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8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5.30 09:22
조회
123
추천
2
글자
13쪽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DUMMY

마음숲 공방에서 세운 천막이 얄리장터를 채웠다.

네 개의 공방과 상생농장, 반인반천 상인 ‘너나들이’에서도 여러 개의 천막을 세우니 장터가 작은 마을이 되었다.


바람도 좋고, 볕도 좋아 알록달록한 천막이 꽃밭으로 보였다.

어젯밤 한긋장벽의 구름이 비를 뿌려주어 장터에서 광장까지 깨끗하게 씻겼다. 주변 혼알방도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천막마다 내놓은 물건도 수를 놓은 듯 아름다웠다. 어두워지면 초롱과 등롱까지 밝히니 밤늦게까지 북적거릴 것이다.


선아 대천사와 담아를 안내하는 사빈의 얼굴에는 긴장과 설렘이 가득했다.


보듬공방 앞에 이르자 사빈은 화사한 옷감을 들었다. 구름과 나뭇잎 무늬가 염색된 얇고 부드러운 천이었다.


“보듬공방은 실과 천을 다뤄요. 옷도 만들고, 수건도 만들고, 염색도 하고요. 아! 자수도 놓아요.”

귀한 손님을 모셔서인지 말이 자꾸 빨라졌다. 소리도 갈수록 커졌다.


대천사 선아는 옷감을 만져보고 담아에게도 건넸다.


“보듬공방에 고운실이 유명해요. 아, 실 이름이 아니고 수련 혼의 이름이에요. 바느질도 잘하고, 매듭도 잘해서 인기가 높아요. 꼼꼼하고 감각도 있고요.”


사빈이 숨을 헥헥거리자 담아가 까르륵 웃었다.

“숨넘어가겠어. 이따 등불도 보고 가실 거니까 느긋하게 다녀도 돼.”


“예에? 정말요?”

사빈은 기뻐하며 선아 대천사의 소매를 흔들었다.

“그럼 혜존각에서 하루 머무시는 거죠? 예?”


아이처럼 눈을 빛내는 사빈을 보자 선아는 눈웃음을 지었다.

“그래. 하늘열림날 등이 예뻤다고 해서 보러 왔단다. 천천히 돌아보자꾸나.”


사빈은 마음이 들떠 숨을 빠르게 쉬었다 뱉었다.

사람이었을 때도 선아 아주머니가 언제 오나 기다렸다. 인간세에서 다훤은 세 번 만난 것이 전부였지만, 선아는 자주 찾아왔다.


*


그때 사빈은 열한 살로, 다훤이 소개한 하은빛 선생에게 춤을 배우고 있었다. 예인단 전수소 근처에 초가도 한 채 얻었다.

살 곳은 있었지만 먹을 것이 문제였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끝나고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먼 친척이라며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어릴 때 반열님께 신세를 많이 졌어요. 보답하고 싶어요.’


처음에는 어머니도 믿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필체가 적힌 여러 장의 편지를 보고 알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어린 사빈은 선아 아주머니가 오는 날만 기다렸다. 아주머니가 한 번 왔다 가면 집에는 쌀이며 고기며, 땔감에 옷과 신발까지 넉넉해졌다.


*


등불을 켜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

사빈은 천막 사이를 걸으며 공방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제는 여유가 있었다.


“소소공방은 나무를 다뤄요. 조각, 가구, 눙기구, 악기 같은 거요. 종이도 만들고요.”

이번에는 소소공방에서 세 개의 천막을 펼쳤다. 다른 때보다 하나 줄었다.


사빈은 가까이 다가가 나무 조각을 들어보았다. 이리저리 살피다가 그대로 내려놓았다.

‘솜씨 좋은 혼이 다 떠났다지만···.’


예전에 만든 것과 비교하니 확실히 엉성해 보였다.

‘장이 끝나면 목예 선생에게 가봐야지. 검새공방은 괜찮을까?’


사빈은 검새공방의 천막으로 다가갔다. 선아와 담아도 두리번거리며 따라갔다.


“여기는 검새공방이에요. 돌이나 보석을 다루는데, 당연히 무기는 만들지 않아요.”


사빈은 진열대의 조각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산돌이 만든 목걸이와 귀걸이를 생각하니 다른 작품에는 손이 가지 않았다.


장터를 돌아다니는 천인들도 사빈과 비슷했다. 대충 둘러보고는 아날빛숨이나 위즐증가로 가고 있었다.


네 개의 공방에서 서너 개씩 천막을 세웠는데, 물건이 팔리지 않는다니. 그나마 상생농장의 작물과 너나들이의 천막에는 손님이 있었다.


너나들이의 천막에서는 천인과 선인들이 오래 머물렀다. 인간세의 성스러운 땅에서 나는 물건이라 천선계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사빈이 다가가자 너나들이 부단장이 반갑게 뛰어나왔다.

“마고님, 잘 지내셨죠?”


“예. 오늘은 부단장님이 당번인가요?”

“하하, 그렇습니다. 이번에 다섯 명만 와서요.”


사빈이 천막에 서 있는 다른 반인반천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부단장은 사빈이 누구를 찾는지 알고 있었다.

“저, 단가람 때문에 곤란하셨죠?”

“아, 조금요. 부단장님도 들었어요?”


부단장은 정색하며 한 걸음 다가섰다.

“그래도 마고님은 잘 봐주십시오. 그 친구가 어렵게 살았거든요. 잘못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 벌 받을 일은 아니었는데···. 뒤를 봐줄 이들이 없었지요.”

“무슨 일이 있었군요?”


“그때는 인간세도 지금 같지 않았으니까요. 저도 어릴 때 아버지가 천계로 가버렸지만, 먹고 살 만큼 넉넉했거든요. 어머니 쪽 친척들도 재산이 있었고. 하지만 단가람은···, 아버지마저 일찍 죽는 바람에···.”

부단장은 중간에 말을 끊었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는 얼굴이었다.


“예. 알아볼게요.”

“그 친구 때문에 저희도 곤혹스러워서요.”

부단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상산대에서 단가람을 찾느라 너나들이를 곤란하게 한 것 같았다.


사빈은 알았다며 비켜 나왔다. 지금은 손님을 모시고 있으니 더 머무를 여유가 없었다.


담아가 장터를 두리번거렸다.

“마실 건 없어?”


“고샅공방에서 주전부리를 많이 팔아. 따뜻한 음료도 있는데. 선아님, 가실래요?”

“고샅의 과자라면 맛보고 싶구나.”


“좋아요. 이쪽으로 오세요.”

사빈은 성큼성큼 앞장섰다.


고샅에서는 장터에서 공방 옆 마당까지 천막을 드리웠다.

사빈은 마당으로 들어가 뒤뜰과 이어진 자리를 찾아냈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가득했다. 꽃과 열매가 흐드러지게 피었지만, 음식 냄새를 이기지 못했다.


“바론 대천사님도 오시지 않았어?”

사빈은 오색과가 담긴 접시를 차탁에 내려놓았다.


“다훤님께 가셨어. 다훤님도 참···. 엄청 오랜만에 오셨는데, 흑천에서 딱 하루 머물렀다니까. 할 수 있나. 아쉬운 우리가 찾아와야지.”

담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위즐증가에 계실 거야. 거기선 장터가 잘 보이거든.”

다훤이 어디 있는지 고민할 필요 없었다. 무조건 예사달이 있는 곳이다.


장터 가장자리를 따라 가지각색 등이 바람에 살랑였다. 놀뫼마당에서 이즈막광장을 거쳐 가림벽처럼 길고 높게 늘어선 등에 불이 켜지기만 기다렸다.


검새공방에서 깎은 빛나는 돌이 하늘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났다.

장식과 조각이 아름다워 보기만 해도 충분히 즐거웠다. 등불이 켜지면 그 빛을 반사해 더 아름답고 은은해질 것이다.


“불이 없어도 무척 예쁘구나.”

선아 대천사는 등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사빈은 자신이 만든 것처럼 뿌듯했다.

“수련생들이 많이 애썼어요. 나무껍질과 쇠붙이를 손질하는 데도 오래 걸렸대요.”


“과연···. 정성이 들어간 만큼 아름답구나.”

“불을 켜면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하늘에서 땅까지 빛이 이어져요. 다음 축제에는 더 멋진 등을 만든다니까 구경 오세요.”


사빈은 말하면서도 다음 축제까지 수련혼들이 실력을 쌓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하루아침에 되는 일이 아니었다. 조바심 낸다고 되는 일도 아니지만.


담아는 차가운 세련수를 마시다 말고 잔을 내려놓았다.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다. 난 이번에도 전쟁터로 가거든.”


“어디? 인간세는 여기저기 전쟁이 끊이지 않던데.”

“가봐야 알아. 정확히 어디서 실마리를 풀어야 할지.”


담아는 길게 한숨을 뱉었다.

“왜 그리도 싸움을 좋아하는지. 죽고 죽이면 뭐가 남는다고.”


담아는 턱을 괴고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율법? 교리? 그런 건 내려준 적 없잖아? 인간세에 파견된 천사도, 선사도 그런 걸 가르친 적 없다고. 자기들끼리 만들어놓고 하늘의 뜻이라니.”


담아가 씩씩거렸다.

“마음대로 이름 붙이는 건 좋다 이거야. 왜 그걸로 피를 부르냐고.”


인간세에 대해 말할 때 평상심을 지키는 천사는 드물었다. 담아와 단짝으로 지내던 천사 가온은 그녀보다 훨씬 더 흥분하지만.


“사람은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가 없어.”

담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바쁘겠구나. 가온이 차원의 문지기가 되는 바람에 천사가 줄었으니.”

선아가 찻잔을 돌리자 고소하고 쌉싸름한 차향이 퍼져나갔다.


“맞아요. 그동안 무결의 고리에 든 천사도 많고, 사람들 때문에 소멸한 천사도···.”

담아는 말을 하다 말고 사빈을 흘끗 보았다.


헛기침을 하면서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어쨌든 천사가 많이 줄었어요.”


“천사의 알이 있잖아요?”

사빈은 천사가 천사의 알에서 태어난다고 들었다.


북방흑천에서도 아주 소중히 여기는 구름 둥지에서 천사가 태어난다고. 굉장히 아름답다고 해서 한번쯤은 보고 싶었다.


“여간해서는 새로 나오지 않아. 부화도 잘 안 되고.”

담아는 사빈을 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래서 대천사님들이 엄청나게 속상해하셨지. 가온이 천사직을 그만둔다고 할 때 천사장님이 얼마나 말렸다고 .”


“삼도천에서 해준 그 얘기? 가온이 차원의 문지기가 되었다는?”

그날 담아는 차원의 문이 있는 파라다이스 빌라와 가온이 운영하는 소품샵에 대해 얘기했다. 가게 이름이 달숲의 작은 천사라고.


‘왠지 어울려.’

가온을 생각하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어딘지 천사 같지 않은 천사였다. 그래서 좋았다. 사빈이 가온과 성격이 비슷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이번 그믐에는 파라다이스 빌라에 닿으려나?’


갑자기 사빈이 소리 질렀다.

“아! 빛나는 사람은 찾았대? 가온이 애타게 찾아다녔잖아?”


“아하하! 그 사람!”

담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깔깔거렸다. 얼마나 웃는지 눈물을 찔끔거리다 겨우 숨을 돌렸다.


“찾았지. 찾았어. 같은 빌라에 살아.”

“누군데?”


“그···.”

담아는 말하려다 말고 눈을 가늘게 뜨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직접 가서 봐. 깜짝 놀랄걸?”

“누군데?”


“안 가르쳐주지. 어차피 이번 그믐에도 인간세에 가잖아?”

담아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사빈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누구지? 천선계와 이어진 사람인가?’


그녀는 곧 고개를 저었다.

‘아···, 지금까지 살아있으면 사람이 아니구나. 그럼, 천인이나 선인?’


파라다이스 빌라를 찾아가야 할 이유가 늘었다.

‘차원의 문, 그믐의 손님, 빛나는 사람, 문지기들. 꽃수열쇠가 보내줘야 하는데···.’


사빈이 손가락을 깨물며 오물거리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선아 대천사의 작고 온화한 웃음이었다.


“사빈아, 넌 천사 될 생각 없니? 천사직도 잘 해낼 것 같구나. 마고의 임기가 끝나면, 천사국으로 오려무나. 반열님의 딸이니 충분히 자격이 있어.”


담아가 무릎을 손바닥으로 찰싹 내리쳤다.

“맞아요. 한얼도 북방흑천에 잘 있었는데 인도자가 되었잖아요. 맞바꿔야죠.”


사빈은 놀라서 선아 대천사를 바라보았다.

‘설마 어리화가 나타난 것을 눈치 채셨나?’


그녀는 선아의 낯빛을 살피면서 오른손을 소매 속으로 밀어 넣었다.


‘마고가 아닌 나는 어떻게 될까? 자유를 얻은 다음에는?’

마고의 힘이 사라지면 힘없는 중간자에 불과하다. 사람도 천인도 아닌,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존재.


중간자이기에 낙원에 들어가려면 몸을 버려야 하지만, 만약 천사가 되면 또 다른 능력이 생길 것이다.

‘천사? 내가?’


담아가 사빈의 얼굴 앞에서 손뼉을 세게 쳤다.

“저랑 짝꿍 해도 되겠네요. 인간세에 경험도 많고, 수완도 좋으니까요.”


선아 대천사가 찻잔을 들고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너희가 같이 내려간 적도 있잖니?”


“예. 인간세에서 만난 적도 몇 번 있고요.”

담아는 찻잔에 반쯤 고인 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우물 사건도 있었죠.”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4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4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3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4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1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5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4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5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39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2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6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1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49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3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77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