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183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5.27 22:17
조회
123
추천
2
글자
13쪽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DUMMY

마고 사빈이 잠든 시간에도 마음숲의 하루하루는 평화롭게 지나갔다. 겉으로는 태평했지만, 한 겹 들춰보면 온통 들썩이고 있었다.


얄리장터 열림날을 준비하느라 바빴다. 혼들은 물론이고 공방의 키움차사들과 수련생들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는 한산해도 닫힌 문 안쪽에서는 분주한 손놀림이 이어졌다.


그믐 외출에서 돌아오면 사흘 내내 잠에 빠지던 사빈도 이번에는 이틀 만에 깨어났다. 다른 그믐과 달리 인간세가 아닌 천계에서 보냈기에 몸이 가뿐했다.


깃털구름 쪽지가 아롱재 창가에서 사빈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깃털구름은 돌봄차사들이 사빈을 부를 때 쓰는 방법 중의 하나였다.


사빈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고 나서 구름 쪽지를 들어 올렸다.

‘초연님은 아날빛숨에 있고, 다담님도 위즐증가에 계시니···. 상생농장 구추님 아니면 모로매 온천의 위화님인데?’


구름으로 만든 깃털 사이에서 할머니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빈아, 모로매로 오려무나.’


*


모로매 온천은 마음숲 서쪽 끝이었다.


새놀산에서 내려오는 바래강과 땅속 깊이 솟아나는 기운이 만나 호수를 이루었다. 호수 전체가 온천이라 모로매 호수라 부르지 않고 모로매 온천이라 불렀다.


물빛은 흰빛과 상아색의 중간이지만, 뜨거운 수증기 때문에 흰빛에 가까워 보였다.


호숫가에 세워진 소상각도 물빛을 받아 하얗게 돋보였다. 소박하고 정갈한 소상각은 유람하는 천인들이 묵는 숙소이자 위화가 요양하는 곳이었다.


돌봄차사인 위화는 주름진 눈으로 온천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앉아있는 정원에서는 호수의 경치와 소상각이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이 되었다.


“위화님, 부르셨어요?”

“오, 사빈. 이번에는 금방 깨어났구나.”

사빈이 다가오자 위화는 힘겹게 일어났다.


그녀는 언제 무결의 고리에 들어도 이상한 것 없는 나이였다. 오랫동안 온천에서 지냈기에 여태껏 버틸 수 있었다.


십여 명의 마고를 거쳤으니 십만 년이 넘는 기간이었다. 그사이 반계가 생기는 것도 보았고, 불천수 전투로 많은 천인이 소멸하는 것도 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 다른 차사보다 더 예민하고, 공기의 흐름만 달라져도 금방 알아차렸다. 다른 천인들이 보지 못하는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무슨 일 있으세요?”

사빈은 부쩍 마른 위화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위화는 사빈의 소매를 잡아끌더니 목소리를 잔뜩 낮추었다.

“마음숲이 이상하지 않니?”


“예? 뭐가요?”

사빈은 가슴이 뜨끔했으나 태연하게 미소 지었다.


“뭔지는 모르겠는데···. 이상해. 맥이 빠졌다고나 할까.”

“그런가요? 저는 잘···.”

사빈은 말끝을 흐렸다. 대답 대신 위화의 손을 잡고 손등을 토닥였다.


어리화는 다음 마고를 찾으면 말할 작정이었다. 곧 찾아낼 테니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 소란스러워지는 것도 싫었다.

적어도 마음숲이 흔들리기 전에 데려올 것이다. 사빈은 그렇게 믿었다.


위화가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생긋 웃었다.

“내가 너무 예민해졌나?”


사빈은 고개를 돌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온천을 바라보았다.


위화도 그녀를 따라 온천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래도 조심해라.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예. 위화님은 괜찮으세요?”


“응? 괜찮아. 괜찮고말고.”

대답과는 다르게 위화는 손가락 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사빈은 호숫가를 둘러보았다. 항상 위화 옆을 지키는 도우미 혼이 보이지 않았다.

”옥지는 어디 갔어요?“


”저기, 반대편을 둘러보러 갔어. 요즘 손님들이 그쪽을 더 좋아해. 거기서 보는 풍경이 마음에 든다나?“


”도우미를 더 보내달라고 할까요?“

”됐어. 혼들도, 천인들도 알아서 잘하니까. 옥지가 아주 잘해. 씻김을 잘 끝냈나 봐.“


사빈은 위화의 손을 끌어당겼다.

”위화님, 여기만 계시면 지루하시죠? 상생농장 가실래요? 약초 필요하시죠?“


”그러네. 약이 다 떨어져 가네.“

위화는 남은 약초를 계산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농장에 가볼까. 거기도 기분이 좋아지거든.“


”저도 수복초를 가지러 가야 해서요. 이번 장날에 샛바람물과 세련수를 내놓으려고요.“

”샛바람물? 그거 좋더구나. 향기롭고.“

”예. 위화님께도 드릴게요.“


사빈은 위화와 나란히 날아오르며 귀한 손님에게 대접할 차와 과자를 생각했다.

‘이번 장날은 아주 특별할 거야. 선아 대천사님이 오신다니.’


*


상생농장은 언제나처럼 푸르고 싱그러웠다. 흐드러지게 꽃이 피니 향기조차 아름다웠다.


반다강 줄기를 따라 길게 이어진 농장에는 필요한 만큼의 열매가 끊임없이 열렸고, 풀과 나무 모두 탄탄하게 자라났다.


상생농장의 돌봄차사는 거인 구추였다.

몸집은 다른 천인의 세 배 정도 되지만, 말이 없고 수줍음이 많아 농장에서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도우미 논티도 함께 있지만, 구추 뒤에 서 있어 보이지 않았다.


바구니에 초록과 노랑, 자줏빛 열매들이 가득했다. 모두 위즐증가와 고샅공방에서 사용할 재료들이었다.


사빈이 다가가자 구추는 배시시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고, 논티는 허리를 펴고 손을 흔들었다.

“마고님! 오셨시유?”


논티는 토끼처럼 뛰어 곧장 사빈과 위화 앞에 다다랐다.

“위화님도 안녕하셨지유?”


논티가 의자를 가져오자 위화는 기분 좋게 웃었다.

“호호, 역시 논티는 눈치가 빨라.”

“당연하지유. 위화님이 오셨는디.”


위화는 눈웃음을 지으며 논티가 열매 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까불거리는 논티가 재미있었다. 재빠르고 기운이 넘치니 덩달아 힘이 나는 것 같았다.

‘좋구나. 저런 모습을 언제까지 볼 수 있으려나···.’


사빈은 바구니에서 잘 익은 홍옥과를 꺼냈다. 빛깔만큼이나 향기도 화려했다.

“와, 싱싱하네요. 구추님은 솜씨가 좋아요. 풀과 나무도 차사님의 손길을 아나 봐요.”


구추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나는 아니고, 산이랑 강이. 흙도, 빛과 공기랑.”


사빈은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알아들었지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구추는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열매에 열중했다.


논티가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차사님 말씀은 이거여유. 어디 지가 키우남유? 달해산이랑 반다강이 키운 거지유. 마음숲의 흙도 좋구유, 그 뭐냐···, 대명천의 빛과 공기가 을매나 좋은디유.”


논티가 씩씩하게 손을 털었다.

“이런 말씀이시쥬.”


위화가 구추를 보며 조그맣게 손뼉을 쳤다.

“그 소리 질리지도 않아? 맨날 같은 소리네.”


“맞는 말씀이세요. 중앙황천은 어디나 아름다워요. 중천은 빼고요.”

사빈은 중천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중천의 텁텁한 공기가 가슴 속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구추는 하늘을 보며 생각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회향, 빙천.”


대변인 역할을 곧잘 해내는 논티도 이번에는 못 알아듣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위화가 의자 팔받침을 톡톡 쳤다.

“그건 내가 알지. 회향미곡, 빙천골.”


구추는 위화를 보고 방긋 미소 지었다. 위화는 수수께끼를 맞힌 아이처럼 기뻐했다.

“문제풀이도 재미있네.”


“회향미곡이면 설화옥이 있는 곳이요?”

사빈은 낯선 이름을 듣고 위화 곁으로 다가갔다.


“응. 세 신제가 함께 만든 감옥이란다. 이름은 눈꽃감옥인데, 어찌 그리 살벌한지.”

“거기 정말 천인이 갇히나요?”


“그건 몰라. 갇힌 자가 없다고도 하고, 가득 찼다고도 하니. 가까이만 가도 지나가는 천인을 끌어당긴대.”


위화가 사빈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사빈이 고개 숙이자 귓속말로 중얼거렸다.

“조심해라. 설화옥도 그 정도인데, 그분들이 만든 감옥은 어떻겠니?”


사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반계를 다스리는 이안남존과 마백북존.


그들이 만든 감옥이 무시무시하다는 소문은 돌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


“빙천골은요? 그거 숲센계곡에 있지요? 무척 아름답다던데요?”

“거기서 딱 빙천골만 얼음산이야.”

얼음산이라는 말을 듣자 사빈은 상산대감 백하를 떠올렸다.


‘대감이 빙천술을 쓰잖아? 거기서 태어났을까? 그래서 얼음처럼 차가운가?’

백하의 맑고 예리한 눈빛을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구추한테는 얘기하지 마. 겁이 많거든.”

위화가 귓속말을 끊고 구추를 가리켰다.


구추는 어깨를 움츠리고 울상을 지었다.

논티가 그의 등을 다독였다. 그 모습이 거대한 바위에 붙은 다람쥐처럼 보였다.


*


아날빛숨에 돌아와 사빈은 위화가 한 말을 곰곰이 되짚었다.

‘마음숲의 기운이 이상해. 맥이 빠졌다고 할까.’


사빈은 상생농장에서 가져온 약초를 들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위화님이 그렇게 느꼈다면···. 그믐이 두 번 지나면 다른 차사들도 알겠지? 그다음 그믐 때는 마음숲의 모든 차사가 느낄 거야.’


사빈은 약초를 정리하다 말고 정원으로 나갔다.

놀뫼마당이 내다보이는 정원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옹기종기 자라고 있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다.


‘괜찮아, 그 전에 찾으면 돼. 미리 걱정할 필요 없어.’

사빈은 손목의 어리화 무늬를 쓰다듬었다.


“무슨 걱정이 그리 많으십니까?”

한얼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얼님! 혼을 데리러 왔어요?”

사빈은 자리를 옮겨 한쪽으로 비켜앉았다.


한얼은 지팡이를 세워놓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아닙니다. 쉬는 날입니다.”

그는 웃으며 놀뫼마당을 향해 고갯짓했다.


놀뫼마당에서는 볕을 즐기는 혼들이 많았다.

그들 사이로 초연과 대취가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가까이에 다담과 산여도 함께 있었다. 나란히 걷는 연인들의 모습이 무척 다정해 보였다.


“보기 좋네요.”

보고만 있어도 사빈은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숲의 기운을 북돋우는 원동력이었다.


“선아 대천사님이 오신다고요? 준비를 많이 하시네요.”

“예. 정말 오랜만에 뵙거든요.”

“선아 대천사님을 알다니 놀랍습니다.”


한얼은 허리를 펴고 비스듬히 돌아앉았다.

“동녘뜰에서 지내다가 마고가 되고는 줄곧 마음숲에서 지내지 않았습니까?”


“제가 사람이었을 때 많이 도와주셨어요.”

조각조각 남은 기억이지만 사빈에게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땔감까지 구해주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둘이 지내기 어려웠거든요. 그때는 천사 같은 아주머니라고 여겼는데, 진짜 천사일 줄 몰랐어요.”


“사빈님이 반열 대천사님의 딸이어서 그럴 겁니다. 반열님이 무결의 고리에 들고 그 자리에 선아님이 오르셨으니까요.”

“그렇더라도 저에게는 은인이에요.”


사빈이 갑자기 푸흡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까지 아버지가 진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언제 아신 겁니까?”

“예사달 할머니를 만나고 나서요. 할머니가 알려주셨어요.”


*


동녘뜰에 도착하고 임시로 마련한 오두막에서 지낼 때였다. 사빈과 예사달은 제대로 된 집을 지으려 준비하고 있었다.


그때 예사달이 아버지에 대해 알려주었다.

‘네 아버지는 대천사님이셨지. 반열님은 천사장의 가장 친한 친구였단다. 나중에라도 북방흑제님을 만나면 인사드려라.’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아버지가 대천사였다니.


하지만 사빈에게 떠오른 첫 번째 의문은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응? 그럼 아버지가 몇 살이었던 거야?’


*


한얼이 놀뫼마당을 바라보았다.

“사빈님은 복이 많습니다. 천사장님도, 스승님도 사빈님 일이라면 그냥 넘기지 않거든요.”


그의 말을 듣자 사빈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맞아. 많은 분이 도와주셔서 지금 내가 있는 거야.’


상생농장에서 구추가 한 말도 비슷했다.

마음숲의 흙과 대명천의 빛, 정성 어린 손길이 어울려야 풀과 나무가 싱싱하게 자란다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는다고.


‘다훤 아저씨, 예사달 할머니, 선아 대천사님, 중앙황제 현원님···.’

마음숲에서도, 인간세에서도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나.


사빈이 눈시울이 붉히는데 그들 앞으로 하얀 형체가 훌쩍 뛰어들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4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3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3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4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1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5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4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5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39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2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6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1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49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3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77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