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_호박벌 작가의 고뇌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산이 높아 해를 보려면 한 시간은 더 있어야겠지만 그 전에 버스터미널에 닿을 것이다.
구단돌은 잠깐이라도 달게 잤는지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생기가 돌았다.
“어쩌다 길을 잃으셨대. 아가씨만 혼자 온 거요?”
그는 룸미러를 흘끔거렸다. 뒷자리에 앉은 내가 궁금하겠지.
“요즘 고민이 많아서요. 산에서 헤맬 줄은 몰랐어요.”
나는 유리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가 운전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에그, 세상이 얼마나 흉한데···.”
구단돌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산 고개에서 태워달라고 했을 때, 구단돌은 한참동안 망설였다.
아직 어둠이 짙은 시각, 혼자 산을 헤매는 젊은 여인이라니. 누구나 의심할 것이다. 처음에 그가 그랬듯이.
‘가까운 터미널까지만 태워주세요. 너무 힘들어요.’
나의 애원에 그는 가까스로 마음을 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뒷문을 열자 그는 깜짝 놀라며 문을 열고 나왔다.
‘아, 아니. 그게···.’
구단돌은 서둘러 연탄이 든 상자를 운전석 뒤로 옮기며 헛웃음을 뱉었다.
‘거, 요즘 연탄구이가 유행이라···, 이, 이건 어···, 그래, 나, 낚시해서 구워 먹으려고, 그런 거요.’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
‘구단돌이 낚시라고 했으니, 낚시로 가야겠어.’
창밖을 바라보며 어떤 방법이 좋을까 이리저리 생각했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워야 한다.
인간세에서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쪽으로. 마치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의식의 흐름을 맞춰야 한다.
내가 뒷자리에 앉은 이유가 있다.
그 자리에서는 구단돌의 뒷모습과 비스듬한 옆모습, 액자 속 가족사진까지 보였다. 그의 생각과 반응을 티 안 나게 읽을 수 있었다.
“어디서 오셨수?”
구단돌이 입을 달싹이다 말을 꺼냈다.
나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의 명함을 보지 않았는가.
“문곡시에 살아요. 혹시 아세요?”
“엥? 진짜? 나도 거기 사는데?”
구단돌은 깜짝 놀라며 잠깐 나를 돌아보았다.
“히야, 세상 참 좁네. 여기까지 와서 동네 사람을 만나다니.”
그는 놀라 혀를 내둘렀다.
*
구단돌은 터미널 앞까지 갔다가 차를 돌렸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내가 기사 한 번 하겠수. 이런 우연이 그리 흔한가?”
“와! 고맙습니다. 그럼 제가 휴게소에서 국밥 사드릴게요. 커피도요.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어서 엄청 배가 고파요.”
“그러네, 나도.”
구단돌이 윗배에 손을 얹고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자동차는 고속도로로 들어섰다.
곧게 뻗은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이어질 것이다. 새벽에 꾼 꿈에 대해서도.
나는 그의 시선이 가족사진에 머물다가 눈꺼풀이 깜빡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아까 산에서 이상한 꿈을 꾸었다오.”
구단돌이 드디어 꿈 이야기를 시작했다.
“깊은 산속에 초가집이 있는 거요. 싸리문에 마당도 있는. 아! 옛날 그림에 나오는 딱 그런 집말이우.”
구단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쩌다 거기까지 갔는지 모르지만, 난 아궁이 앞에 앉아 물을 끓였다오. 다음 순간에는 내가 마당에 서있는데 웬 젊은 남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거요.”
구단돌의 시선이 가족사진으로 향했다.
“쌍둥이였다오. 아기를 안는데 어찌나 황홀한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니까.”
구단돌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에밀레와 나토두를 안고 있을 때 지었던 표정 그대로였다.
“꿈이 어찌나 생생한지 온기가 느껴졌다니까. 하이고, 을매나 따뜻하고 보드라운지.”
아기 기린과 천마를 한 번에 안아보았으니 사람으로서는 상당한 호사를 누린 것이다. 사람이 신물의 결계 안에 들어간 것도 엄청난 일이지만.
“많이 힘들었거든···. 일도 안 되고, 돈도 없고, 몸은 여기저기 아프고. 아내와 자식도 떠나고. 어찌나 괴로운지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했는데···.”
구단돌이 한숨을 쉬었다.
“꿈에서 아기를 안으니까 아들 녀석 태어날 때가 생각나더라고.”
그는 운전하면서 옛 기억에 잠겨들었다.
“그때는 참···, 좋았는데.”
*
휴게소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침 식사부터 챙겼다.
마고의 반지와 꽃수 열쇠는 얼마간의 돈도 마련해준다. 어느 시대, 어디서나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있으니까.
구단돌은 커피를 들고 오랫동안 서성였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화면을 바라보다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먼 산을 보다가 다시 휴대폰을 쓰다듬었다.
나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사람은 열 명 남짓이었다. 그들 모두 스마트폰을 들고 있었다. 문자를 보내거나, 다른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말을 전하는 기계가 있어도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
그믐의 외출 때마다 느끼지만, 인간세는 여전하구나.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많은 것을 바꿨어도 근본은 바꾸지 못했다.
‘내가 사람이었던 때와 다를 게 없어.’
도시가 생기고, 건물이 올라서고, 생활방식이 달라졌어도, 사람은 그대로였다. 그저 옷만 갈아입은 것처럼.
달라진 것이 없으니 언제라도 그들과 섞일 수 있다. 그믐마다 내려와도 들키지 않는 비결이었다.
서방백천의 선사들 역시 사람이 생겨나기 전부터 인간세에 파견되었지만,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 파견이 끝나 다른 선사가 와도 사람들은 구별하지 못한다.
‘인간세’는 천계와 선계, 천인과 선인 사이에 들어있어 붙은 이름이다.
같은 인간세라도 존재계에는 아직 사람이 생기지 않았다. 태초에는 실증계에도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나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스승인 예사달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라면 사람이 처음 생겨났을 때는 저 모습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천사와 선사를 보며 비슷하게 닮아갔다.
겉모습과 사는 방식, 모든 것을 따라 할 수 있지만, 천선계와 근원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
사람이 사는 실증계는 너무나 척박하다.
고된 환경에서 살아남느라 수많은 기계와 도구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사람의 마음까지 풍요롭게 하지는 못했다.
여기서는 그걸 발전과 진화라고 부르지만···.
그래도 나는 마고니까 사람들을 도와야지.
죽을 때까지 죽을힘을 다해 열심히 사는 사람도 많으니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무던히 망설이는 구단돌, 호박벌이라는 작가부터.
*
휴게소에서 출발해 톨게이트 근처 시내버스 정류장에 이르기까지 구단돌은 아내와 자식에 대해 이것저것 들려주었다.
아내와는 몇 년 전부터 별거 중이라는 것, 그래서 아들과도 떨어져 지낸다는 것. 가까운 동네인데도 만나지 못한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내가 콜센터 다니는데 맨날 힘들다고 짜증냈거든. 나도 화가 나서 소리 질렀는데, 그것도 미안하고.”
“아드님은 몇 살이에요?”
“기정이? 육학년. 내년이면 중학생이 되지.”
“아빠랑 떨어져서 쓸쓸하겠네요.”
“아들이라 그런지 멋대가리 없어. 싸우고 들어와도 말도 없고. 답답해.”
나는 구단돌의 가족사진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엄마와 아빠 사이에 서서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마음은 안 그럴 거예요. 잔소리만 하니까 미리 방어하는 거죠. 그 나이 때 아이들은 캠핑 좋아하지 않나요? 아빠랑 낚시도 하고, 같이 고기도 구워 먹고. 그런 거 좋아한다던데요?”
“에구, 맨날 방에 틀어박혀 게임만 해. 속이 터진다니까.”
구단돌이 툴툴거렸다.
정류장에 멈추기 전에 나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이들은 금방 자라니까 더 크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세요. 어른들은 삶의 지혜라며 훈계하려 들거든요. 가르치려하지 말고 보여주세요.”
그와는 어차피 다시 만날 것이니 오늘은 이쯤에서.
그믐 외출은 아직 사흘이나 남았다.
*
버스 정류장은 한가하고 고요했다. 종점에서 가까워서인가.
구단돌의 명함을 들여다보았다.
‘안서동 드림빌이라···.’
문곡시에 처음 왔는데 안서동이 어디 있는지 알 턱이 없다.
그래도 내게는 든든한 조력자가 있다. 땅에 붙어사는 영감들은 재미있는 일이 없나 늘 기웃거리니까.
지박령 영감을 부르는 방법은 간단했다.
휘익 휘파람을 한 번 부니 맞은편 빌딩에서 투명하고 거대한 덩어리가 쿨렁쿨렁 빠져나왔다. 육 층짜리 빌딩을 덮고 있던 덩어리였다.
투명한 덩어리는 서서히 작아져 내 앞에 설 때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되었다.
“마고님! 어쩐 일이세요? 여기까지 오시고?”
영감은 신이 나서 폴짝거렸다.
“안서동 드림빌에 가야 해. 가장 빠른 길로.”
“그런 거라면 바람잡이가 있죠. 불러드릴까요?”
“응. 근처에 며칠 묵을 방이 있으면 좋겠어.”
영감은 눈을 빛내며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오! 무슨 일인데요? 저도 가면 안 될까요? 여기 너무 심심해요. 사람들 구경하는 것도 지겨워 죽겠어요.”
“숨도 없는 영이 어떻게 죽으려고?”
“에이, 마고님도. 말이 그렇다는 거죠.”
어린아이 모습답게 영감은 내 소매를 흔들며 울상을 지었다.
“네? 네? 저도 데려가요.”
“그래. 그쪽 영감도 필요하니 네가 나서주면 좋겠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영감은 신이 나서 바람잡이를 불렀다.
바람잡이는 땅에 붙어사는 지박령과 달리 땅 끝에서 땅 끝으로 날아다니는 운기였다.
천사와 선사가 남긴 천선계의 기운이 땅의 기운과 만나 살아 움직이는 운기가 되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살에 닿는 느낌이 있고, 천선인의 말도 알아들었다.
나무 꼭대기에서 내려온 바람잡이가 순식간에 내 몸을 감쌌다.
바람을 타면 힘들이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날지 못하는 중간자에게는 귀한 선물이었다.
“안서동에는 왜요? 수명환 때문에요?”
“도와줄 사람이 있어. 도움을 받았으니 갚아야지.”
“그래요? 그럼 가시죠, 마고님!”
영감은 춤추듯 바람잡이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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