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39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5.24 11:25
조회
131
추천
2
글자
11쪽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DUMMY

그늘에 숨어있던 혼이 슬슬 기어 나왔다.


비쩍 마른 백발노인이었다. 그의 혼빛은 우람하고 건장한 남자라 마치 두 사람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는 한얼의 옷에 새겨진 황금 무늬에 이끌려 한얼에게 다가갔다.

인도자의 옷에 황금빛 해태 문양이 새겨있는데, 혼에게는 그것이 태양처럼 보인다고 했다.


“이제야 오셨습니까. 빨리 갑시다.”

혼은 손을 떨며 비틀거렸다.


“때가 되지 않았으니 기다리시오.”

“더 있다가는 미칠 것 같아요. 차라리 지옥이 낫겠어요.”


“명부전이 완성되면 부르러 올 터이니 마음 편히 가지시오.”

한얼은 차분하고 느린 말투로 혼을 안정시켰다.


“그렇습니까···.”

혼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죽어도 달라지는 건 없네요. 남들처럼 살려고 아둥바둥 견뎠는데, 참 부질없습니다.”


“그래도 씻김을 잘 끝내면 다른 길이 열릴 거예요.”

혼을 위로하고 싶었지만, 그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솔직할 걸 그랬습니다. 화도 내고, 놀기도 하고, 적당히 살걸···.”

혼은 비척비척 어둠 속으로 돌아갔다. 그늘 속의 다른 혼들도 웅크린 채 돌아앉았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다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지옥이 있다고 믿는군요.”


“무리를 쉽게 이끌 방도가 필요하니까요. 권력을 얻고 유지하려면 두려움을 자극하는 것이 쉬우니까요. 희망보다는 공포가 힘이 세지요.”


한얼이 갑자기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깜짝 놀라 헉 숨을 삼켰는데, 다음 순간 이미 뜨락고원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뜨락고원에 서니 중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산 아래 반김길이 임천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고요산맥에서 서로바다까지 잘 보였다.


지평선 가까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맑음고원이 보였다. 그 꼭대기에 명부전이 있을 텐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맑음고원 양옆이 추위계곡과 별빛바다입니다. 별빛바다와 서로바다에는 천인의 집터가 남아있습니다.”

한얼은 뜨락고원 아래쪽을 가리켰다.


나는 임천문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은 보이지 않지만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뜨락고원에 서서 중천을 둘러보는데 문득 눈앞이 흐려졌다.

뿌연 막이 걷히자 전혀 다른 풍경이 보였다. 보이는 풍경 위에 다른 풍경이 겹쳐 있었다.


눈을 깜빡여도 뿌연 막이 사라지지 않아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으로 흐릿한 풍경이 점점 또렷해졌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폐허가 되기 전의 중천이었다.


산에는 바위와 숲이 어우러지고, 계곡을 따라 맑은 강이 흘렀다. 깨끗하고 푸른 강물에서 시냇물이 흘러가며 군데군데 샘을 이루었다.


샘물을 따라 싱그러운 풀과 꽃이 들판을 가득 채웠다. 그 위로 천인들이 즐겁게 날아다녔다. 그들의 노랫소리도 들렸다.


혼들도 슬픔에 잠겨있지 않았다. 인간세의 수련을 끝냈다는 후련함, 씻김에 대한 기대로 들떠있었다.


한 아이의 혼이 내 앞으로 튀어 올랐다.

‘고마님!’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조금 전과 다름없는 황량한 벌판이 펼쳐져 있었다. 한얼은 묵묵히 맑음고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이건? 중천의 기억일까? 중천이 꾸는 꿈인가?’

나는 콩닥거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


벌써 중천의 반을 돌아본 것 같은데, 어리화는 반응이 없었다.

‘여기가 아니라면 인간세뿐인데···.’


한얼은 명부전으로 올라가기 위해 맑음고원으로 길을 잡았다.

그래, 중천에 왔으니 명부전에는 가봐야지.


맑음고원으로 가는 길은 절대 헤매지 못할 것이다. 어디서 봐도 가장 높은 산을 찾으면 되니까.


“사빈님, 수명환은 어떤 겁니까? 그믐마다 내려가는 것이 수명환 때문이라면서요?”

한얼은 지팡이를 또각거렸다.


마음숲에 처음 왔으니 궁금하겠지. 나는 아롱재 천장에 붙어있는 숨꼭지를 떠올렸다.


“그건 숨꼭지로 만들어요. 마음숲을 사용하는 대가죠. 혼이 가질 수명 중에서 한 달간의 숨을 미리 받아요. 일천팔십 개를 모아야 수명환 한 알을 만들어요.”


“그걸로 인간세를 돕습니까?”

“예. 수명환 한 알이 사람의 수명을 오 년 늘려줘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 아닌가요? 사람들이 피천귀를 만드는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저렇게 백하와 똑같이 말하는지.


사람에 대한 방식은 성천마다 다르다. 각자의 소임이 다르니 천사와 선사가 보는 기준과 차사가 보는 관점이 다를 수밖에.


천사는 인간세를 숙제로 여긴다. 삶과 죽음을 지켜야 하는 숙제.


선사는 사람들을 보살피고 가르쳐야 할 존재로 본다. 그래서 선사에게는 피천귀보다 사람이 먼저였다.


차사로 말하자면, 인간세는 피천귀를 만들어내는 골칫덩어리였다.


하지만, 같은 중앙황천이라도 마고에게 묻는다면, 사람은 당연히 도와야 할 존재이다. 씻김을 끝내고 마음숲을 거쳐 간 혼을 품고 있으니까.


“처음부터 수명환을 만든 건 아니래요. 불천수 전투가 끝나고, 마고 시나래가 만들기 시작했죠. 중앙황제님과 북방흑제님의 배려였어요.”


이유 없는 증오와 광기 어린 마녀사냥으로 원래 수명보다 일찍 죽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것이 사람과 피천귀의 합작임을 알아낸 다음이었다.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맑은 혼을 가졌으나 혼자서는 빠져나오기 힘든 사람을 돕기 위해 시작되었다.


“사람의 수명을 늘리다니. 피천귀들이 빼앗지 않습니까?”

“마고가 직접 건네야 효과가 있어요. 다른 이들이 건네면 물과 다를 게 없어서 피천귀도 공격하지 않아요.”


피천귀도 사람에게 기적을 만들어 준다. 이 사람 것을 빼앗아 저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 기적이라 할 수도 없지만.


물론, 인간세에서도 진짜 기적이 일어난다.

천사나 선사의 기운이 새어나가면 사람에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지만, 그야말로 소소하고 작은 기적들이다.


*


맑음고원 아래로 추위계곡이 끝없이 펼쳐졌다. 추위계곡의 바닥은 깊이도 알 수 없고, 무척 험난해 보였다.


두 번의 대혼란으로 하늘과 땅이 뒤집힌 모습 그대로였다. 계곡은 실핏줄처럼 갈라졌고 그 아래 바닥에는 빛도 들지 않았다.


꼭대기까지 바로 날아오를 수 있지만, 어리화가 반응하는지 보려고 혼들을 살피며 지나갔다.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혼을 찾으러 다닌다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옆에서 나란히 걷는 한얼을 바라보았다.

‘한얼님은 더 답답하겠지. 이유도 모른 채, 마냥 걷고 있으니.’


눈이 마주치자 그는 말없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쉽게 찾을 줄 알았는데···. 어리화 때문이라고 알려줘야 하나···.’

복잡한 내 마음과 달리 그믐의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려 숨을 들이마셨다.


중천의 텁텁한 공기도 적응하니 그럭저럭 다닐 만했다. 중간자에게 한계가 많아도 이럴 때는 쓸모 있구나.


‘그래, 황제님도 말씀하셨잖아? 조급해하지 말라고.’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주먹을 쥐었다.


‘못 찾으면 천인이 돌볼 거야. 잠깐이야 혼란스럽겠지만 마음숲은 무너지지 않아.’

걷다가 멈춰서 가슴을 폈다.

소리 없이 기합을 넣고 씩씩하게 앞장섰다.


“하하하!”

한얼이 웃음을 터뜨렸다. 느닷없는 웃음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에요?”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하. 사빈님 표정이···.”


그의 말을 듣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뭐가 재미있는지 그는 여간해서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나는 달아오른 볼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짙은 어둠 속에 엎드린 혼이 보였다.


그것은 다른 혼과 달랐다. 혼빛만 남은 오래된 혼이었다. 제대로 된 모습도 없이 어슴푸레한 덩어리가 되어있었다.


“저 혼, 얼마나 여기 있었을까요?”

“염라부로 가지 않은 혼이 더러 있습니다. 혼이 완강히 거부하면 내버려 둡니다.”


한얼이 어두운 혼을 지켜보았다.

“여기 있으면 고통밖에 느끼지 못할 텐데···.”


‘차라리 영천옥이 나을 텐데, 왜 이러고 있지?’

혼에게 다가가 머리 부분을 쓰다듬었다. 마고의 반지에서 은은하게 빛이 번졌다.


그 빛을 느끼고 혼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다시 태어나 사랑하자고 그토록 다짐했는데.”


소리도 다른 혼과 달랐다. 웅웅거리는 갇힌 소리였다.

긁는 것 같은 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안 한 탓이다.


“제가, 제가 죽였습니다. 그 사람을···.”

“이름이 뭔가요?”

나는 혼의 손쯤으로 보이는 곳에 손을 얹었다.


“모릅니다. 언제 여기 왔는지도 모릅니다.”

이름 없는 혼은 나를 올려다보았다.


혼은 온몸을 움찔거렸다. 찡그리는 것 같았다.

“혹시··· 만난 적··· 있나요?”


혼잣말하는지 혼은 몸을 부르르 털었다.

“아니, 그럴 리 없죠. 그럴 리가···.”


“삼도천이 기억을 지워서···. 중천의 공기도 마음을 갉아먹고···.”

덩어리의 윗부분이 푹 꺾였다. 고개를 숙인 것처럼 보였다.


“그 사람을 찾고 싶어요?”

“아니오, 다 부질없습니다.”

혼은 더 깊은 어둠으로 들어갔다.


‘혼빛은 선량하고 깨끗한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안타깝지만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는 발길을 돌렸다.


한얼이 내 옆으로 다가와 나란히 걸었다.

“영천옥으로 못 가는 이유가 있답니까?”


“묶여있어요. 인간세에서의 한이 남아서. 그걸 풀어줘야 하는데···.”

“그렇더라도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상대는 이미 영천옥에 있거나 인간세로 다시 내려갔을 테죠.”


“그렇겠지요. 매듭을 푸는 것도 지금이 아닌 그가 있던 시간과 공간이어야 하니까요.”


인간세의 매듭, 어떻게 푸는지는 알지만. 그곳으로 가는 방법은 모른다.

그믐 외출은 꽃수 열쇠가 보내주는 곳만 갈 수 있다. 길을 모르니 그의 시간으로 찾아갈 수도 없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혼을 돌아보았다.

“중천에 이렇게 묶인 혼이 많나요?”


“많지는 않을 겁니다. 아, 인간세에도 비슷한 혼이 있던데요? 현재의 겹과 시간의 층에 낀 것들이죠.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하지 못한 혼들.”


“인간세에요?”

머릿속에 반짝 빛이 떠올랐다.

‘그 그림!’


바림창고에서 주인을 찾아달라고 하던 그림이 생각났다. 주인과 연결점이 끊어졌다고 했다. 그림이 찾는 주인도 끼인 혼일까.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5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4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4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4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2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6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4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6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40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3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7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2 2 13쪽
7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0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4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83 4 13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