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변수들 36화 [변수 발생(2)]
앨리스와 현실세계(Alice and the Real World)의 첫 부 "꿈의 세상"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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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고등학교 당직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형준과 진수, 그리고 나중에 합류한 탁민호는 잠시 헤어진 사이 자신들이 겪은 일들, 그리고 자신들의 각각 가진 그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단 아이들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는 아니라는 것.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까웠으나,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들이 영화에서나 보던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물론 크게 신경 쓸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그들의 상태에 대해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일단 아이들이 단순히 분노가 극도에 달한 상태라면, 되돌리는 것 또한 그 분노만 조절하도록 하면 될 것 같았다. 단순히 분노라면, 지금 상태에서 맞닥드려 그들을 설득하거나 바꿀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정신에 영향을 준 무엇인가를 없애거나 바꾼다면 그들도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만 탁민호는 이 사실이 이들이 아이들에게 대응하는 것을 조금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상대방의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가능한한 충분한 반격의지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의 정신이 일시적으로 누군가나 무엇인가에 의해 영향을 받은 것이라면 결국 이들의 대응방법은 소극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탁민호 자신이 아이들이 휘두른 방망이에 직접 맞아봐서 알았다.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아이들은 상대방의 생명을 고려해 공격하지 않았다. 결국 이런식으로 가다가는 가장 소극적 대응인 도망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들이 가야 할 곳은 많았고, 그 중간에 장애물도 많았다.
아이들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이후에는 탁민호가 교문 밖에서 겪은 일, 그리고 닫혀진 급식실 외부 출입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다.
"결국 교문으로 나가 외부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군요"
형준은 일말의 희망을 그 곳에 걸고 있었다. 비슷한 수준의 병력이 붙었을 경우 양쪽 다 피해가 커진다. 하지만 병력차가 일정수준 한 쪽 편으로 쏠릴 경우에는 양쪽 다 큰 피해를 입지 않고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다.
물론 저 아이들이 그런 것들을 고려하여 움직이지는 않겠으나, 경찰이 개입할 경우에 오히려 저 아이들에게도 큰 상처를 입히지 않고 제압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방법은 시도할 수 없었다.
"그렇죠. 아무래도. 통신이 연결이 된다 하더라도... 시간의 차이가 생겨 버려서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시간의 차이. 이것은 서로 이야기를 해 봐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학교의 시간은 이미 하루가 끝나고 새벽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외부 시간은 그보다는 훨씬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같은 비율로 느리게 흐르는 것인지, 아니면 때때로 바뀌는 것인지는 몰랐다.
"공간도 마찬가지로 외부와는 다른 위치에 들어와 있는 것 같고요. 순찰차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학교였다고 하니 말입니다"
공간의 차이까지. 순찰차는 분명 출동했었다고 했다. 지구대장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었다. 순찰차의 사이렌 소리도 탁민호가 헷갈려 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하고 발견한 것은 텅 빈 학교. 시간은 아마도 외부에서 느리게 흐르는 것 같으니 학교가 텅 빌 수는 없었다.
시간상으로는 어떤 시점에든 순찰차의 경찰관들이 교내로 들어와 이들과 접촉을 해야 했으나, 지구대장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그들이 학교에서 발견한 것은 없었다고 한다. 이는 공간이 시간처럼 왜곡되어 있을 수 있단 사실을 의미했다. 물리학적인 지식은 거의 없는 탁민호였으나,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공간과 시간의 왜곡이라... 진수야, 너 SF소설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 이런거 어떻게 생각해?"
"글쎄요. 소설은 소설일 뿐 이잖아요. 이게 현실이 되면 이미, 소설에서 보는 내용과는 다르게 흐르겠죠"
"말도 과학소설 좋아하시는 분 처럼 말씀하시는 군요, 한진수 선생님은"
그래도 여유가 좀 생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따로 따로 흩어져 있을 때 보다는 분명 함께 있는 것이 안심이 되었다. 탁민호가 경찰관이라고 하더라도 이 곳에서 그는 단순하게 한 명의 경험자일 뿐 이었다.
"그나저나, 그러면 탁민호 경위님은 급식실로는 들어가질 못 하신 거네요?"
어차피 이상한 일은 일어나고 있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급식실 외부 문이 잠겨있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혹시라도 이상행동을 보이는 아이들이 급식실로 진입을 하려고 했다면 이해가 가능하나, 탁민호는 급식실 방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는 듣지 못 했다.
그들이 외부에 나왔다는 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은 박병준 교감 뿐 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를 비교적 아는 사람도 급식실에서는 박병준 교감밖에 없었다. 이 말은 누군가가 그들을 외부에 고립시키려 마음먹고 급식실 외부 문을 잠근 것 이라면, 그것은 박병준 교감의 의도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에 알 수 없는 사람의 행동이 추가되면, 상황은 너무 복잡해질 것 같았다.
"전부 막혀있었습니다. 외부 문 까지는 우리가 따로 잠그거나 하진 않았잖아요. 나오려면 열어야 했었으니까요. 외부와 내부 문 사이에 누군가 없다면 외부 문을 잠그면 우리가 바로 고립되는 것을 알텐데"
"우리가 나와 있다는 것을 모르는 학생이나 선생님이 안전을 위해 외부도 잠궈놨다고 생각해야겠어요"
일단은 박병준 교감을 함부로 의심하기 위험했다. 과거와 현재를 간접적으로나마 모두 겪은 사람은 박병준 교감 밖에는 없었다.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렇죠. 아니면, 박병준 교감선생님께서 설마 그러셨을리는 없겠죠.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네, 참. 선생님들, 혹시 찾으시던 그 지하실 입구는 찾으셨나요?"
"아니요. 급식실에서 경위님과 헤어진 뒤 본관 넘어와서 복도 지나가다가 곧바로 한 학생에게 추격당해 여기까지만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 아이가 문을 두드리고..."
"제가 찾은 것 같습니다"
[미희의 집]
데자뷰를 보는 것 같았다. 비는 다행히 오지 않았다. 차가 미끄러질 날씨도 아니었고, 환각을 더 이상 보는 일도 없었다. 다만, 그 기분이 같았다. 전날 형준에 대한 기분나쁜 꿈을 꾸고나서 형준을 만나보기 위해 선영고등학교로 가던 때의 그 기분.
학교까지 별일없이 도착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무엇인가 일어날 것 같은데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언젠가는 반드시 일어나야 할 것 같은 일에 대한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원래 매도 맞을 때 보다 맞으려고 줄 서 있을 때가 훨씬 더 무서운 것이었다.
학교 교문까지 보이고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문을 지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조금 이상한 것은 주차장에 차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출근하는 선생님들 중 대부분이 자가용으로 출근을 할 텐데, 다들 어디로 간 것인지 차는 한 대도 없었다. 기분 나쁜 적막이 흐르는 학교였다. 전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는 또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다.
'이상하네? 다들 출근 하셨을 텐데 차는 한 대도 없네?'
본관동으로 가는 긴 계단을 전부 오르니 숨이 찼다. 평생을 자신의 신체만 들고 다니다가, 아직 작지만 한 명분의 다른 생명을 지고 가니 더욱 움직이기가 힘이 들었다. 너무 급한 운동은 전혀 좋지 않았다. 게다가 자신의 임신상태는 조금은 위험한 상태였다. 안정이 필요했다. 지금 상황에서 안정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 했다.
숨을 조금 고르고 본관동으로 들어갔다. 불이 전부 꺼진 모습이었다. 이상했다. 형준은 분명 오늘 병원에서 곧바로 학교로 출근한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학교에는 아무도 없었다. 행정실, 교무실, 교실들. 모두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다시 본부교무실에 내려와 빈 자리에 앉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외부 행사가 있으면 누군가는 교내에 항상 남는다고 했는데. 일찍 퇴근하신건가?'
시계를 4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퇴근시간은 4시 30분이었다. 일찍 퇴근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가 계속 이상했다.
지금은 여름이 막 시작되는 시기였다. 산중턱에 있는 선영고등학교에는 벌레 소리가 끊이지 않게 들린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학교에 들어온 뒤, 벌레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여기저기 바닥에 나 있는 잡초들 밖에 없었다.
[선영고등학교 급식실]
날씨를 봤을 때 벌레소리만 가득해야 할 새벽. 이날따라 어떤 벌레도 울지 않고 조용한 적막감만이 흘렀다. 아이들과 교사들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소리만 간간히 들리는 한밤이었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함께 다니는 공학이었기에, 일단 남학생들은 급식실바닥에서, 그리고 여학생들은 내부에 있는 급식실 조리사분들이 쉬는 방들에서 있었다. 그리고 남교사, 여교사들이 각각 동성의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박병준 교감은 남교사들과 함께 입구 쪽에서 잠을 청하는 중이었다. 아이들 거의 전원이 불면증이 있다더니, 피곤했는지 아니면 그 문제가 지금은 잠시 이들을 놓아 두었는지 아이들은 잘 자는 것 같아 보였다. 일단 보기로는 그런 상태였다.
불면증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사람을 조종하는 그들의 방법일 수 있었다. 그리고 사이렌. 어떤 방식으로 그들이 이 세계에, 지금은 작은 학교에 국한된 범위지만, 영향을 주고 있는지 두 번의 사건으로 약간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지만, 일단 박병준은 그들의 생각에 동의했다. 무엇인가 지금 현실에서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이 어찌되었건, 이번 일은 잘 해결될 것이었다. 과거 사건처럼.
-쿵쿵쿵쿵....-
급식실 안쪽 방이 소란스러워지는 소리가 났다. 뒤척이다 화장실을 가는 아이나 교사가 있거니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 선생님!"
"꺅~!!!"
박병준 교감과 옆에서 자던 다른 남자 선생님들이 곧바로 일어났다. 아이들은 하나 둘 고개를 들어 소리나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남교사 몇 명이 곧바로 그 공간으로 뛰어들어갔다.
이제 학교 안에 안전한 공간은 없었다.
앨리스와 현실세계(Alice and the Real World)의 첫 부 "꿈의 세상"편입니다.
- 작가의말
‘이는 공간이 시간처럼 왜곡되어 있을 수 있단 사실을 의미했다. 물리학적인 지식은 거의 없는 탁민호였으나,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본문 내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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