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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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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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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3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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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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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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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DUMMY

산돌은 두 손을 모으고 서성거렸다. 그의 혼빛 만큼이나 수수하고 무던한 차림이었다.


그의 뒤에는 세 명의 상산대원 함께 있었다.

운와, 차미, 부루는 백하를 따르는 상산대의 삼인행으로, 마음숲을 지키는 한편, 혼을 돕는 일도 맡았다.


분명 산돌을 위해 왔을 텐데, 차사들 사이에 끼어있으니 산돌의 작은 몸집이 더 작아 보였다.

시무룩한 얼굴로 잔뜩 움츠리고 있어 아주 초라해 보였다.


주위에는 구경하러 나온 혼들이 두런거렸다. 장날이나 축제가 아니면 별다른 일이 없으니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며 기웃거렸다.


사빈이 나오자 산돌은 그녀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마고님! 전, 전···, 이번에 떠나는 줄 모르고.”


산돌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목소리가 몹시 떨렸다.

“누가 그랬거든요. 저는 여기 오래 머물 거라고요. 마고님을 더 볼 수 있다고···. 자기는 선견자라서 다 안다고.”


백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그 반인반천인가···.”


반인반천이라는 말에 사빈이 움찔거렸다.

그녀 역시 반인반천에, 중간자이기에 목덜미를 찔린 것 같았다.


한얼은 지팡이를 또각이며 산돌에게 다가갔다.

구불구불한 나무 지팡이를 잡은 듯 보이지만, 사실은 지팡이가 저절로 따라가고 있었다.


“그래서 마고를 찾았나?”

한얼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힘이 있었다.


사빈과 대화할 때와 혼을 다룰 때의 소리가 달랐다. 조금 전 사빈을 대할 때는 친구나 동생 같은 말투였다면, 지금은 인도자로서의 힘이 뻗어 나왔다.


산돌은 고개를 저었다. 꿇어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마고님, 이걸···. 받아주셔요.”


그가 내민 것은 작고 붉은 보석이 달린 은귀걸이였다. 검새공방에서 가장 뛰어난 혼답게 은세공이 섬세하고 정교했다.


사빈이 귀걸이를 받아들자 붉은 보석 위로 영롱한 빛 한 줄기가 지나갔다. 그녀는 귀걸이를 소중히 받아들고 두 손으로 감쌌다.


“산돌님, 전에 맡긴 유물은 바림창고에 잘 있어요. 이것도 맡아둘까요?”

“아니어요. 이건 마고님께 드리는 마음이어요. 제가 얼마나 고마워하는지···,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산돌님이 더 고맙지요. 그동안 검새공방과 율도학당에서 열심히 수련했잖아요.”

사빈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산돌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치맛자락이 사르락 땅에 끌렸다.


“모두 마고님 덕분이어요.”

산돌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처음에는 너무너무 두렵고 무서웠어요. 혼알방에도 못 들어가고 떨고 있을 때 제 손을 잡아주셨지요. 온유주도 나눠주셨고요.”

산돌은 기억을 더듬으며 보일 듯 말 듯 웃음 지었다.


“인간세가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었거든요. 그때 마고님이 말씀하셨어요. 어디에 태어날지 선택할 수 없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는 내 결심이라고요.”

눈물이 떨어질 듯 가득 차올랐다.


“마고님을 보며 힘을 얻었어요. 고맙습니다. 마고님을 만나 많이···, 많이 행복했어요.”

산돌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곧이어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를 바라보던 백하가 허리를 숙여 산돌의 어깨를 토닥였다.

“내 그 기분 잘 알지. 마고 사빈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백하는 산돌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그를 일으켰다.

“산돌, 여기 있는 혼들 모두 자네와 같은 마음일 거네. 그래도 이리 머뭇거리면 사빈님이 곤란하지 않겠나.”


산돌을 올려다보며 사빈도 일어서려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찌릿 몸이 떨렸다. 잔벼락 같은 진동이 몸을 관통하며 빠르게 지나갔다.


사빈은 고개를 숙이고 잠깐 눈을 감았다. 숨을 깊이 마신 뒤 손과 발에 힘을 주었다.


몸속의 벼락이 사라지자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산돌의 손을 잡았다.

“그동안 애써주어 고마워요. 선물 잘 간직할게요. 인간세에서도 잘 해낼 거예요.”


“고맙습니다. 마고님, 안녕히 계십시오.”

산돌은 눈물을 닦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산여와 대취가 앞장서자 산돌도 그들을 따라 돌아섰다. 맨 끝에 한얼이 자리 잡았다.

사빈은 한얼의 뒤로 다가갔다.


아날빛숨 문가에는 초연과 용희가 서 있었다.

용희는 백하를 보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을 돌아봐 주기를 바라는 애타는 눈빛이었다.


사빈은 앞장선 일행과의 거리를 가늠하며 용희를 지켜보았다.

‘오늘은 얼음대감이 차를 마시고 가면 좋으련만.’


그사이 두런거리던 혼들은 하나둘 흩어졌고, 상산대 삼인행도 혼들을 안내하며 각자의 자리로 옮겨갔다.


“나도 온유주 한 잔 마셔야겠군.”

백하는 사빈에게 손을 흔들었지만, 그것은 용희가 기다리던 말이었다.


용희는 재빨리 뛰어나갔다. 한가득 웃음을 띠고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대감님, 온유주 드시려고요?”


“아, 그게···.”

“들어오세요. 마침 따뜻하게 데워놓은 온유주가 있답니다.”

용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소매를 잡아끌었다.


백하가 곤란해하자 초연은 고개를 돌리며 배시시 웃었다.


*


인간세로 떠나는 혼은 모두 여섯이었다.


산여가 앞장서고 여섯 혼이 그를 따르고, 그들 뒤를 대취가 지켰다. 한얼과 사빈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산돌은 어깨를 늘어뜨려 걸음도 흔들렸다. 대취가 그와 걸음을 맞추며 어깨동무를 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사람의 시간은 짧고, 혼의 시간은 무한하니.”

대취가 속삭이자 산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제가 그 사람인가요?”

“아닐세. 혼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원일 뿐, 자네가 그 사람이라고 할 수 없지. 사람의 몸을 입으면 지금의 자네와는 다른 존재이지. 마음 편히 갖게.”


“잠깐 다녀오는 거예요. 그렇죠?”

“그럼. 혼도 수련을 계속해야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굳어버린다네.”

대취는 산돌의 어깨를 두드렸다.


훨훨 날아다니던 혼들도 배웅문으로 나갈 때는 아주 천천히 걷는다.

그래야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모든 혼이 빠짐없이 느릿느릿 걸었다.


마음숲은 영천옥에서의 씻김을 끝내고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게 보낸 곳이다.

그런 곳을 떠나 인간세로 나가려니 혼들의 걸음은 느려졌고, 걸음마다 아쉬움이 짙게 배었다.


“여기서는 걸음이 늦다더니 그 말이 맞군요.”

한얼은 배웅문의 청록색 지붕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한긋장벽의 구름에 가려 뿌옇게 보였다.


“마음숲을 잊고 싶지 않아서예요. 혼의 여정 중에 가장 안락하고 포근한 곳이니까요.”

사빈의 가슴에도 찌릿 알 수 없는 아픔이 지나갔다.


혼들이 떠날 때마다 배웅문까지 따라가지만, 어느 날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산돌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빈은 조금 전 아날빛숨 앞에서 느꼈던 벼락같은 진동을 떠올렸다.


‘분명 몸이 떨렸는데···.’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사빈은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귓가에는 선대 마고 아란의 경고가 들렸다.

‘어떤 일이 생길지, 무엇을 잃을지 알 수 없어.’


사빈은 바닥을 보며 천천히 걸었다. 가슴이 먹먹해지며 한숨이 나왔다. 어리화를 처음 봤을 때 기뻐하던 그녀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인 줄 알았는데···.’


사빈은 한얼이 옆에 있음을 깨닫고 고개를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숨을 들이마셨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알 수 없는 그리움을 느낀대요. 어딘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고요. 그곳이 마음숲이래요. 인간세로 갈 때 삼도천 하나만 건너니 기억이 다 지워지지 않나 봐요.”


“그렇군요.”

한얼의 대답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듯 무덤덤했다.


“마음숲은 생기가 넘쳐요. 밝고 순수해요. 어떤 혼은 기대에 부풀어 즐거워하고, 어떤 혼은 두려워하지만, 그렇기에 온 힘을 다해 즐기려 해요.”


사빈은 찌릿거리는 가슴을 달래려 손을 얹었다.

‘참 즐거웠는데···. 그믐의 외출이 두려울 때도 있지만, 수명환을 만들고, 사람을 찾는 것도 설레는 일이었어.’


다음 마고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아홉 번의 그믐이라지만, 아니야. 되도록 빨리 찾아야 해.’


한얼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고민이 있습니까?”

“아니에요. 아무것도.”


어리화가 피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맞아, 중천을 둘러보기로 했지? 다음 마고가 거기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믐 외출은 닷새이고, 중천은 넓디넓었다. 마음숲이 몇십 개나 들어설 만큼 넓으니 시간이 빠듯했다.

헤매지 않고 드넓은 중천을 돌아보려면 안내자가 필요했다.


‘안내자···?’

사빈은 걸음을 멈추고 한얼을 바라보았다. 중천을 잘 아는 인도자가 여기 있지 않은가.


“중천에 가야 하는데···. 도와줄 수 있나요?”

“중천요?”

한얼은 혼잣말처럼 묻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능합니다. 그런데 마음숲을 비워도 되나요?”

“그믐에는 나갈 수 있어요. 인간세에 수명환을 전하러 다니니까요.”


“그렇습니까? 중천에는 왜?”

“찾아야 할 혼이 있어요. 혹시 중천에 있을까 하고.”

“중천을 돌아보려면 서둘러 다녀야겠군요.”


마음이 가벼워지자 사빈은 생긋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숙제를 풀다 보면 금방 찾을 거야.’


성큼성큼 걸어가던 한얼이 지팡이를 세우고 멈추어 섰다.

“제가 중앙황천에 온 것은···,”


그의 눈가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이 되었다.

“인도자 때문만은 아니거든요.”


“네? 무슨 말이에요?”

“아닙니다. 기꺼이 도와드리겠다는 뜻입니다.”

한얼은 다시 지팡이를 움직였다.


사빈이 배웅문 앞에 이르자 혼들은 힘없이 손을 흔들었다. 손짓과 눈빛에 아쉬움이 짙게 배었다.


산여를 따라 혼들은 하나둘 배웅문 밖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곧 삼도천에 닿을 것이고 그곳에서 인간세까지는 천사들이 안내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산돌이 안개 속으로 들어가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슬픈 눈을 하고 있었다.


사빈은 그에게 인사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산돌이라면 어디서나 잘 해낼 거야.’


엶은 구름이 산돌을 삼켰다가 뱉어냈다. 사빈은 그를 위해 손을 높이 들고 크게 흔들었다.


한얼은 배웅문을 나서다가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안개 속에서 선홍색 꽃 한 송이가 흔들렸다.


눈을 크게 뜨고 꽃을 바라보았다. 꽃은 사빈의 손목에 새겨 있었다.

‘어리화?’


다훤에게 들은 모양 그대로였다.

마고가 바뀌는 시기를 알려준다고 했던가. 그것은 사빈이 마고의 힘을 잃게 된다는 뜻이었다.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 사빈도 시선을 돌렸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무늬를 보고 재빨리 손을 내렸다.


‘이런!’

사빈은 소매로 손목을 덮고 두 손을 맞잡았다.

‘설마, 알아본 거야? 아니지. 이 무늬가 무엇인지는 모를 거야.’


한얼은 아무 말 없이 돌아섰다. 그 역시 빨려들 듯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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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5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4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4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4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1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6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4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6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40 2 12쪽
»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3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7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2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0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4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83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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