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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의 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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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렬천사
작품등록일 :
2013.09.13 10:45
최근연재일 :
2015.05.24 21:42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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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4.02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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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6쪽

4. 고통을 먹는 자 (35)

첫번째 리메 시작합니다.




DUMMY

35.

오늘의 날씨는 맑음.

섬 지방 특유의 눅눅함마저 날려버리는 화창한 날씨에, 시원한 바닷바람까지 소슬하게 불어오고 있다. 오늘 같은 날 레미라를 방문했다면, 평생 동안 이 섬에 좋은 기억만을 남길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 레미라를 밟은 자들은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 못했다.

칼질을 하고 주문을 날려 적을 살상하는 마당에 따뜻한 햇볕? 바닷바람? 그런 걸 즐길 겨를이 없다.

그중에서도 위즈는 특히나 지금이 악몽 같은 시간이었다.

중간보스라고 알려진 잇페인이라는 NPC는 하나가 아니었다.

공장에서 찍혀진 제품처럼 일련번호까지 달려서는 떼로 몰려들었다. 이미 4명을 해치웠지만, 그 대가로 위즈는 상당량의 스탯을 잃었다. 힘에 부쳐 함께 죽는 선택-자살공격을 해서 그런 게 아니다.

잇페인들은 심상세계로 침입하는 동시에 위즈의 스탯을 빼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이 섬 어딘가의 본체에게 넘겨주었다. 숫자가 붙은 녀석들을 죽여 봐야 강탈당한 스탯을 돌려받진 못한다.

그렇다고 이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들은 하나하나가 중급마법사의 수준이다. 이대로 두면 곳곳에 흩어져 레미라 곳곳에서 파괴행위를 일삼으리라. 위즈같은 피해자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하지만 위즈는 점점 이들을 상대하기가 힘에 부쳤다.

36명의 잇페인들이 눈의 흰 창까지 시커멓게 물들이며 노려보고 있다.

36명이 동시에 펼치는 심상세계 공격.

그에 맞선 위즈는 지금 정신을 집중하여 심상세계로부터 강렬한 빛을 뿜어내는 중이다. 그 빛은 위즈의 머리를 감싸며 둥글게 퍼져 나갔다. 종교적 색체가 짙은 명화(名畵) 속에서 성인이 내뿜는 휘광-아우라다. 심상세계에 침입하기도 전부터 이렇게 철벽 수비를 하니, 잇페인들은 전혀 파고들지를 못했다.

‘마음속의 성전’은 패시브 스킬이었지만, 위기를 느끼면 이렇게 자동적으로 발동되기 때문에, 사실상 강제발동이 가능한 액티브 스킬처럼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덕에 더 이상 스탯을 빼앗기는 상황은 모면했지만, 위즈는 발이 묶여버리고 말았다.

시간은 금. 그리고 언제까지 방어가 가능할지 알 수 없다. ‘마음속의 성전’이 소모치도 없이 패시브로 발동된다고는 하나, 스킬 하나만 믿고서 적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 상태를 더 이상 고착시켜서는 안 된다.

‘차라리 한번 죽어서 이 상황을 벗어나자.’

위즈에게는 ‘세 갈래 운명의 길’이란 서바이벌 마스터리가 있다. 죽음에 이르는 데미지를 입으면 분신 셋으로 나뉘어져, 세 방향으로 도주할 수 있다. 설사 잡혀죽는다 해도 상관없다. 이때는 ‘망령화’라는 패시브 스킬이 이 작동할 테니까. 죽게 되면 유령이 된 상태로 움직여서, 원하는 장소에서 부활이 가능해지니 더 좋다. 길을 헤매지만 않으면 레미라 요새에서 부활할 수도 있다.

‘그래 죽자.’

위즈는 인벤토리를 열어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로 가슴을 찔렀다. 그때 깡마른 팔이 튀어나와, 손목을 꺾었다. 그 바람에 단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자살까지 생각하다니……과연 이방인이로군!”

몇 명의 잇페인들이 심상세계 침입을 중단하고 위즈를 덮쳤다. 위즈는 거세게 저항하며 그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면서도 머리에 맺힌 휘광은 점점 더 강해졌다.

모든 잇페인들의 눈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선명한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눈동자들이 일제히 위즈를 쏘아보았다.

“끈덕진 자로군.”

“우리들만으로는 안 되겠어.”

잇페인들은 위즈를 끌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간간히 3~4층 건물들이 뒤섞인 지역에서 벗어나자, 단층의 낮고 작은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이 나타났다. 작은 텃밭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었고, 미처 걷지 못한 빨래가 햇빛을 받아 하얗다.

이곳은 레미라의 주거지역이었다.

억지로 끌려 이곳까지 오면서 위즈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갔다.

주거지역의 곳곳에서 잇페인들이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위즈를 발견하고는 하나둘씩 뒤를 따랐다. 점점 불어난 잇페인들은 어느덧 100명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이들 말고도 주택가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실제로는 더 많을 거야.’

위즈를 끌고 온 잇페인 중 하나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이! ‘나’를 4명이나 죽여 없앤 용자를 데려왔다!”

“멍청한 녀석들.”

주택과 주택이 맞닿아 이루어진 좁은 골목에서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은 잇페인들이 가진 하얀 얼굴보다 훨씬 이질적이었다. 눈 부분으로부터 광대뼈를 지나 수차례 꺾인 붉은 선이 턱까지 연결되어 있어서, 그것은 마치 꾹 다물린 뱀의 아가리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골목에서 모습을 드러낸 잇페인이 위즈의 턱을 움켜쥐고는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사람의 피부가 아닌 딱딱하고 차가운 감촉이 뺨에 와 닿았다.

눈앞의 잇페인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 눈구멍으로부터 시커먼 암흑이 피어올랐다.

위즈는 눈을 질끈 감고 심상세계의 보호에 주력했다. 그러자 위즈의 머리에 어린 휘광이 더욱 강력해지며 마치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가면을 쓴 잇페인이 위즈에게서 떨어지며 혀를 찼다.

“애 먹을만하군. 그 계집이 쓰던 기술이다.”

“계집이라면…….”

“그래. 300년 전 날 물 먹인 그년. 이름을 지우는 게 고작이었던 witch말이다.”

“어떡하지?”

다른 잇페인이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놈을 무력화시켜야지.”

“이 녀석은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자살? 이놈이?”

가면 속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큭큭큭큭. 자살을 시도했다고? 이 녀석이? 죽기 싫어서 잔재주까지 배운 녀석이?”

가면을 쓴 잇페인이 매직스틱을 꺼내 위즈의 가슴을 겨눴다.

“디스트로이어 레이.”

보랏빛 광선이 위즈의 가슴을 뚫어버리고 뒤쪽 건물의 정문을 녹여버렸다. 이런 위력이라면 위즈는 당연히 즉사! 하지만 위즈의 몸은 쓰러지지 않고, 퐁 소리를 내며 세 사람으로 분리되었다.


<세 갈래 운명의 길이 발동 되었습니다.>

<셋으로 나윈 육체는 체력, 마력, 스태미나가 1/3인 상태입니다.>

<셋으로 나윈 육체는 모든 스탯이 20으로 고정됩니다.>

<셋으로 나윈 육체는 이동속도가 초당 5m로 고정됩니다.>


세 사람의 위즈는 전혀 다른 세 방향으로 튀어나갔다. 죽었다고 생각한 사람이 갑자기 세 명으로 늘어나 도주하면 누구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잇페인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발휘했다. 도망치는 위즈들은 잇페인의 벽을 넘지 못하고 붙들렸다.

가면을 쓴 잇페인이 세 사람의 위즈를 둘러보며 다시 키득거렸다.

“그야말로 반쪽짜리로군. 세 명이 한계인가? 게다가 도망치는 게 고작이라니.”

가면 쓴 잇페인은 ‘세 갈래 운명의 길’이라는 스킬의 존재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한번 본 것만으로도 이만큼이나 알아차리다니? 어째서 서바이벌 마스터리의 존재를 이자가 알고 있는 거지?’

위즈는 혼란에 빠졌다.

“얼굴을 보니 가관이군. 어떻게 그 기술을 알아차렸느냐는 거겠지?”

가면 쓴 잇페인이 키득거림을 멈췄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그 기술은 원래 이 몸의 원천 기술이었으니 말이다.”

“뭐, 뭐라고?”

현재 습득한 서바이벌 마스터리는 ‘세 갈래 운명의 길’과 ‘삼위일체’

레미라로 오기 전, 빌헬름텔과 함께 시에니투스 근처의 던전에서 얻은 것이었다. 이 스킬들은 300년 전의 올코너스와 witch가 함께 만든 것이었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잇페인이 원래 자신의 기술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그걸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년이 아무리 잘났어도, 혼자서 그 많은 스킬들을 만들 수는 없다. 참고할만한 게 필요했지. 내가 가진 옴니프레전스(omnipresence)도 그중 하나다. 이름 그대로 어디에서나 내가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그런 스킬이지.”

위즈가 지켜보는 가운데, 가면 쓴 잇페인의 로브가 울룩불룩 요동을 쳤다. 그리고 로브에서 4명의 잇페인이 튀어나왔다.

“정말이지 멋지지 않나? 그 누구보다 나는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다. 어떤 주문을 쓸 수 있는지, 어떤 식으로 싸울 건지. 모든 걸 알고 있다. 눈빛만 봐도 알지. 그런 ‘나’ 만으로 이루어진 1인 군단을 거느린다고 생각해봐라. 굳이 병참선 같은 걸 신경 쓸 필요도 없다. 이 많은 ‘나’들이 전부 중급 마법사란 말이다. 일제히 디스트로이어 레이만 날려도, 레미라 요새 따위는 통째로 녹여버릴 수 있다.”

위즈는 입술을 깨물었다. 잇페인이 만든 분신은 그 숫자가 많았고, 그것들이 제각각 판단을 내려 각개 전투를 수행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그 하나하나가 중급 마법사인 것 또한 사실이다. 자신이 가진 세 살래 운명의 길이 고작 도주용인 것에 비하면, 엄청난 위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그런 힘이 있다면 진즉 레미라는 함락되어야 정상 아냐?’

위즈는 의문을 품었으니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잇페인은 적이다. 자신의 의문을 풀어줄 하등의 이유가 없으니,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가면 쓴 잇페인이 득의양양하게 소리쳤다.

“세 녀석들은 더 이상 그 어떤 스킬도 쓰지 못한다. 그 계집의 기술도 쓰지 못하지.”

“그렇다면?”

“맘껏 먹어라! 녀석이 가진 힘을 먹고 또 먹어라! 껍데기만 남을 때까지!”

잇페인들의 눈이 일제히 시커멓게 물들었다. 동시의 위즈의 시야도 검게 물들었다. 그리고 위즈는 실험실의 꿈을 강제로 꾸게 되었다. 누나가 ‘편재’를 구하고 서서히 사라져가는 꿈.

“으흐흐흑!”

세 명의 위즈들이 피눈물을 흘려댔다. 스탯을 모조리 강탈한 잇페인들이 입맛을 다시며 물러섰다. 더 이상 빨아봐야 아무것도 안 나왔다.

이제 위즈의 스탯은 그야말로 무능력자의 이름에 걸맞은 상태가 되었다.

힘과 민첩, 지능, 집중력 스탯은 전부 게임을 시작할 때와 같이 10이 되었으며, 행운과 근성처럼 찍어서 올릴 수 없는 스탯들은 1이 되었다.

위즈는 정말 개털이 된 것이었다.

넋을 잃은 위즈를 남겨두고 잇페인들이 레미라 곳곳으로 흩어져갔다. 일단 용병마법사들이 곳곳에서 각개격파 당하고 있으니, 그들을 도우러 가는 것이다.

이제 주택가에는 가면을 쓴 잇페인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셋으로 나뉜 위즈 중 하나만 남겨놓고, 나머지는 디스트로이어 레이로 처리해버렸다. 억지로 악몽을 꾸게 된 직후라 위즈는 저항할 기운이 없었다.

“능력을 모조리 빼앗긴 기분이 어떠하냐고 묻진 않겠다. 난 그 정도로 잔인한 남자가 아니니까.”

가면 쓴 잇페인이 위즈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제안을 하나 하지.”

흐리멍덩하던 위즈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개 같은 녀석!”

아무리 꿈인 걸 안다 해도, 불쾌한 경험을 반복하게 했다. 위즈는 눈앞의 가면 쓴 잇페인이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웠다. 게임 속의 데이터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

“일단 내 얘기부터 들어봐라. 너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일 것이다.”

위즈는 말없이 가면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그것을 허락의 뜻으로 받아들인 잇페인이 입을 열었다.

“핏스톤을 내게 넘겨라. 그리하면 네가 빼앗긴 능력을 다시 돌려주겠다. 아니, 두 배로 보상해줄 용의도 있다. 어떤가?”

“고려할 필요도 없는 헛소리. 그렇게나 핏스톤을 원한다면, 날 조종해서 가져가보시지? 이미 내 심상세계는 너덜너덜해져 있지 않나?”

“꼭 그렇지만도 않더군. 이방인들의 아공간은 아무리 해도 열 수 없다는 걸 안다. 일종의 안전장치 때문이겠지. 내 힘으로는 네 육신을 조종할 순 있어도, 네가 가진 아공간을 여는 행위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네 협조를 바라는 것이다.”

“넌 핏스톤의 마력을 원하는 거지. 핏스톤을 넘기면 레미라를 엉망으로 만들 속셈 아냐?”

“부정하진 않겠다.”

“그런데 내가 순순히 넘겨줄 것 같아?”

“네게 보여줄 것이 있다. 따라와라.”

“가지 않겠다!”

“일단 보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자발적으로 알려주는 것이니 말이다. 만약에 살아남을 수 있다면, 많은 생명을 구할 기회를 얻게 될지 모른다.”

“무슨 소리지?”

가면 쓴 잇페인은 더 이상 대꾸를 하지 않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방비로 드러난 그의 등이 재촉하고 있었다. 닥치고 따라오라고.

할 수 없이 위즈는 잇페인의 뒤를 따랐다.

가면을 쓴 잇페인이 걸음을 멈춘 곳은, 작은 텃밭이 딸린 소담한 가정집이었다. 거주자들은 급하게 피난을 간 듯, 미처 널지 못한 빨래가 바구니 째 굴러다녔다.

잇페인은 정문을 열고 내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잇페인이 눈이 퀭하게 되어서는 바닥에 엎드려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그 손에 들인 것을 본 위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이프?”

가면 쓴 잇페인이 정정해주었다.

“나이프가 아니다. 마법진을 그리는 도구인 마커다.”

자세히 보니 나이프보다는 굵은 송곳에 가까운 생김새였다. 그 뾰족한 끝부분에서 압축된 마력이 뿜어지자 바닥에 환한 빛을 내뿜는 선이 그려졌다. 마력을 보는 눈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눈에 보이는 확연한 마력. 하지만 그만큼 마력의 소모가 심해진 모양이었다.

바닥에 엎드린 퀭한 눈이 이쪽을 향했다.

“너무 힘들다……바꿔줘.”

“여유부릴 때가 아니니까 이대로 계속해라.”

“구두쇠 같으니.”

퀭한 눈동자는 다시 바닥을 향했고, 마커가 움직일 때마다 마법진이 조금씩 완성되어갔다. 가면 쓴 잇페인은 이후로도 이런 마법진이 더 있음을 보여주고는, 다시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왔다.

“내게 저런 것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대세를 위해서는 핏스톤이 필요하니까. 난 무슨 짓을 해서라도 손에 넣고 싶다. 이제 답변을 들려주실까?”

“싫다. 핏스톤은 넘겨줄 수 없어.”

“저 마법진들이 무얼 위한 것인 줄 알게 되면 생각이 달라질 텐데?”

가면 쓴 잇페인이 난데없이 허공에 마법진을 생성해냈다. 환한 빛이 한차례 뿜어졌다가 서서히 사라져갔다. 마력의 공급을 끊은 탓이었다.

“원래 마법진이란 건 이렇게 잠깐 펼쳐 쓰는 것이다. 그걸 영구히 유지시키려면 조금 전처럼 마커를 이용해 새겨야 하지. 그만큼 위력이 강한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 마법진들이 바하르칼이 이 섬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새겨졌다. 당연히 레미라의 마법사들이 만든 것이겠지. 난 그걸 훔쳤다.”

“훔쳤다고?”

위즈는 흠칫했다. 분명 레미라측에서는 위즈에게 지휘관 암살을 맡기면서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것이 마법적인 대응임에는 틀림없는 것. 마법진이라면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다.

“어이없게도 레미라의 마법사들은 무시무시한 마법을 준비했더군. 우리 쪽 마법사들이 마력을 공명시키는 모습을 보았겠지?”

위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꽤나 고난이도의 기술이라 용병마법사 말고는 성공한 사례가 극히 드물었다.

말하자면, 마법사 버전의 집단공격기인 셈이다.

“레미라에서는 그 공명의 고리를 끊는 주문을 준비했다. 너무도 강력해서 환경마력(EMP : Environment Magic Power)을 요동치게 만들 주문을 말이야. 그 결과는 순수한 마력의 대폭발이지. 폭발의 방향이 섬 외곽의 바다방향인 걸로 봐서, 추후 도착할 바하르칼의 후발대를 노린 모양인데……지금 ‘나’들이 그리는 마법진이 완성되면, 그 폭발의 방향은 레미라 섬에 한정된다. 게다가 그 통제권마저 내손에 들어오게 되지.”

확실히 이건 좀 위험하다. 무려 레미라에서 최종결전병기로 만든 마법진이다. 그걸 뺏기게 생겼으니 레미라 섬에 있는 모두가 위험하다. 유저들이야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존재이지만 NPC들은 다르다. 죽게 되면 이걸로 끝. 마법을 가르칠 사람이 없으니 더 이상 마법사 유저는 늘어나지 못할 것이고, 안티 바하르칼은 다시 바하르칼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이야기는 전부 네 입에서 나온 거다. 내가 어떻게 믿지? 설사 네 말이 맞다 해도, 지금쯤이면 레미라의 마법사들이 이상을 느끼고 대응하고 있을 거다. 그러니 쓸데없이 네 말에 홀려서 핏스톤을 넘겨주지 않아!”

“크큭. 그럴 줄 알았지.”

가면 쓴 잇페인이 뒤돌아섰다.

“길을 열어주겠다. 가라. 가서 레미라의 마법사에게 직접 물어보도록 해라.”

“내가 동료를 끌고 돌아오면?”

“설사 레미라의 마법사들이 몽땅 덤벼도 소용없다. 어차피 30분 뒤에는 저 마법진을 가동시킬 테니까. 어서 움직이는 게 좋을 걸? 레미라 요새까지 왕복하는 시간만도 빠듯할 거야.”

멈칫멈칫 걸음을 내딛을 때까지도 가면 쓴 잇페인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위즈는 잽싸게 달려 나갔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살을 애일 듯 날카롭다. ‘세 갈래 운명의 길’의 효과로 인해 이동속도가 대폭 증가된 덕분이다.

“빌어먹을.”

잇페인의 수작대로 놀아나는 것 같았지만, 일단 확인은 해봐야 했다. 정말 레미라 마법사들이 모르고 있다면, 대응할 수 있도록 알려야 한다.


◇◇◇◇◇◈◇◇◇◇◇◇◈◇◇◇◇◇◇◈◇◇◇◇◇


레미라 요새에 들어올 때까지 어떠한 방해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몇 분 전 용병들이 물러갔다고 한다

길을 열어주겠다는 잇페인의 말은 사실이었다.

위즈는 톨네스를 만나 잇페인의 말이 맞는지부터 확인했다.

“이 섬에 마력의 균형을 일그러뜨리는 마법진이 있나요?”

“있지. ‘링 오브 언밸런스’라고 하네만……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지?”

“바하르칼의 용병마법사가 알고 있어요.”

“잇페인이라는 자 말인가? 제법이로군. 눈치 채기 힘들도록 작업했는데. 그래서 뭐라던가? 도망치겠다고 하던가?”

“그게 아니라 마법진을 강탈하겠다고…….”

위즈의 말을 톨네스가 껄껄 웃었다.

“우리가 주민들을 대피 시킨 건, 마법진을 그리기 위해서이기도 하네. 그 마법진은 광역기후 조절마법에 쓰이는 것보다 더 거대하지. 이 섬을 다 덮을 정도로. 우리들은 그걸 하루 이틀 만에 준비한 게 아니네. 원래부터 있던 마법진을 개조했지. 그런데 그걸 오늘 상륙한 자가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다고 보나? 그건 불가능하네. 많은 수의 중급마법사가 동원되지 않고서야 불가능하지. 암. 그렇고말고.”

위즈는 답답함에 가슴을 쳤다. 위즈에게 ‘세갈래 운명의 길’이 있다면, 잇페인에게는 옴니프레전스(omnipresence)가 있다.

“중급마법사가 100명은 훨씬 넘는다고요!”

위즈는 자신이 보고 겪은 일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톨네스는 믿지 못했다. 단순히 위즈가 속임수에 넘어 갔다고만 생각했다.

위즈는 무슨 말로도 톨네스를 설득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잇페인도 이걸 예상하고 순순히 보내주었던 것이다. 이제 돌아갈 시간도 빠듯하다. 위즈가 돌아오건 그러지 않건, 잇페인은 마법진을 강탈해 이 섬을 날려버릴 것이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문득 위즈의 머릿속에 마법진의 크기가 떠올랐다. 뭐가 되었건 지나치게 크면 단점이 많이 따라붙는 법이다. 그걸 잘 알고 있을 마법사들이 어찌하여 거대한 마법진을 고집했을까?

“톨네스. 링 오브 언밸런스를 쓰자고 주장한 사람이 누구죠?”

“렌틸이라는 마법사네. 왜 그러나?”

“뭐라고 하면서 주장하던가요?”

“바하르칼 놈들도 광역기상 통제마법을 사용하는데, 우리 레미라가 꿀리면 안 된다고 하더군. 말이야 맞는 말 아닌가?”

“지금 렌틸이란 마법사는 어디 있습니까?”

“요새에서 부상을 치료하고 있겠지.”

“이곳으로 불러주시죠.”

톨네스는 의아해 하면서도 위즈의 말대로 렌틸을 데려오게 하였다. 잠시 후 렌틸을 부르러 갔던 젊은 마법사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이기에 그러나?”

“렌틸님이 사라지셨습니다!”

“좀이 쑤셔서 밖에 나갔나보군. 그 인간 조금 과격하질 않나?”

“그뿐만이 아닙니다. 의무실에서 치료를 받던 사람들이 모두 독에 중독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독이……렌틸님이 조제한 독이라고 합니다.”

“뭐, 뭐라고!”

톨네스가 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위즈가 앞으로 나섰다.

“그 독은 당장 죽는 성질의 독은 아니겠군요. 그렇죠?”

위즈의 질문을 받은 젊은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루 종일 환각을 보게 만드는 독이지요.”

“당했네요.”

위즈는 신음을 삼켰다. 마법사는 학자계열 직업.

손으로 수인을 맺고 술식을 짜야 할 마법사가 환각을 보고 있다면, 그 마법사는 마법을 쓸 수 없는 상태다. 의무실에 몇 명의 마법사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중독된 인원들이 전투에 참여할 수 없게 된 건 분명하다.

“그자는 분명 잇페인의 사주를 받았을 겁니다. ‘링 오브 언밸런스’를 사용하자는 주장을 한 것도 마찬가지이겠죠.”

“렌틸이 이런 짓을 하다니…….”

“이제 제 말을 믿으시겠어요? 시간이 없습니다. 잇페인이 마법진을 가로채는 데 성공하면, 이 섬은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가루가 됩니다. 그걸 두고 보실 겁니까?”

“그럴 수는 없지!”

톨네스는 요새를 뛰어다니며 사람을 모았다. 요새를 지킬 인력을 제외한 예비대를 모으겠다는 것이었는데, 대부분이 밤을 새며 연구에 몰두하던 자들이라 깨우는 게 힘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위즈는 문득 핏스톤이 걱정되었다. 급하게 펫 인벤토리에 집어넣느라 상태를 제대로 확인 못했다.

“디스트로이어 레이를 맞은 건 아니지만 무척 괴로워했었지.”

펫 인벤토리를 열고 핏스톤을 불러낸 위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요새인가?』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어. 그보다 몸은 어때?”

『잇페인 그 녀석이 내 몸에 저주를 걸려고 시도했다. 저주를 해소하느라 몸 상태가 안 좋았던 것뿐이다.』

“지금은 괜찮아?”

『다시 싸울 수 있다. 그러고 보니…그 몸은 분신중 하나로군.』

“겨우 도망쳐 나온 건 아냐. 잇페인이 보내줬거든.”

『어떻게 된 거지?』

위즈는 레미라가 준비한 최종병기급의 주문 ‘링 오브 언밸런스’의 존재를 알려주었다. 그것을 가로채며 위즈를 협박했던 사실까지 함께.

“잇페인은 여전히 널 노리고 있어. 내 예감이 맞다면, 이건 네 마스터와도 관련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네 마스터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어. 말끝마다 ‘계집’이라고 지칭했지만……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을 할 때 잇페인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던 것 같아. ”

『그럴 수밖에 없지. 마스터의 저주로 인해 중상을 입었을 테니까. 잇페인은 저주 쪽이 특기인 자다. 그런데 저주에 대해 잘 모르는 마스터가 건 저주에 크게 당했다. 어른이 어린애의 주먹에 맞고 기절한 꼴이다. 창피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겠지.』

“흐음……아무튼 지금 네 마스터는 없어. 하지만 잇페인은 살아남아 있지.”

『아쉬울 따름이다.』

“잇페인을 막을 방법이 없겠어?”

『마스터라면 ‘밤하늘 아래 어둠 가시밭’을 이용하셨을 것이다.』

“그건 범위공격 스킬이잖아?”

『일종의 변칙적인 응용방법인데……가시를 통해 마력을 강제 주입시키는 것이다. 대체로 소환물을 강탈할 때 사용하셨지.』

“아! 나도 그런 적 있어!”

위즈는 대련모드에서 빙글뱅글의 구울을 빼앗았던 걸 기억해냈다. 그때 생성된 네크로맨시 스킬은 지금 스킬창에는 남아 있지 않지만, 그때 위즈는 빼앗은 언데드들을 바탕으로 스캐빈저 스킬까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그렇다면 잇페인을 막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그 뒤로는 그런 일이 없었는 걸? 다시 시도해도 될지는 미지수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는 잇페인에게 능력치를 빼앗겨서 초보나 마찬가지라고.”

『네가 강하고 약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마스터가 물려주신 스킬은 그런 걸 초월하는 것. 게다가 빠른 시간에 마법진을 되찾으려면 이보다 더 적합한 방법이 없다.』

핏스톤의 말을 들고 보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정도가 한계다.

“알겠어. 일단 도착하면 ‘밤하늘 아래 어둠 가시밭’을 사용해볼게.”

『충분히 마력을 공급해야 할 것이다.』

잠시 후 톨네스가 한 무리의 마법사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잠옷을 입고 눈곱을 단 꾀죄죄한 자들이 매직스틱과 마법시약만 달랑 들고 나선 모습이 우스꽝스러웠지만 위즈는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다.

“이제 출발하지.”

톨네스는 위즈의 손을 잡더니, 나머지 한손만으로 수인을 맺고 캐스팅을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레비테이션 주문을 사용했습니다.>


“중앙을 지키는 중급마법사 예비대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

톨네스와 위즈가 날아서 요새를 빠져나가고, 그 뒤를 십여 명의 마법사들이 뒤따랐다. 이들이 전부 중급마법사이니 상당한 전력이 됨은 사실이다. 하지만 잇페인의 분신을 떠올린 위즈는 이들만 가지고는 버거울 거라 생각했다.

“사람을 더 부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레미라의 마법사는 숫자가 아닌 질로 승부하네.”

핏스톤은 다시 땅과 일체화된 상태로 위즈를 따랐다. 잇페인의 분신들이 훼방 놓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부터는 저 혼자 갈게요.”

위즈는 걸어서 잇페인에게 갔고, 레미라의 마법사들은 은신주문으로 몸을 숨긴 채 천천히 조여들었다.

잇페인은 조금 전 주택가의 그 위치에 그대로 서 있었다. 기괴한 모습의 하얀 가면이 위즈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움직였다. 위즈는 이자가 본체인지 분신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동안에 분신으로 바꿔치기 했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지금은 잇페인을 상대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레미라를 구하는 게 우선이다.

“요새에서는 뭐라고 하던가? 내 말이 맞다고 하지?”

“마법진이 ‘링 오브 언밸런스’를 사용하기 위해 깔아둔 게 맞다고 하더군.”

“이제 순순히 핏스톤을 넘기는 게 어떤가?”

위즈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아.”

“안타깝군.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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