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변수들 44화 [돌입(4)]
앨리스와 현실세계(Alice and the Real World)의 첫 부 "꿈의 세상"편입니다.
[미희-선영고등학교?]
이 연구소의 공식명칭은 인류재건연구소였다. 국가 재건도 아니고 인류 재건이라니. 말 자체에 어떤 종말론적 재앙의 회피를 목적으로 하는 듯 했으나, 공식명칭은 공식명칭일 뿐, 항상 이 명칭과 연구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연구소가 개설된 후 십 수 년간 진행된 연구들을 살펴보자면 바이러스 무기 개발부터 대처능력 확보, 핵에너지에 대한 대체에너지 개발 및 무기화, 태양계외 인류생존가능한 행성 연구, 화성이주능력 확보 등 사실상 서로 관련성이 떨어지는 연구들을 진행해왔다.
수많은 프로젝트들이 이 곳에서 일정기간 동안 진행 됐지만, 다 종료되고 현재 남아있는 연구는 두 개 뿐이었다. 하나는 박유성 박사 연구팀의 '불로불사에 관한 연구',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유지현 박사 연구팀의 '타임머신'이었다.
이는 이제까지 진행된 연구들 중 성과를 그나마 어느정도 꾸준히 내고 있는 프로젝트가 이 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유성 박사 연구팀은 기존 불로불사의 비법을 생물학적 조정으로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인간의 정신유지 측면으로 전환시킨 실험계획을 진행 중이었고, 유지현 박사의 '타임머신'은 실제로 무생물을 과거로 보내는 것에는 성공을 한 것 같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생길 수도 있는데, 과거나 미래로 무엇인가를 보냈다면 그 사실을 어떻게 확인할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막상 이쪽에서 과거로 핸드폰보낸다더라도 보내진 핸드폰이 다시 현재로 돌아올 때 까지 그 자리에 있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시간이동의 문제는 시간을 초월한 통신의 문제도 다시 만들어낸다. 과거나 미래로 보낸 물건이 현재 시간으로 자신이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문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지현 박사팀은 다양한 시도를 하는 중이었는데, 그 중 하나가 무생물이 아닌 생물을 보내 그 쪽에서 현재까지 도달할 수 있는 신호를 만들어 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생물은 인간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인간을 과거로 보낸다는 것인데, 이것에는 매우 큰 위험이 따랐다. 생물체를 아주 빠른 속도로 움직이도록 하더라도 그 생물체의 몸에 큰 부담이 갈 수 있다.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는 것은 더욱 큰 부담이었다.
세 번의 실패와 사상자가 발생하고, 사실상 마지막 한 번의 기회만을 남겨둔 상태. 시간이동을 시키기 위해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시간여행을 위한 파장을 찾아야 하는데, 무생물의 그것과 생물체의 그것이 같을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유지현 박사의 앞에 과거에서 왔다는 한 여성이 누워있었다.
"말씀하신 2020년의 모습 확인 좀 해 주시겠어요? 여기 사진자료 보여드릴께요"
유지현이 미희의 눈 앞에 스크린을 펼쳐놨다. 미희에게 익숙했던 컴퓨터 모니터 같은 화면이 아니라 허공에 붕 뜬 홀로그램 속에 나타나는 사진들을 보며, 이 곳의 시각이 자신이 살던 세계의 시각과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고 절망했다. 분명 신기함과 기대감 보다는 절망이었다. 삶이 아무리 편해지고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함께 하던 사람들이 모두,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사라져버린 시대.
"네. 맞아요. 똑같아요"
울지 않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시 눈물이 흘렀다. 나쁜 기분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계속해서 절망감과 불안감 속에 다시 들어가고 있었다.
"일단 임산부이신 것 같으니 건강상태 부터 체크할께요. 아까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저희도 어떻게 당신이 이런 엄청난 여행을 하게 되신 것인지 몰라요. 여기는 지금 연구소에요. 저는 유지현이고, 지금 연구하는 내용은... 이름이 어떻게 되셨죠?"
"미희 입니다"
"아, 미희씨. 지금 저희가 연구하는 내용과 미희씨가 이 곳에 들어오게 된 것에 어떤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되요. 저희는 '타임머신'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타임머신이라니. 과학소설에서나 나올 이야기를 지금 굉장히 과학자로 보이는 여자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타임머신... 이요?"
"네, 저희가 그걸 연구하고 있어요. 실제로 보내는데는 거의 성공한 것 같고요.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만약 미희씨가 정말로 '과거'에서 왔다면 미희씨는 미래로 시간여행을 한 것이거든요. 아직까지 우리가 사람을 보내는 것에 성공한 적이 없어서, 괜찮으시다면 며칠 저희 연구소에서 지내시면서 적응도 좀 하실겸 시간을 보내시는 것이 어떠실까요?"
사람을 보내는데 성공한 적은 없다. 이 말이 뇌리에 박혔다. 자신은 그러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갇혀 버린 것인가.
"제가...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그러면?"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꾹 참는 중이었다. 하지만 약간씩 흐르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 아직은 방법이 없습니다만, 저희가 그 때문에라도 미희씨를 며칠간 조금 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밖으로 나가시더라도 주민등록이나 홍채, 지문등록을 새로 하셔야해요. 그리고 국가에서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요. 이런 경우는 그 쪽 입장에서도 너무 큰 일이라 아마 한동안 피곤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 처리를 저희가 도와 드릴테니 조금만 협조해주시면 서로 좋을 것 같아요. 임신하신 상태니 저희 쪽에서 그 부분에 대한 케어도 해 드릴수 있고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 길은 이 장소일 것이었다. 형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아이가 있는 배를 잠시 쳐다보았다.
"돌아가는 것이 가능하도록 해 주세요"
[선영고등학교 양호실]
"내가 그런 선택을 했다고?"
박병준 교감은 스스로의 선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무의식이라고는 하더라도 선택 자체는 의식적으로 했을 것이다. 단지 그 기억을 꺼낼 수 없는 공간으로 집어넣은 것일 텐데, 자신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낸 그 존재들의 계획에 동조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이 평생을 바친 학교가 아수라장이 되고 아이들과 교사들이 다치게 될 계획에 협조를 하다니...
"선생님께서도 정상적인 결정을 내릴 만한 상황이 아니셨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선생님께서 가져가신 그 타자기 같이 생긴 기계가 실제로 선생님께서 물리적으로 들고 가신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정신적인 부분으로 선생님의 무의식 내부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것을 통해 선생님께서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고요."
계현중은 박병준 교감이 그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본 것이 박병준 선생님의 무의식이라면 자신이 이 내용을 말했을 때 그것이 그의 의식수준으로 떠오를 것이었다.
반면 대략적인 내용을 들었음에도 박병준이 새로이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만의 무의식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억지로 그의 내면에 쌓아놓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그들이란 지금 우리같은 인간도 아니란 말이군... 우리가 그들에 대하여 그러면 무엇을 할 수 있는건가?"
계현중이 본 것은 박병준 선생님이 그 공간 안에서 기계를 통해 어떤 다른 존재와 통신을 하는 것, 그리고 그 화면에 뜬 내용이었다. 그리고 박병준 선생님이 그들의 존재가 무엇인지 물었고, 그들의 대답은 지금 인간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지금 그렇다면 과거에는 인간이었다는 말인가.
[박병준-공간의 기억]
**우리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인간이라고 볼 수 없다**
과거형으로 인간이었다는 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분명 이들또한 인간의 생각을 어느정도 가지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 말 자체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 보다, 내포된 다른 것들을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지금 저와 대화하는 것은 누구라고 해야 합니까?*
**지금의 우리는 신과 가까운 존재.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체가 필요하다. 우리의 몸이 되어줄 수 있는 신체**
위험하다고 느꼈다. 자신들의 몸이 필요하다는 것은 남의 몸을 빌려 자신들이 조종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박병준은 동의할 이유가 없었다.
*몸은 그 사람의 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당신들이 필요로 합니까? 설마 나에게 그런 것을 도와달라는 것은 아니겠죠?*
**아니다. 당신은 때가 되면 우리의 뜻을 따르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협박의 기분이 들었다. 신체도 없는 존재들이 무슨 협박을 할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우스웠다. 그리고 든 기분은 소름 끼치는 것이었다. 자신이 이 공간에 말도 안 되는 일을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자신을 놓아주지 않는다면 자신이 나갈 수나 있을지 몰랐다. 만약 자신 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경험을 갖게 한다면.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다. 이성을 잃은 듯 하게 행동한 그 교사들. 그리고 그들은 사라져버렸다. 이것들이 이들이 꾸민 일이라면 충분히 협박의 카드로 사용될 만 했다.
**일어난 일이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불안한 예감이 적중했다. 하지만 아직 단정은 일렀다. 이들이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에 두려운 것이었다. 능력의 한계를 알면 충분히 대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이들에 대해 좀 더 알아야 했다.
*알겠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르는 것은 나중으로 하고, 당신들은 과거 인간이었습니까?*
**과거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과거이나 과거와 현재, 미래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이 공간에 들어와 우리와 교감한 이상 때가 되면 우리의 뜻에 따르게 될 것이다**
박병준 교감이 서재 의자에서 눈을 떴다.
[선영고등학교 양호실]
계현중의 이야기에 박병준 교감은 곰곰이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자신은 분명 그 기계를 지하실에서 꺼내와 집으로 가져갔다고 생각했으나, 그 기계는 그 공간안에 있었다. 그리고 이사를 사이에 네 번이나 하는 동안에 그 기계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었다.
"자네 말이 무엇인지 알 것 같기도 하네. 그 타자기 같은 것을 집에 가져갔다고 생각했지만 그 뒤로 본 기억이 없었지. 어쩌면 그것을 가져왔다는 것 자체부터가 내 정신 속에서 이뤄진 일이 아닐까"
"아마 맞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선생님의 그 기억을 엿볼 수 있던 것은 아마도 저는 그 기계에 손만 대고 그 공간에서 나왔기 때문인 것 같고요"
'그런데... 어제 탁민호와 유형준 선생, 한진수 선생이 급식실로 돌아오지 않았었다'
자신이 만약 그 공간에서의 내용대로 그들의 뜻에 따르게 되었더라면, 자신이 무엇인가 벌써 일을 저지른 것이 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급식실 외부로 나간다고 했던 때 부터 간밤의 사고까지 기억이 없었다.
"내가 이미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구먼. 계현중 선생, 다른 이들이 돌아올 때 까지 나를 이 상태로 놔두게. 혹시..."
박병준이 침대에서 몸을 떨기 시작했다. 계현중이 놀라 진정제를 찾으려 했지만 양호실에 그런 것이 있을리 없었다. 묶어둔 끈이 풀릴 정도의 경련. 아이들까지 달라붙어 붙잡아야 했다.
경련은 약 이십 분 정도 이어지다 멈췄다. 그리고 깨어난 박병준 교감이 말했다.
"이제야 일의 전말을 알 것 같아"
[선영고등학교 급식실 외부]
"다들 어디 있으려나요?"
바깥에 나와 주변을 불안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던 진수가 말했다. 밖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고, 어떤 불빛도 없었기에 시야가 멀리 나오지 않았다.
"글쎄... 멀리까지 갈 만한 곳은 없는데. 애들만 움직였다면 몰라도 아마 박병준 교감선생님과 계현중 선생님도 같이 다니실테니..."
'본관에서 고층으로 이동하진 않았을 거다. 3학년 건물? 그쪽은 애들이 익숙하지가 않을거고'
쉽사리 예상되는 곳이 없었다. 당직실과 교장실, 그리고 양호실이 본관동 1층에 있었다. 인원은 총 다섯이 움직여야 했을테니 그 세 장소 중 한 곳에 있을 확률이 높긴 했다.
"본관동 1층으로 가 보시죠?"
결국 왔던 장소로 되돌아가야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함께 이동하는 사람의 숫자가 많았다. 의지할 수 있었다.
본관동으로 들어가면 교실이 세개 있고 그 뒤로 양호실, 중앙계단, 교장실, 당직실의 순서였다. 일단 가장 가까운 양호실부터 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현중 교수님이 박병준 교감선생님과 따로 있는건... 괜찮겠죠?"
유기준이 약간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계현중은 초반부터 박병준 교감을 의심했다. 유기준이 들은 이야기는 의사로써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애초에 지금 상황에서 이해될 만한 것은 없었다.
"참, 그러고 보니 계현중이 할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까 공격당하면서 듣질 못했군요. 뭐 별 일 이야 있겠습니까. 박병준 선생님을 해칠 거였다면 굳이 차에 묶어두지도 않았겠죠"
탁민호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으나, 유기준의 걱정같은 불안감은 아니었다. 자신이 아는 계현중이라면 그렇게 크게 잘못된 짓은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조금 전 공간에서 본 메시지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 때 자신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존재는 확실히 우리편인가?'
본관동 입구에 도착했다.
앨리스와 현실세계(Alice and the Real World)의 첫 부 "꿈의 세상"편입니다.
- 작가의말
죄송합니다. 개학일이라 피곤했는데 술까지 한 잔 했더니만 뻗었습니다.ㅠㅠ
기다리셨던 분들께 죄송하단 말씀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 분량은 조금 길게....열심히 할께요~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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