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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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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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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80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5.23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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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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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그믐_샘물을 찾아서

DUMMY

비뢰수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귀물씨앗 때문이라면, 원래 모습이 아니에요. 혼들은 모르는 존재를 두려워했겠죠. 무서운 상상이 더해져 계속 모습이 바뀐 거예요.”


나는 조심스레 한 걸음씩 쓰러진 비뢰수에게 다가갔다.

“사람이 피천귀를, 악마를 만들어내는 것처럼요.”


한얼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왜 혼을 소멸시킵니까?”


비뢰수는 피를 흘리며 헐떡이고 있었다. 등을 쓰다듬어주니 거친 숨이 점차 안정되었다.


“피천귀와 같다고 하셨죠? 혼이 내뿜는 회한을 먹으려 했을 거예요. 방법을 몰랐던 거죠. 방법만 찾아주면 오히려 중천에 도움이 될 거예요.”


한얼은 허공에 떠 있는 지팡이를 불러 세웠다. 밧줄도 어느새 그의 허리띠로 가서 매달렸다.


귀물씨앗을 생각하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정말 반계에서 귀물씨앗을 뿌렸을까?’

아닐 거야. 그보다는 혼에 묻어 여기까지 들어왔겠지.


반계에서 일부러 씨앗을 뿌렸다면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다.

중천은 인간세와 다르다.


인간세에서는 사람이 귀물씨앗을 만들어낸다. 씨앗이 자라 피천귀가 되면 거꾸로 사람을 조종해서 더 많은 욕심을 내게 한다.


하지만, 중천에서 혼이 욕심을 낸다 한들 사람만큼 힘을 낼 수 있을까?

‘그래서 혼을 통째로 삼키는 거구나. 먹이를 구별할 수 없어서.’


나는 손을 들어 안개 장막을 쳤다. 혼들이 계속 두려워하면 비뢰수는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검은 안개는 나와 한얼, 비뢰수들을 감싸는 장막이 되었다.


“먼저 마음을 안정시켜야죠.”

나는 봇짐에서 온유주를 꺼냈다.


잔에 술을 따르고 반지 낀 손을 그 위에 올렸다. 천력을 끌어모으자 반지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온유주에 빛의 알갱이들이 쏟아졌다.


환영으로 보았던 작고 귀여운 비뢰수를 떠올렸다. 그들은 내가 보고, 믿는 모습으로 돌아갈 것이다.


비뢰수의 입안에 온유주를 흘려 넣었다.

“너희는 원래대로 돌아갈 거야. 남들이 무서워하고, 두려워 피하는 것은 너희가 아니란다.”


나는 비뢰수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온유주가 서서히 퍼져나가자 비뢰수의 검붉은 털도 점점 밝아졌다.


“혼을 삼키지 말고 번민과 회한을 먹으렴. 중천의 어디나 먹을 것이 넘치니 그것만으로도 배가 부를 거야.”


내 말을 알아듣고 비뢰수가 끄응 소리를 냈다.


온유주 때문인지, 나와 그들의 소망 때문인지 비뢰수의 몸이 점점 줄어들었다. 송아지만큼 작아지고 털도 불그스름한 빛깔로 바뀌었다.


비뢰수가 눈을 꿈뻑이다가 벌떡 일어났다. 눈동자도 엷고 투명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두 번째 비뢰수의 털은 푸르스름한 빛깔로, 세 번째는 노란색으로, 네 번째는 검은빛과 흰빛이 어우러진 모습으로 바뀌었다.


눈이 크고 맑아지니 망아지나 송아지처럼 보였다. 이제 혼들도 어린 짐승으로 볼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안개 장막을 걷었다.


“하, 비뢰수가 송아지가 되었군요.”

한얼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머리를 쓰다듬자 비뢰수는 기분이 좋은지 갸릉거렸다.


“미안하구나. 너희를 다치게 하다니.”

비뢰수는 코를 한얼의 품에 대고 흔들었다.


“다음에는 차와 과자를 가져다줄게. 다시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 해. 알았지?”

내 말에 네 마리의 비뢰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뢰수들은 서로 어깨를 견주며 고요산맥 쪽으로 나아갔다. 숨은 혼들도 두려움을 잊고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봇짐을 챙겨 들었다.

“병이 비었으니 물이라도 담아야겠어요. 여기 어디 물이 나올 것 같은데···.”


“물을 찾는다고요? 이 중천에서?”

한얼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왜 웃지?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중천이 아무리 메말라도 물의 근원이 완전히 사라질 수는 없다. 예전에는 바다가 있던 곳이라고.


“당연하죠. 아직 갈 길이 먼데, 목이 마르면 큰일이에요.”

봇짐을 메고 숨을 고르자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


분명히 소리를 들었는데, 물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 나는 방향을 찾으려 했지만, 이제는 물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새맘계곡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래도 내게 들었던 물소리를 믿기로 했다.

‘그곳으로 가면 다시 소리가 들릴 거야.’


물길의 흔적을 따라 땅 위에 닿을 듯 말 듯 떠가자 한얼도 똑같이 따라왔다.


“사빈님, 왜 사람의 혼을 중앙황천에서 관리합니까? 탄생과 죽음은 북방흑천의 천사가 안내하는데요.”

“그 일까지 하기에는 천사가 부족하잖아요?”


장난으로 대답했는데, 한얼은 정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합니다. 그동안 천사의 알이 태어나지 않았거든요.”


“하하하.”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별것 아닌 일에도 진지한 것은 예전 그대로였다. 세상 고민을 다 짊어진 것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 있던 소심이.


이번에는 나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황제님께 들었어요. 인간세에 사람이 나타날 때 혼도 함께 생겨났다고요. 그때는 사람이 죽어도 계속 인간세에 머물렀대요. 대기 속에 담겨있다가 아기가 생기면 거기 깃들었다죠.”


그러나 사람의 몸과 혼은 엄연히 다르다.

혼은 사람을 살게 하는 근원일 뿐, 혼이 그 사람일 수 없다. 혼빛에 어울리는 모습과 사람의 모습도 달랐다.


“사람이 천인과 비슷하게 살기까지 혼의 역할이 컸지만, 사람의 의식과 생각은 변했어요.”

“타락했다는 말입니까?”


“적응하느라 바뀐 거겠죠. 점점 메마르고, 조금씩 잔인하게.”

인간세를 생각하니 한숨이 흘러나왔다.


“혼이 인간세에 머물면 쉴 수도 없고, 씻김도 할 수 없어요. 그래서 미틈오름 때 세상이 뒤집힌 다음부터 중앙황천에서 맡게 되었대요.”


“그래서 죽으면 혼이 삼도천을 건너는군요.”

“몸은 흙과 물로 만들어졌으니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요.”


“사빈님과 저도 언젠가 몸을 버리고 여기로 오겠죠?”

“그래도 우리는 중간자라서 지금의 기억이 남을 거예요.”

예전 한얼의 어설픈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한얼님, 정말 많이 변했어요. 정말 몰라봤어요.”

“그건 잊어주십시오. 새로 태어난 한얼입니다. 이제는 사빈님을 지킬 수 있습니다.”

한얼은 중대한 결심을 하는 듯 진지했다.


“뭘 그렇게···.”

마음숲에는 상산대도 있고, 마고의 반지가 있으니 그에게까지 신세 질 일은 없을 텐데.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렸다. 바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또르륵 물소리를 따라가니 가장 깊은 바닥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물이 솟아 나왔다. 물은 금방 땅으로 스며들어 말라버렸다.


지금은 마른 땅이지만, 골짜기를 모양을 보면 오래전에는 커다란 호수였을 것이다.


흙을 파내니 조금 더 빨리 물이 솟았다. 나는 빈 병에 물을 받았다.

“물이 나와요. 흐르지 않고 땅속 깊이 숨어있어요.”


“곧 마를 겁니다. 중천은 숨을 허락하지 않는 하늘이니까요.”

“여기도 아름다웠을 거예요. 대혼란 이전에는 말이죠.”


“그보다는··· 인간세에 사람이 나타나기 전이 아닐까요?”

한얼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는 병에 물이 찰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그믐에 혼자 다니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인간세에도 귀물이 숨어있으니까요.”

“피천귀나 귀물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병을 붙잡았다.


“피천귀는 저를 공격하지 않아요. 사람이 사람을 공격하죠. 재미로 남의 목숨을 해치는 존재는 사람뿐일 거예요. 더 많이 가지려 싸우고, 이유 없이 남을 괴롭히고.”


그믐 외출에서 잠깐 보았던 포로수용소가 떠올라 치를 떨었다. 아픈 기억은 곧 깊숙이 내려갔다.


내게 필요한 기억만 남고, 도움이 되지 않는 기억은 저 멀리 가라앉는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그믐의 기억 때문에 한시도 편하지 못할 것이다.


“처음에는 서툴러서 몇 번이나 죽는 줄 알았어요. 중간자라서 한계도 많고요. 인간세에 내려가면 날지도 못하고, 길을 잃을 때도 있고요.”


병 뚜껑을 잘 닫고 일어섰다.

쪼그리고 있었더니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는 저릿저릿했다.


가끔 현재의 다른 겹으로 가거나 시간의 다른 층을 헤맬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대기가 혼란스러워 빨리 익숙해지지 못한다.

어쨌든 적응하니까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


“전쟁터에 떨어진 적도 있어요. 여기저기서 폭탄이 터지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뛰어다녔어요. 사람이 쓰러져도 그냥 밟고 지나가요.”


나는 요마전쟁에서 중간자가 되었지만,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갈수록 잔인해졌고, 점점 더 많은 것을 빠르게 파괴했다.


“그럴 때는 영감도 바람잡이도 숨어버려요. 어쩌다 잡혀간 적도 있어요. 다행히 고문받기 전에 꽃수 열쇠가 불렀지만요. 마고는 그렇게 죽지 않으니, 더 있었으면 큰일 날 뻔했죠?”

기겁하며 까무러칠 사람들을 상상하니 씁쓸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사라졌다면 엄청났을 거예요.”

봇짐을 갈무리하고 돌아서는데 한얼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굳어있었다.


나도 덩달아 손이 굳었다. 또 뭔가 나타났나?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 무슨 일이에요?”


“그런 곳을··· 혼자 다닙니까?”

“예? 마고는 원래 혼자 다니는데요?”


“천인이나 도우미가 있지 않습니까?”

한얼은 정색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지팡이를 잡은 그의 손이 불끈거렸다.


나는 치마에 묻은 흙을 털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아주 가끔 그런다는 거죠.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요. 익숙해졌거든요.”


안심하라고 한 말인데, 한얼은 대답하지 않았다.

왜 그러지? 마고가 그믐마다 인간세에 나가는 것은 천선인 누구나 아는 일인데.


마음숲에서는 그날이 그날 같지만, 그믐의 인간세는 너무나 다채롭다. 엄청나게 빨리 바뀌고, 화려하고 다양하다.


한편으로는 재미있지만, 속이 빈 것 같기도 했다. 본성은 그대로인데, 겉모습만 번지르르하다고 할까.


새맘계곡이 끝나고 붉은 벌판이 펼쳐졌다.

지평선 끝에 보이는 검푸른 땅이 서로바다일 것이다.


왼쪽으로는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었다. 고요산맥보다 낮아도 중천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곳에서 보면 더 잘 보일 거야.’

중천을 다 둘러보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저기 올라가면 중천이 다 보이겠죠?”

“저기는 뜨락고원입니다. 한눈에 다 보려면 맑음고원으로 가시지요.”

“명부전이 있는 그곳 말이군요.”


대답은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뜨락고원 꼭대기를 바라보았다.

소용없다는 것을 알지만 올라가 보고 싶었다. 뜨락고원이 나를 부르는 느낌이랄까.


한얼도 뜨락고원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저기까지는 한숨에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날아갈 수 있는데?’

중간자라서 날지 못하는 것은 인간세에 내려갔을 때고.


그래도 호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의 손을 잡으려는데 스륵스륵 무언가 움직였다.

곧이어 끄그극 신음도 함께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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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4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3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3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3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1 2 11쪽
»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5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3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5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39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2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6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1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49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3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6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77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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