“몰라? 총알 맞고?”

“그냥 뜨끔 했어. 등도. 걷다 보니...”


총알 삽입구와 사출구에 연고를 바르고 파상풍 가루를 뿌리고 붕대로 감았다. 허벅지에 맞은 것 때문에 사실상 갈 수 없는 상태. 응급처치하고 박진이 다시 가자 했지만, 일어났다가 다시 앉았다. 걷다가 한번 앉으니 쉬이 다시 갈 수 없는 상태.


“안 돼. 일단, 바로는 안 돼.”


상의를 벗겨 등의 상처에도 응급처치. 그냥 스친 것 같다.


이종인은 끝내며 손을 턴다.


“없어 이제. 응급처치 용품, 연고밖에 없어.”


눈이 너무 가늘어져서 곧 잠들 것 같았지만, 그렇지도 않다. 피곤한데 잠은 안 온다. 이러다 정말 푹 쓰러지면 이틀 못 일어날 것 같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뭐가 나타날지 모른다. 무력하게 당하고 싶지 않다. 이제 조금 큰 포위망 안으로 들어왔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아직은 포위망이 넓지만, 초인이 아닌 이상 좁혀진다. 그렇게 될 것 같다.


“다리를 올리고 몸을 누워.”

“조용히 좀 해라.”

“그냥 기대기만 하면 다리에서 피가 더 난다니까!”


그리고 갑자기 둘 다 입을 다문다.

둘 다 따로 생각이 엄습했다.


해는 뜨고 말을 밝는다. 이제 어떻게 하나. 방법은 있나.


게릴라는 서면 죽는다. 총알을 맞고 싶으면 상체에 맞아라. 적어도 걸을 수는 있다. 걷거나 뛰지 못하면 죽음과 가깝다. 멈추면 낙오. 같이 갈 수 없다. 둘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 총상이, 총알을 맞은 상처가 사나흘에 낫나? 제대로 치료할 수 없기에 도져도 반드시 도진다. 하지만 물을 수도 답할 수도 없다. 둘이기에.


“분명히 말하는데, 두고 가라 소리 하지 마.”


그러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것이 전투의 기본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너 돌격!’ ‘너 앞으로 나가 정찰!’ 말하고 수행하는 것이 전투, 군인이다. 우리가 인생에 고통을 받는 것은 대부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때문이다.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한다. 죽이고 싶어도 죽이지 못하고 살리고 싶어도 살리지 못한다.


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할 고민을 마주했다.


“넌 안 졸립냐?”


박진의 목소리에 숨이 깊다. 티를 안 내려고 하나...


이제 박진은 걸어도 평지나 가능하지 급경사는 못 오른다. 사실 걸어서도 안 된다. 상처만 도지고 치료가 더딘다. 하지만, 언제 상처가 낫는단 말인가. 이 상태로 어미 숨어서 보름이라도 지낼 수 있단 말인가. 먹을 것은 있고 숨을 곳은 있나.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너는 그런 인생 안 살아서 다행이다만, 이런 상처는 새롭게 겪는 것이지만 상황 자체는 부담스럽지 않다. 어려서부터 참 많이 봤다. 사람이 변하고 일이 터지는 거. 이것이 끝나면 저것이 오고, 이거 막으면 저게 터지고. 저거 막으면 이게 다시 터지고. 하루도 이틀도 일주일도, 다문 한 달도 가만히 놔두지 않아. 눈물? 울 정도면 향긋한 상황이지. 누구를 죽이고 싶거나, 실제로 죽이려 손에 뭘 쥐었거나, 누구나 정말 친한 관계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정말로, 진심으로 남이란 기분이 들 때, 그런 정도, 그 정도가 오면 안다. 어디 가나 지옥이라고. 지금 이 건 그 정도 아냐.’


“분명히 말했어.”


‘하지만 난 아무것도 원망하지 않아. 가족? 환경? 원망하지 않아. 각자의 조건이 다를 뿐이지. 내가 고마운 건, 내 팔다리 대가리가 멀쩡하게 성장했다는 거야. 그거면 된 거야. 그러면 고마운 거야. 근데 이 자랑스런 몸뚱이에 오늘 기스가 좀 났네.’’


“더 이상 조는 쪼개지지 않아!”


‘이게 이렇구나. 몸이 사우나처럼 열이 오르고, 붕 뜨는 것 같고, 다리가 코뿔소 다리처럼 부푸는 것처럼 움직이기 힘들다. 둔하고 무겁고 내 다리 같지 않다. 다리가 더부살이가 된 것 같다. 디디고 서면 몇 군데서 정말 버틸 수 없는 것이 온다. 자연스레 이를 악무네. 내 다리가 호박이고, 그 호박을 프라이팬에 튀기고 드라이버로 찌르는 것 같다. 이건 누워야 돼. 하지만, 후송할 상황 아니잖아. 넌 결정해야 한다.’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GOP에서 누가 기다리지 않을까?”

“뭔 레퍼토리야.”

“GP나.”


“그거 우리 잠수함 맞지? 신호 맞았지?”

“맞아.”


“그럼 남에서 지금 우리 알고 있는 거 아냐?”

“여단이나 대대에 그걸 알려주겠어?”


“유사시 침투로 후방 1km 재집결.”

“어디서 자주 듣던 말인데...”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다. 비무장지대에서 누가 기다린다고? 사령부나 뭐 그런?”

“아니, 난 홍소령님을 말하는 거야.”

“지시가 있어야 가능하지.”


“가만있겠어? 지랄을 해서라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할 수 있지.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야. 특히 표상사랑은 정말 남다른 사이지.”


“그럼, 말이 더 이상하지. 모르겠어? 그럼 전쟁은? 전쟁은 없는 거야? 갑자기 취소된 거야? GOP가 후방으로 장비 인원 빼던 것이 구라였어? 씨발 다 구라야? 그 거대한 계획을 누가 갑자기 캔슬해! 시작도 말도 안 됐지만 그렇게 끝도 말이 안 돼. 누가 기다린다고 해도 대대적으로 전투병력이 받으려고 기다리진 않을 거야. 그러면야 경주나 지연이에게 좋지만.”


“GOP 술렁대면 북한 애들이 느낌 알지. 대놓고는 못 하지. 그랬다간 ‘아, 여기로 다시 넘어갈라 그러는구나.’ 광고하는 꼴이잖아.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들어왔던 구멍으로 다시 나가. 불가능해. 일부러 찾기도 힘들겠다. 그 민경대대 그 자리를 찾아서 간다고? 죽으려면 무슨 빽을 못 쓰겠냐만은.”


“관측이나 좀 해. 뭐가 뒤에 붙었나.”


“항상 보고 있어. 알았으니까 좀 쉬어. 자 그냥. 말하지 말고.”


영겁의 시간. 찰라. 모든 것의 끊어짐. 뭣이 툭 끊어지면서 찾아온 영겁. 쓰러진 돼지가 숨을 몰아쉬고, 숲은 바람에 휩쓸린다. 컴컴한 해변. 외로운 나.


어둠이 내리는

길목을 서성이며

불 꺼진 창들을

바라보는데...

아아아아, 외로운 나.

달랠 길 없네...


‘뭐야 이건.’


축축하다. 문득 박진은 자신이 신음하며 앓고 있다는 걸 알았다. 끄응 끄응. 그리고 몸이 젖어 있었다. 피가 너무 흘러 죽게 되었나 생각했으나, 아닌 것 같다. 냄새가 없다. 땀으로 젖은 것 같았다. 눈을 뜨니 이종인이 지팡이를 깎고 있다.


무겁다. 앓고 있다. 종류는 다르나 낯설지 않다.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난 일이 있다. 큰 교통사고가 나거나 전신마취 수술을 해보면, 문득 ‘몸도 있었구나’ 깨닫곤 한다. 박진은 그것보다 강한 교통사고를 겪었다.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팡이. 이종인은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박진에게 말한다.

지팡이를 깎던 이종인이 박진을 본다.


“물 줘?”


말투를 들으니 무엇이 쫓아오거나 나타난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똥 냄새는 자연이다. 외가 시골에 갔을 때 어설프게 느꼈는데, 책에서도 봤고, 똥이란, 똥 냄새란 그 인간 자체다. 우리 몸을 응축시키면 똥이 된다. 똥은 우리가 먹은 것이며, 우리 몸은 3개월 동안 먹은 자양분의 효과이며, 우리 몸의 냄새를 압축/축약해서 향수로 만들면 거의 똥 냄새가 날 거다. 아름다운 여성의 살 냄새도 수십 배로 압축하면 결국 똥 냄새다.’


태양. 따스하다.

꿈은 몸의 상태였다. 다리가 엄청 무겁고 두툼하다.


아픈 건 아픈 것이고 뻘쭘하다. 박진은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그렇다고 자존심을 내세울 상황도 아니다. 까놓고 말해서 이종인이 혼자 가라고 하고 싶지도 않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뚜렷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조장은 이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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