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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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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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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24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5.20 07:53
조회
139
추천
2
글자
12쪽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DUMMY

마음숲의 아침은 싱그러운 향기와 함께 시작한다.

풀향기가 바람을 타고 아롱재까지 들어왔다. 빛이 들어차면 숨꼭지도 깨어나 사르락사르락 천장을 울린다.


사빈은 빛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눈을 떴다가 다시 감으며 뒤척였다.

아침이면 마음이 가볍고 맑았는데, 지금은 안개 속을 헤매듯 답답했다.


사빈은 비스듬히 누워 소매 끝을 잡아당겼다. 어리화를 가리기 위해 생긴 버릇이었다.


‘못 봤겠지···. 이게 뭔지 모를 거야.’

한얼이 모를 거라고 위안하면서도 불안했다. 다훤의 제자라면 배웠을지 모르니.


‘알아도 누구에게 말하지는 않을 거야. 나도 모른 척해야지.’

사빈은 이불을 걷어내고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중천을 안내해준다니까.’

지금의 중천은 보통의 천인은 들어가지도 못한다. 차사들도 다니기 힘든 곳이었다.


그믐의 닷새 동안 함께 다니기에 한얼만 한 적격자도 없었다. 사빈과 같은 중간자이면서, 중천과 염라부를 다니는 인도자였다.


사빈이 기억하는 한얼은 마고가 되기 전의 모습이었다.


그 사이 한얼은 북방흑천에서 천사들과 함께 수업을 받았고, 수련도 마쳤다. 인도자가 될 만큼 능력이 있으니 중앙황제 현원도 허락했을 것이다.


‘천사들과 함께 수련해서 천력이 생겼나?’

사빈은 너무나 바뀐 한얼을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지 몰라도 날 도와준다면 다른 건 중요하지 않아.’

사빈은 창밖을 내다보며 기지개를 켰다.


그믐까지 며칠 남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다.

‘또 찾아볼 곳이···? 그믐이 아니라도 갈 수 있는 곳···.’


사빈은 아롱재의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바림창고.’


마고가 되려면 영천옥에 들지 않은 혼이어야 하니, 중천 아니면 인간세로 좁혀진다.


반계에는 사람의 혼이 살지 않을 테고, 설사 혼이 있다 해도 들어갈 수 없다. 천인이나 선인이 들어가려 하면 온몸이 찢겨 가루가 될 것이다.


‘바림창고에 유물이 있다면 주인 혼이 인간세에 있다는 뜻이지.’

사빈은 떨리는 손으로 창고 문을 열었다.


그녀가 들어서는 순간 창고는 까마득히 멀리 뻗어나갔다. 빼곡히 들어선 선반마다 유물이 자리 잡았다.


글이나 그림 족자부터 복주머니, 향초와 비녀, 인형, 손수건까지 종류와 크기도 다양했고 색깔과 모양도 주인의 혼빛 만큼이나 여러 가지였다.


유물은 알아서 주인을 찾아갔고, 필요한 경우에는 마고에게 먼저 신호를 보낸다. 지난 그믐에 만난 구단돌의 두루마리처럼.


선반의 빈자리는 주인을 찾아간 것이다.

거의 모든 유물은 주인이 죽기 전에 찾아간다. 공명하는 연결점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꿈을 통해서라도 전해진다.


‘여기만 둘러봐도 그믐 네 번이 훌쩍 지나가겠어.’

사빈은 마음을 가다듬고 선반을 둘러보았다.


“다음 마고가 유물을 남겼으면 좋겠다. 그럼, 그믐이 오기 전에 찾는 거잖아!”


사빈은 오른손을 들고 선반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어리화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다.


많은 혼이 마음숲에 머물다 가도 유물을 남기는 혼은 흔치 않았다. 사빈 자신도 인간세에 가기 전에 여기 머물렀겠지만,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어쩌면 사빈은 마음숲에 있는 내내 춤을 추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인간세에 머무른 건 십육 년밖에 안 되지만, 어릴 때부터 춤을 좋아했고, 마지막 오 년 동안은 무희로 지냈으니까.


어리화는 반응하지 않았다. 사빈은 천장부터 바닥까지 고루 살피며 조심스레 움직였다.


인형을 쓰다듬었다가 일기와 편지를 들었다 놓았다. 술잔, 팔찌와 비녀를 건드렸지만 어리화는 잠잠했다.


유물이 내뿜는 은은한 빛 때문에 창고 안은 아늑했다. 바깥의 빛이 들어오지 않으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하나씩 볼 수는 없는데···.’

사빈의 걸음이 빨라졌다.


이번 그믐에는 중천에 가지만, 다음부터는 인간세에 내려가야 했다.

다음 마고를 찾는 일만큼 수명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절실히 필요할 테니까.


인간세에서 천사도, 선사도 함부로 기적을 베풀지 못하지만, 마고의 수명환은 예외였다. 그것은 수많은 혼이 함께 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천팔십 혼이 한 달 치 수명을 내놓았으니, 한 생명을 위한 수많은 혼의 소망이기도 했다.


문득 그녀의 발을 잡아끄는 기운이 있었다. 아래쪽 선반에서 작은 나무 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으로, 끈을 당기면 날갯짓을 하고 새 소리도 냈다.


‘춤추는 새구나. 이건···. 외길이 만든 건데?’

외길은 유난히 새를 좋아했다. 그가 만드는 모든 장식에 새를 새겨넣을 정도였다.


사빈은 꽁무니에 달린 끈을 잡아당겼다. 끈이 되돌아가니 날개가 파닥였다.

이어서 맑은 물소리가 흘러나왔다. 남방홍천의 노래하는 별이 들어 있어 소리가 무척 영롱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가 대나무 숲에 바람이 일렁이는 소리도 났다. 별 조각이 작아서 소리도 작았지만 그래서인지 더 아득하게 들렸다.


끈이 다 감기자 나무 새는 소리를 멈추고 사빈을 불렀다.

“마고님, 제 주인이 아파요. 도와주세요.”


“어? 너, 구단돌의 유물을 찾을 때도 떨고 있었지?”

사빈은 나무 새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쓰다듬었다.


“왜 찾아가지 않고?”

“저를 못 부르나 봐요. 이대로면 제 주인은 죽을 거예요. 마고님, 도와주세요. 주인과 꿈에서 만나는 건 싫어요.”

작은 새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외길이 아프다고?’

외길은 소소공방에 다니던 혼이었다. 섬세하고 솜씨가 좋아 그가 만든 물건은 장터에서 인기가 높았다.


그가 처음부터 솜씨가 좋은 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손이 느리고 서툴러 실망할 때가 많았다. 꼼꼼하게 하려다 보니 여간해서 속도도 나지 않았다.


외길이 우울해하면 사빈은 그를 위즐증가 계단에 앉히고 하소연을 들어주었다.

‘마고님, 저도 할 수 있을까요?’


‘외길은 꼼꼼하니까 잘할 거예요. 그래도, 너무 매달리지 말아요. 마음숲은 즐기는 곳이에요. 배움도, 시간도.’


사빈은 때로 외길과 함께 노래도 불렀다. 다른 혼들도 함께 모여 춤도 추었다. 그것 역시 마고의 일이었다.


나무 새와 혼의 연결점을 따라가면 외길이 어디 사는지 찾을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갈 수는 없었다.

그믐의 외출에서 갈 곳을 정하는 건 마고가 아니라 꽃수 열쇠였다.


사빈은 작은 새를 다시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

“외길과 연결되면 꼭 도와줄게.”


머리를 쓰다듬으니 새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빈은 까마득한 창고 안을 휘익 둘러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다음에 다시 와야지. 한 번에 둘러보는 건 역시 무리야.’


문을 향해 가는데 아래쪽 어딘가에서 신음이 들렸다. 아주 작고 여린 소리였다. 일부러 찾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힘이었다.


사빈은 두리번거리다 맨 아래 구석에 돌돌 말려있는 종이를 꺼내들었다.

‘그림?’


마음숲을 그린 그림이었다.

가늘고 부드러운 선이 마음숲 구석구석을 세세하게 옮겨놓았다. 두 개의 산, 두 개의 강, 혼알방과 아날빛숨까지. 그러나 식당 위즐증가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다.


지금의 위즐증가는 오 층이고, 아날빛숨보다 몇 배로 넓은데, 그림 속의 위즐증가는 이 층으로 지금보다 훨씬 작았다. 빛깔도 장식도 오래전의 모습이었다.


‘이건 내가 오기 전이야.’

사빈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그림, 언제부터 여기 있는 거야? 이천 년이 넘었다는 거야?’


사빈이 쓰다듬자 그림은 숨을 할딱거렸다.

“마고님, 저의 주인을 찾아주세요.”


그림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 작아 사빈은 그림을 귀에 갖다 대었다.

“너의 주인이 누구지?”


“이름을 잊었어요.”

“주인이 누구인지 모른다고? 어떻게 공명하지?”

“끊어졌어요.”


연결점이 끊어졌다는 말이다. 연결점이 없어도 유물이 여기 있다면 그 주인은 인간세에 있고, 아직 죽지 않았다.


사빈은 그림을 반듯하게 펼쳤다.

주인의 이름도 모르고 연결점도 끊어졌다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다.

‘연결점도 없다니? 이 그림의 주인도 중간자가 되었나?’


그녀는 오래도록 그림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정성이 들어갔는지 가슴이 아릴 정도였다.

‘혹시 이 그림의 주인이 다음 마고?’


사빈의 기대와는 달리 어리화는 반응하지 않았다.

“주인에 대한 다른 기억이 있니?”


“마음숲을 아주 좋아했어요.”

그것은 여기 들어오는 혼들 모두가 똑같았다.


“상상하는 걸 좋아했어요. 인간세를 두려워했고요. 그림 속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저를 그렸어요.”


사빈은 한숨이 나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런 건 단서가 될 수 없는데···. 아는 것이 거기까지라면 방법이 없구나.’


미아가 된 유물에게 사실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 주인을 만나면 너와 공명하도록 도와줄게.”


사빈은 정성스럽게 그림을 말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그믐 외출에서는 안타까울 때도 많았다. 어디로 갈지 선택할 수 없으니 부탁받아도 들어주지 못한다.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건, 인간세로 나가도 다음 마고를 찾으러 다니지 못한다는 뜻이다. 전혀 엉뚱한 곳을 헤매다 올 수도 있다.


‘그래도 유물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좋겠어.’

바림창고에서 나오니 세상의 모든 소음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막혔던 귀가 뻥 뚫린 기분이었다.


바림창고에서는 유물이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의 흐름도 못 느끼고, 빛도, 소리도 들지 않았다.


사빈은 문 앞에 서서 소리에 익숙해지기를 기다렸다.


숨꼭지가 사르락거리는 소리부터 혼알방이 내는 소리, 바람 소리와 혼들의 이야기 소리까지. 익숙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사빈은 살아있는 소리에 이끌려 창가로 다가갔다.


그 속에서 용희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초연님, 마고님 어디 가셨어요?”


“응? 아직 안 내려왔어. 아롱재에 있나?”

초연은 찻잎을 손질하느라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녀에게는 찻잎을 손질하는 것도 명상의 방법이기에 숨을 고르며 한 장 한 장 정성을 다했다. 그녀의 손을 거치는 것보다 찻통이 알아서 골라 가는 찻잎이 훨씬 많았다.


“중앙황제님이 오셨대요. 위즐증가에서 기다린다고 하셨어요.”

“황제님이? 왜 직접 안 부르시고?”


“전언이 안 통한다고 하셨대요. 아! 그러면 바림창고인가요?”

“그러네. 그럼 우리 소리도 안 들릴 거야. 나올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초연과 용희의 소리를 들으며 사빈은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황제님이?’


중앙황제 현원이 갑자기 찾아오다니. 장날도 아니고, 축제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럴듯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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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4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4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4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4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1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5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4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6 2 14쪽
»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40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2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6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1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0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3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81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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