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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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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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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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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5.1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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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DUMMY

구단돌은 놀랍고 황당한 얼굴로 굳어있었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나도 놀라는 표정을 지어야 한다.


“어? 호박벌 작가님?”

당당히 그의 예명을 불렀다. 버스정류장에 내리기 전, 명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산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수염도 말끔하게 깎았고 낡은 옷이지만 깨끗이 빨아 입었다.

연탄에 매달리지 않고 생각을 바꾼 것 같아 안심이었다.


“여어, 이런 우연이 있나. 여기는 어쩐 일로?”

구단돌이 가까이 오자 그를 위해 앞자리 의자를 가리켰다.


“사진 찍다가 여기까지 왔네요. 요즘 하늘과 골목을 찍으러 다니거든요.”

“사진작가요?”

“소설가 지망생이에요, 아직 배우는 중이예요.”


“소설이라···. 소설 좋지.”

구단돌이 주문한 순두부찌개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날씨 이야기를 나누었다.


찌개가 나오자 그는 몇 숟가락 뜨고 나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 꿈 말이오. 너무 생생하단 말이야. 아기들이 지금도 내 품에 있는 것 같고.”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밥을 떠먹었다.


밥공기를 반쯤 비우자 그는 숟가락을 치켜들고 나를 보았다.

“내가, 꿈에 감동해서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거든? 답이 없더라고. 허!”


‘따로 사는 사춘기 아들에게 답장을 기대하다니 꿈이 야무지시군.’

그 말을 뱉을 수는 없고. 나는 화제를 돌렸다.


“선생님 작품은 어디서 볼 수 있어요?”

“웹사이트에 올라 있기는 한데···. 다 옛날 거라.”


말을 흐리는 것을 보니 지박령 참새가 알려준 대로 뭔가 잘 안되나 보다. 작가들은 자기 작품에 자부심이 대단하던데.


그는 왼손잡이가 아닌데도 왼손으로 수저와 젓가락을 움직였다.

숟가락질이 서툴러 국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오른손은 식탁에 올려놓고 가끔 손목을 돌렸다.


‘손목이 아프다고 했지. 허리도 안 좋고.’

저 정도면 상당히 심각한데.


마고의 눈으로 손목을 훑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허리는 약하기는 해도 운동을 안 해서이고. 손목은 거의 다 나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손을 안 쓰려고 한다면···. 마음에 원인이 있는 거지.’


“요즘은 어떤 작품 하세요?”

“일 안 한 지 꽤 됐어. 아이디어가 바닥났거든. 아무 생각도 안 나. 아무 생각도.”


구단돌이 고개를 저었다.

“억지로 생각해내면 어디서 본 것 같고. 어떨 때는 예전에 내가 썼던 장면이더라고. 흥.”


“아이디어 중요하죠. 저도 배운 말인데, 장소가 바뀌면 생각도 바뀐대요. 카페나 야외에서 작업하는 건 어떠세요?”


“다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 나 같은 놈이 뭘 하겠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말이 없었다.


식당에서 나올 때 구단돌은 내가 먹은 김밥 값을 내주겠다고 했다. 휴게소에서 아침과 커피를 얻어먹은 보답이라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내가 내야지. 이런 우연이 언제 또 있겠나?”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다른 방식으로 보답할게요.”

나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제부터는 과감히 그를 도와도 된다. 김밥값을 갚는다는 명목이 생겼으니까.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행운이 따라야겠지.


그것이 아니라도 마고는 천사나 선사와 달리 수명환을 핑계로 사람을 도울 수 있다. 그믐의 닷새 동안, 자격이 되는 사람에게만.


*


빌라 주택가가 보이는 작은 공원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은 학교나 유치원에 있을 시간이라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초봄이라도 밖에 나와 있기에는 쌀쌀한 날씨이고.


공원 제일 안쪽, 구석진 나무 그늘에 낡은 벤치가 보였다.

저기서는 방해받지 않고 편안하게 생각할 수 있겠어. 명상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까.


“이번에도 수명환은 못 주나 보다. 내일이면 그믐 외출도 끝이니.”

수명환은 주기도, 받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내려올 때마다 누군가를 도우니 아주 의미 없는 외출은 아니다.


‘어떻게 도와줄까···.’

가장 먼저 할 일은 자존감을 세워주는 일이다. 그래야 자신 있게 가족들 앞에 나서지.


‘다 해봤는데, 안 되더라고. 나 같은 놈이 뭘 하겠어?’


분식집에서 구단돌이 한 말은 구조신호였다.

수렁에서 건져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보통은 스스로 걸어 나와야 하지만, 밥값을 내주었으니 그를 도와야지.


‘어쩌면 바림창고에 유물을 남겨두었을지 몰라.’

바림창고는 일종의 물건보관소였다.


마음숲의 혼들은 태어날 때를 기다리며 쉬다 가지만, 공방이나 학당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혼들은 마음숲을 떠나기 전, 자신이 만든 유물을 하나씩 마고에게 맡긴다. 마고는 그것을 아롱재 한쪽 벽 바림창고에 넣어둔다.


구단돌이 공방에 다녔는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마고라도 그 많은 혼을 다 기억할 수는 없으니.


‘그럼, 바림창고로 가보자.’

숨을 고르고 앉아 눈을 감았다.


대기의 기운을 빌려 시야를 넓혔다. 생각은 공원을 빠져나가 하늘 높이 올라갔다.


인간세를 벗어나 삼도천 바다 위를 지났다. 짙은 안개로 둘러싸인 한긋장벽이 보였다. 대명천과 마음숲을 감싼 구름장벽이었다.


염라부 영천옥에서 들어올 때는 한긋장벽과 두루천을 건너야 하지만, 그 반대편인 배웅문으로 들어갔다.


나는 서둘러 아날빛숨으로 들어섰다.

크고 작은 바윗돌과 나무 조각, 반짝이는 모래로 장식된 찻집 아날빛숨에는 많은 혼이 차를 마시며 쉬고 있었다.


아날빛숨의 꼭대기, 아롱재로 들어섰다.


천장에서 사각거리는 수많은 빛을 지나쳐 맞은편 벽 앞에 섰다. 겉에서 보면 작은 옷장처럼 보이지만 문을 열면 다른 세상이었다.


내가 들어서는 순간 비좁은 창고는 화살이 날아가듯 빠르게 늘어났다.

깊은 바닥에서 까마득히 높은 천장까지 선반마다 혼들의 유물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구단돌의 기운을 찾아보자. 사람으로 태어나도 바뀌지 않는 그 혼의 기운.’


마음숲에서는 혼에 어울리는 이름을 가졌을 테니 유물에 적힌 이름은 소용없었다. 수많은 유물 속에서 하나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구단돌의 경우는 특별했다.


주인이 어려움에 처했으니 그의 유물도 그와 공명하며 불안해할 것이다. 주인이 많이 힘들어지면 유물이 스스로 주인을 찾아가기도 한다.


아직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유물을 맡기지 않았거나, 지금의 시련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정도이거나 아니면 주인과 유물의 공명이 약하기 때문이다.


‘구단돌은 어느 쪽일까?’

다른 방법이 없으므로 들썩이는 물건부터 살펴봐야지. 그의 기운과 가장 가까운 것을 찾아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루마리 하나를 찾아냈다. 분명 구단돌의 기운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두루마리를 펼쳤으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 종이에는 대충 흘려 쓴 기호와 문자가 가득했다.


‘뭐야, 이건?’


마음숲에서 글자는 어떤 모양이든 상관없었다. 쓸 때의 마음과 생각이 고스란히 담기니 아무렇게나 휘갈겨 써도 읽을 수 있었다.


“아무 말 대잔치 연애시? 학당에서 쓰라고 해서 씀. 절절한 연애시라고 해두시오.”

한 줄 한 줄 읽다 보니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래서 주인을 찾아가지 못했구나.’

유물에 대한 주인의 애정이 부족했다. 아주 많이.


‘얼토당토않은 사건에서 시작해 뜬금없는 사건들이 이어지다가 통쾌하게 끝난다.’

앞부분 소개 글은 그의 연애시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재미있네. 이 정도면 작품 하나 나오겠는데? 진짜 장난삼아 썼지만.”


나는 마고의 반지를 쓰다듬으며 두루마리를 소환했다. 두루마리는 기다렸다는 듯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손으로 들어왔다.


‘주인에게 건네줘야지.’

그것도 아주 간단하다.


옥탑방 현관 앞에 두루마리를 놓고 문을 두드렸다. 바람이 세차게 부는 것처럼.


나는 그가 제대로 두루마리를 찾아가는지 맞은편 지붕에서 지켜보았다.


구단돌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아무도 없자 문을 닫으려다가 고개를 숙였다.

“이건 뭐야? 날아왔나?”


그는 두루마리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천천히 펼쳤다.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자여도 상관없었다. 그가 읽으려 하자 먹물 자국이 순식간에 한글로 바뀌었다.

그것 역시 주인의 힘이다. 혼은 사람을 움직이는 근원이니까.


곧이어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가슴까지 시원한 크고 맑은 웃음이었다.

“우하하, 굉장한데? 이런 게 어디서 나왔대?”


구단돌은 밖으로 나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변 건물을 둘러보고 거리를 내려다보더니 재빨리 두루마리를 옆구리에 끼웠다.


“이건 기적이야! 진짜 대박이라고!”

그는 주먹을 불끈 쥐고 펄쩍펄쩍 뛰었다. 두루마리를 쓰다듬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도 손을 털고 일어섰다.

바림창고의 유물이 제 주인을 찾았으니 앞으로 주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


“보십시오!”

참새가 으스대며 턱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고깔모자를 쓴 난쟁이의 모습이었다.


허공에 휴대폰 화면이 떠올랐다. 구단돌과 그의 아들 구기정이 주고받은 문자였다.

참새와 땅콩이 어떤 우연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아들이 답장을 보냈다.


- 빠, 캠핑 가봤어? 친구네는 간대.

- 낚시는 가봤다. 갈래?

- 바비큐?

- 연탄구이 맛있지. 연탄도 사놨어.

- ㅇㅇ


빼꼼 분식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답장이 없다고 서운해 했는데, 어쨌든 잘 되었어.


“마고님이 연탄과 낚시를 엮으라고 부탁하셔서 말이죠.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해. 역시 영감이야.”

내가 칭찬하자 참새와 땅콩이 가슴을 부풀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봤지? 봤지? 우리가 능력자야. 사이다는 어땠나?”

땅콩은 처음 봤을 때처럼 어린아이 모습이었고, 사이다는 자신이 맡은 홍연지와 닮은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어쭈? 나도 한다면 하는 성격이야. 홍연지도 가족사진을 꺼내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좋은 징조야.”

세 영감은 다음 계획을 세우자고 머리를 맞댔다.


그들의 대화를 들으려는데 머릿속에서 다른 소리가 웅웅 울렸다.


‘예? 그 사기꾼이 또 나타났어요?’

이건 용희의 목소리인데? 아날빛숨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벌써 닷새째 아침이다.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날빛숨에서의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오.’

용희와 이야기하는 상대는 백하였다. 마음숲을 지키는 상산대의 대감.


‘혼들은 순수하고 겁이 많아. 거짓을 모르니 거짓말도 쉽게 믿지.’

초연의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아날빛숨을 도와주는 천인으로 돌봄차사였다.


‘그런 혼에게 거짓말을 하다니, 아무리 반인반천이라도···.’

용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마고님? 마고님, 뭐 하세요?”

참새가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돌아갈 때가 되었어. 뒷일을 부탁해.”

나는 꽃수 열쇠를 찾아 들었다.


“벌써요?”

땅콩이 서운한 표정을 짓자 참새와 사이다가 땅콩의 어깨를 두드렸다.

땅콩은 아이의 모습이고 참새는 난쟁이 모습이라 형제 같아 보였다.


“구단돌 가족이 다시 모이면 좋겠어. 할 수 있지?”

“맡겨만 주세요.”


사이다가 한쪽 눈을 감았다 떴다.

“또 오실 거죠?”


머릿속에는 아날빛숨에서의 소리가 이어졌다.


‘사빈님은? 아직 안 돌아왔소?’

‘오늘 오실 거예요. 백하님. 차 한 잔 드세요. 지금 막 샘물을 떠 왔는데···.’

용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간드러졌다.


‘용희의 마음이 전해져야 할 텐데. 상산대감은 언제쯤 눈치 채려나.’

천계로 돌아가도 사흘은 잠들 테니 용희를 방해할 일은 없겠구나.


나는 노리개에 달린 연보랏빛 천 조각을 꽉 쥐었다. 아롱재에 남아있는 꽃수 열쇠가 제 짝을 부르고 있었다.


영감들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졌다.


“마고님! 꼭 오세요.”

“우리가 해낼 거고만요.”

“결과를 보러 오셔야죠. 꼭이요.”

영감들의 인사가 메아리가 되어 울렸다.


*


눈을 뜨니 아롱재의 침대 위였다.


맑고 향기로운 대기, 밝고 선선한 바람, 선명하고 생기 넘치는 숨.

여기가 중앙황천, 대명천의 마음숲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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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빛숨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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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천계_마른 우물 사건 2 23.05.31 104 2 10쪽
29 천계_마른 우물 사건 1 23.05.30 123 2 14쪽
28 천계_얄리장터 열림날 23.05.30 124 2 13쪽
27 천계_혜존각 고운방 23.05.29 124 2 10쪽
26 천계_예사달 할머니 23.05.29 122 2 12쪽
25 천계_혼들의 암표 거래 23.05.28 144 2 13쪽
24 천계_얼음과 흙의 신경전 23.05.28 112 2 10쪽
23 천계_마음숲의 돌봄차사들 23.05.27 124 2 13쪽
22 그믐_삼도천의 뱃놀이 +2 23.05.25 134 3 12쪽
21 그믐_별빛바다의 고사목 23.05.25 132 3 12쪽
20 그믐_맑음고원 명부전 23.05.24 107 2 11쪽
19 그믐_중천의 붙박이 혼 23.05.24 131 2 11쪽
18 그믐_샘물을 찾아서 23.05.23 139 2 12쪽
17 그믐_새맘계곡의 비뢰수들 23.05.23 137 2 10쪽
16 그믐_중천에 들어서다 23.05.22 135 2 14쪽
15 천계_보호의 인 23.05.22 164 2 14쪽
14 천계_위즐증가의 손님 23.05.21 135 2 14쪽
13 천계_주인을 기다리는 유물 23.05.20 139 2 12쪽
12 천계_배웅문을 나서는 혼 23.05.19 132 2 12쪽
11 천계_새로운 인도자 +2 23.05.18 137 2 12쪽
10 천계_어리화가 피다 23.05.18 142 2 11쪽
9 천계_공방 거리와 이즈막광장 23.05.17 146 2 13쪽
8 천계_대명천 마음숲 23.05.17 151 2 13쪽
» 그믐_바림창고의 소장품 23.05.16 150 2 13쪽
6 그믐_지박령들이 돕다 +2 23.05.16 163 3 13쪽
5 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23.05.15 160 3 11쪽
4 그믐_기린과 천마의 아이들 23.05.12 177 3 13쪽
3 그믐_한밤의 외출 23.05.11 200 3 12쪽
2 프롤로그 2_두 명의 스승 23.05.10 287 3 12쪽
1 프롤로그 1_중앙황천 다움성 +2 23.05.10 678 4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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