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변수들 54화 [최후(3)]
앨리스와 현실세계(Alice and the Real World)의 첫 부 "꿈의 세상"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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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재건연구소-미래]
기계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가능한한 쓸 수 있는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야 했기에 실험실 내부의 전등까지도 희미해지고 깜빡거렸다.
"성공입니다!!!"
위치포착 및 정신회수까지 모두 성공이었다. 적어도 컴퓨터의 화면이 보여주는 수치로는 그랬다. 누워있는 여성의 뇌파가 급격하게, 그리고 불규칙하게 요동치다가 일정 수준으로 규칙성을 되찾았다.
"다행이네요 일단"
유지현 박사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옆에 있던 정장의 남성을 쳐다보았다. 표정에는 전혀 변화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자신 만큼이나 지금 이 순간을 기다려온 사내였다.
자기를 어머니라 부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만남의 인연이었다. 그것이 작은 것은 분명 아니지만 그만큼이나 큰 것이 바로 혈육이었다.
조금만 더 확실해진다면, 이 남자는 자신의 친어머니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게 될 것이었다.
그리고 유지현박사 개인적으로는 물어볼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과연 아들이 그것까지 허락해 줄 지는 모르지만..
"어? 신호가 다시 약해집니다! 뭔가 변화가.."
[선영고등학교 운동장-아이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처음에는 잘못 들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흔해빠진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도 전혀 나지 않는, 마치 모든 소리를 잠식하는 대기를 가진 이 곳에서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어.. 뭔가 들리기는 했는데.. 뭐였지?"
뭐라고 말한 것인지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하지만 셋 모두 어떤 소리를 듣기는 한 것 같았다. 잘못 들은 줄 알았던 소리가 몇 번 나자 아직 아무 말도 없는 지연이 가장 먼저 발걸음을 멈췄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로의 모습만 간신히 확인할 수 있는 어둠 속에서 그들은 길을 잃었다. 그나마 들리는 어떤 목소리도 너무 작고 답답하게 들렸다.
"얘들아, 어디있니"
처음보다 조금 커진 목소리. 같은 내용의 반복이었다. 이 상황에서 반복되는 내용의 목소리는 그들의 불안감만을 가중시켰다. 혹여 이성을 잃은 친구들이라면 지금처럼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더욱 위험했다. 대답을 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도 분간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해? 대답을 해?"
"아니. 일단 기다려보자. 조금만.."
새민이 대답을 해야 좋을지 말아야 좋을지 현규에게 물었는데, 현규는 생각에 또 빠져 있었다. 이럴 때는 참 답답할 때도 있었다. 오히려 가만히 있던 지연이 대답했다.
현규와 새민은 분명 상당히 불안하게 느끼고 있는데, 이번만큼은 지연의 모습이 오히려 태연했다. 여성의 목소리임을 알아차렸기 때문인지 그녀는 대답을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은 기다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제껏 대부분의 이성잃은 친구들은 남학생들이었는데, 급식실에서는 여학생들이 단체로 그런 행동을 보였었다. 섣부른 행동은 위험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전과는 다른 존재인 것 같았다.
"길을 잃었구나. 이리로 와. 소리가 나는 곳으로"
소리가 들릴 때 마다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이 셋은 그 자리에 멈춰 가만히 있었는데 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은 점점 거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방향으로 가든,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도망을 치든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선택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대답을 해 보자"
현규가 드디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도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들은 이 넓지도 않은 운동장에서 길을 잃은 상태였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이정표가 있다면 일단 그리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설사 그 곳이 위험한 곳이더라도 이 어둠 속에서 계속 있을 수 는 없었다.
"좋아. 거기 누구세요!"
지연이 먼저 정체모를 부름에 대답을 했다. 만약 저 소리의 근원이 그 존재들이라면 곧 위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대답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학생이구나. 너희들 괜찮니?"
다행이었다. 조금 이성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위험한 친구들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누군지를 몰랐다. 이 상황에 운동장이 있는 여성의 목소리. 뒤늦게 느끼기는 했지만 학생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나이가 어느정도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누구세요? 저희를 공격하실 건가요?"
새민이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 '나 너 공격할 거야'라고 말하고 공격하는 나쁜 사람은 없겠지만, 위험했던 그 아이들은 대답조차 하지 않을 것이었다.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이제까지의 상황을 보았을 때 그들은 대화가 통하는 존재들이 이미 아니었다.
불과 이틀 전만 하더라도 자신들과 웃고 떠들던 친구들이었으나, 사건이 시작되고 그들은 단지 포식자들일 뿐 이었다.
"아니야. 도와주러 왔어. 그런데 상황이 좋지 않구나. 너희들 무엇을 찾고 있니?"
마치 잘 알고 지내던 옆집 누나와 같은 말투였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 졌다.
"나무같은 것을 찾고 있어요"
"나무?"
"네, 선생님께서 지금 나무같은 것을 찾아서 부수라고 했어요. 그런데 보이지가 않아요, 앞이"
"앞이 보이지 않는구나. 셋이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걸어 오겠니?"
어차피 방법은 그들의 시야를 보이게 해 주던가 아니면 목소리를 따라오란 것 밖에는 없었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들을 유인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위험을 감수하려면 상대방이 누군지는 알아야 했다. 혹 그들을 속이려는 것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속일 수 있겠지만, 그것까지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유형준 선생님 아니? 유형준 선생님과 결혼한 사람이야. 이러면 믿을 수 있겠지?"
그들 셋에게 있어서 새로운 인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어른들이 학교 안에서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이 사람까지 고려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현규와 새민, 그리고 지연은 손을 꼭 잡은 상태로 목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선영고등학교 운동장-어른들]
"뭐가 좀 보여요?"
형준은 앞서 가는 유기준에게 물었다. 어둠은 정말 컴컴했다. 그리고 이 특유의 분위기는 불안감을 극도로 고조시켰다. 이미 학교 본관의 모습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어둠의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두 개의 조각배 같았다.
"아뇨.. 말씀하신 대로 오른쪽에 스탠드 구조물 만지면서 가고 있는 중이에요"
계단을 내려오자 그들의 앞에 어떤 것도 보이질 않았다. 유기준도 이 학교의 졸업생이긴 했으나, 형준만큼 최근까지 학교를 온 적은 없었다. 그 사이 학교도 많이 변해 있었다.
시야가 이런 상황에서 운동장 가운데로 직접 가로질러 목적지까지 가다가는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무슨 학교 운동장에서 길을 잃을까 싶긴 했지만 그들은 이미 이상한 일들,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일들을 충분히 겪은 상태였다.
형준의 제안으로 움직임이 조금 더 자유로운 유기준이 앞서서 운동장 한 편에 늘어서 있는 스탠드를 만지며 나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형준은 한쪽 팔로는 그의 어깨를 잡고, 나머지 한쪽 팔로는 기계를 손에 든 상태로 따라갔다.
"그거 무겁지는 않으세요?"
유기준은 형준이 지금까지 서서 따라오고 있는 것만 하더라도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의사인 그는 응급실에 들어오는 수많은 환자를 봤다. 그리고 오늘 형준이 흘린 피의 양을 고려했을 때 그는 이미 쇼크가 왔어야 했다. '이것도 지금 사건의 영향인가'
"무거워요. 그래도 괜찮으니 앞 잘 보고 따라 가세요"
그렇게 둘이 한 오 분을 걸었을때 였을까. 갑자기 유기준이 멈춰섰다.
"끊겼어요. 스탠드 구조물이"
형준은 점점 더 가빠지는 호흡을 잠시 고르고는 자신들의 위치를 계산했다. 계단으로 부터 직선으로 뻗은 스탠드의 끝에는 약간의 간격을 두고 담벼락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담벼락을 따라 왼쪽 방향으로 가다보면 그 끝에 운동장의 구석이 나올 것이었다.
"천천히 조금 더 갑시다. 벽이 나올 거에요"
한 세월이 다 가는 것 같았다. 평소라면 대략 열 발자국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거리지만, 지금은 그들의 눈이 보이질 않는 상황이었다.
"만져졌어요"
"그러면 이제 왼쪽 방향으로 가면 되요"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형준의 호흡이 점점 더 가빠지는 것을 유기준도 느꼈다.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걱정됬다.
그 때, 유기준의 뒤를 따르던 형준의 어깨에 누군가가 손을 얹었다.
[선영고등학교 운동장-아이들]
목소리의 근원지는 멀지 않았다. 정확하진 않았겠지만 이리저리 방향을 따라 걷다보니 멀리서 빛이 보였다. 전기로 만드는 불빛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무엇인가 다른 빛.
마치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적 가지고 놀던 야광볼에 발하는 빛과 같았다. 주변을 밝혀줄 만큼 강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려줄 정도의 빛이었다.
"저거 보여?"
앞서던 현규가 새민과 지연에게 물어봤다. 모든 것이 꿈같은 상황이라 자신만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닌지 확인해야 했다. 새민과 지연은 아주 작게, 혹시라도 적일 수도 있으니 거의 자신들만 들릴 정도로 대답했다.
"응"
가까이 가서 확인해야 했으나, 한번 더 불러보기로 했다. 너무 가까워지면 도망칠 시간도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거기 있는 분이.. 사모님이신가요?"
"어디를 말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내가 보이니?"
현규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렇게 빛을 스스로 발하는 상황이라면 자신이 보인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을텐데 이 목소리의 주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옆에 있는 새민과 지연을 바라보았으나, 그런 빛은 없었다. 어둠 속 어렴풋이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 그 외에는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 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빛이 나는 대상이 하나 더 있었다. 빛을 발하는 사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 어쨌든 일단 가까이 가봐야 했다.
아이들 셋은 빛이 나는 사람 가까이 다가갔다. 여성이었다. 그리고 어떤 움직임도 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유령같은 존재였다. 이 어둠 속 홀로 약간의 빛만을 가지고 미동도 없는..
"누군지 보이니 혹시?"
목소리는 다시 들렸다. 하지만 아이들이 보고있는 그 형체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목소리의 근원지는 이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조금 이질적인 기분이 들었다.
정말 어떤 움직임도 느낄 수 없었다. 숨조차 쉬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 보자.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아"
"그래. 이상하긴 한데 불안하지는 않네"
운동장에 진입한 이후 계속해서 느껴지던 밀도 높은 불안한 기운은 이 사람에게 다가갈 수록 희미해 지는 것 같았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기에 오히려 기이할 수도 있었지만, 이성을 잃은 아이들을 봤을 때의 두려운 감정은 들지 않았다.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위치까지 도달한 이들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서 있는 사람은 미인이었다. 하지만 마치 동상과 같은 느낌이었다. 살아있는지도 의문이었으나, 죽은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 어둠 속에 홀로 빛을 내고 있었다.
현규가 무심코 손을 갖다대려 하다가 여성인 것을 생각해 내고는 지연을 바라보았다. 지연은 현규의 시선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하고는 그 여성에게 손을 댔다.
손에 만져지는 감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는 지연의 손이 그녀의 몸을 그대로 통과했다. 지연의 손까지 보일 정도의 투명함이 있었다.
"누군지 보이니, 얘들아?"
다시 목소리가 그들을 불렀다. 유령인지 아니면 또 헛것을 보는 것인지 생각을 하다가 현규가 대답했다.
"저, 혹시 임신하셨나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현규는 그 사람을 보고 알아차렸다. 그 여성의 배가 임산부의 배처럼 살짝 나와 있었다. 그리고 아무런 움직임이 없고 목소리만 들릴 뿐 이었다.
"임신한 여성이 혹시 서 있니? 하늘을 바라보면서?"
"네. 아무 움직임도 없고... 유령같아요"
유령. 정확한 표현이었다. 하지만 영화에서 나오듯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유령의 모습은 아니었다. 무엇인가 다른 공간, 우리가 알 수는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다른 차원이 현실 세상에 겹쳐 보이는 느낌이었다.
"무서워 할 것 없어. 그게 내 모습이야. 지금은 이렇게 목소리로만 알려줄 수 있고... 너희들이 찾는 그 나무가 가까이 있을거야.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의 반대편, 나의 뒷편으로 걸어가"
여성에서 나오는 빛 외에 다른 빛의 위치와 같았다. 곧바로 셋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훨씬 빠르게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어둠 속에 빛이 있었다.
앨리스와 현실세계(Alice and the Real World)의 첫 부 "꿈의 세상"편입니다.
- 작가의말
달리자..달리자.. 완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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