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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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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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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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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8.1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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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천계_얼음칼 아움

DUMMY

위즐증가의 옥상정원에는 백하와 사빈, 둘만 남았다.


서방백제 영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바구니 가득 손질한 채소가 담겨 있었다.


영랑이 떠난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사빈은 마주 선 백하를 살펴보았다.

‘아픈 것 같지는 않은데?’


백하의 하얀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가시버시날이니···.”


‘할 이야기라는 게···. 혹시···.’

사빈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목구멍과 가슴 사이가 꽉 막힌 듯 답답했다.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은 느낌이 꿈틀거렸다.

막힌 가슴의 반대쪽은 텅 비어있다가 한 겹씩 벽을 쌓았다.


‘이거···, 이게 뭐지?’

사빈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의 진심에 가까이 가고 싶으면서도 두려웠다. 멀리 떨어지고 싶었다.


“잠시 물러나시오.”

백하는 사빈의 양팔을 잡아 기둥 가까이 세웠다.


손으로 공기를 쓸자 서늘한 바람이 일어났다. 바람을 따라 차가운 얼음조각이 서서히 엉겨 붙었다.


백하의 손에서 빛이 나자 얼음조각이 그 빛을 받아 쉬시식 소리를 냈다.

우박과 서리 같던 얼음조각이 엉겨 붙으며 날렵한 모양을 잡아갔다.


그가 기합을 넣자 얼음조각은 투명하고 날카로운 단검이 되었다.


“그대를 위한 얼음칼이오.”

얼음칼은 허공을 둥둥 떠 사빈의 눈앞에 이르렀다.


하늘의 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맑고 깨끗했다.


‘아름다워···.’

사빈이 중얼거리자 얼음칼도 주인을 알아보았다. 손을 내밀자 얼음칼이 스르르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아움?”

얼음칼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의 이름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사빈님의 숨이 있다면 어디서든 아움을 꺼내 쓸 수 있소. 부르면 나타날 것이오.”

“전, 칼 쓰는 법을 모르는데요?”


“괜찮소. 쉬운 상대라면 아움이 알아서 사빈님을 움직일 거요. 강한 상대를 대비해 검술을 가르쳐주겠소.”


백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빈님이 원한다면.”


“왜 저한테 이런 것을···.”

“인간세에 무기도 없이 나가는 것은 위험하오. 바나가 돕겠지만···.”

바나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바나가 하는 짓을 보면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한얼과 자신의 천력이 들어갔어도 근본은 사람의 혼 찌꺼기가 아닌가.


‘마고의 반지가 넘어가면 사빈님을 지킬 것이 없지 않소?’

백하는 덤덤한 눈빛으로 사빈을 내려다보았다.


“그대가 어디를 가든, 무엇이 되든 무기 하나쯤은 필요하다오.”


사빈은 얼음칼의 서늘한 느낌에 놀랐으나 서서히 익숙해졌다.

‘아움···.’


그녀는 백하를 올려다보았다.

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의 연회색 눈동자 속에 자신이 들어있었다.


‘결계가 흐트러졌을 때도, 한긋장벽이 무너졌을 때도 도와주었지. 피천귀들과 싸울 때도 항상 내 옆에 있었어.’


백하가 고개를 돌리자 가슴이 아리고 허전했다. 자신이 담겨 있던 눈동자가 보이지 않자 마치 자신이 사라진 것 같았다.


반다강가의 절벽에서 들렸던 심장 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체온과 숨소리가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가슴에 쌓인 벽이 서서히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시원하게 뚫리던 마음이 빠르게 막혔다.

‘난 떠나야 해. 다시는 들어오지 못할 거야.’


얼음칼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 그녀의 생각에 따라 얼음칼은 다시 공기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긴 소매 속에서 두 손을 맞잡고 백하를 향해 똑바로 섰다.

“고맙습니다. 아움을 만들어주셔서. 대감에게 또 신세를 졌네요.”


사빈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백하가 그녀의 팔을 잡았다.


“그대를 사모하오. 중간자가 되었기에 사랑을 못 느낀다는 것도 알고 있소. 곧 마음숲을 떠난다는 것도. 그게 무슨 상관이오? 그대가 어디에 있든 내가 가면 되는 것을.”


사빈은 숨을 들이마셨다. 마음속 구멍과 벽이 마구 뒤섞여 어지러웠다.

‘사랑을 못 느낀다고? 중간자라서?’


“저···. 전 할 일이 있어요.”

사빈은 백하의 손에서 팔을 빼냈다.


“먼저 내려갈게요. 많이 바쁘거든요.”

사빈은 백하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가슴이 따끔거리며 아팠지만, 그와 동시에 무겁게 누르던 답답함이 희미해졌다.


*


축제와 연회는 무사히 끝났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던 시간이 지나자 혼알방은 죽은 듯 고요했다.


지친 혼들은 앞으로 며칠 동안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한동안 마음숲에 방문하는 천인의 숫자도 줄 것이다


중앙황제와 서방백제, 두 신제를 배웅하는 길은 두루천 앞까지였다. 다른 세 신제는 일찍 떠났기에 벌써 다움성에 도착했을 것이다.


사빈과 백하는 마고와 상산대감의 신분으로 두루천 앞 마중교까지 따라나섰다.


두 신제도 혜존각에서 바로 날아갈 수 있지만, 떠나기 아쉽다며 마중길까지 걷자고 했다.


“지금 가면 언제 올지 모르잖아? 다음 바람길 연회는 동방청천이니까. 마음숲에 다시 오려면 한참 기다려야 해.”


영랑은 배웅하러 나온 사빈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 올 때는 다른 마고가 있을 거예요. 곧 찾아낼 것 같아요.”


어리화의 색이 완전히 검어졌다.

중앙황제의 말대로라면 지금쯤 인연이 무르익었을 것이다.


“사빈아, 네가 원하는 것을 똑바로 봐라. 천계의 시간이 길고 느리다고 소중한 것을 놓쳐도 된다는 뜻은 아니니까.”


“예.”

사빈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곧장 대답했다. 신제의 말이니 깊은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영랑은 사빈의 손을 놓고 현원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뒤에 서 있는 백하와 사빈을 번갈아 보면서 현원에게 손짓했다.


현원도 백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쌍한 것. 뜻대로 안 되었구먼.’


그녀는 영랑에게 고개를 기울이고 전언을 건넸다.

‘내가 좀 도와줄까나?’


마중길 앞에 이르자 현원은 사빈을 불렀다.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 특별히 상을 주고 싶은데, 뭐가 좋겠니?”

“아니에요. 마땅히 할 일인데요. 상이라니요.”


“가고 싶은 곳이나, 갖고 싶은 것이 있느냐? 뭐라도 다 들어주마.”

현원의 말을 듣자 사빈은 문득 가고 싶은 곳이 떠올랐다.


‘회향미곡.’

거기 가면 단서가 있을 것이다. 아니, 가야만 한다. 설화옥에 빠진다 해도.


‘하지만, 회향미곡에 보내달라고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거절할 수도 없고.’


사빈은 만만한 곳을 둘러댔다.

“예사당에 가보고 싶어요. 할머니가 계시면 좋겠지만, 안 계셔도 상관없어요. 며칠 지내면서 옛날 생각도 하고, 가림산의 정기도 받고 싶어요.”


“호오, 소원이 겨우 그거냐? 좋다. 너 혼자 가면 위험하니 백하와 같이 다녀오려무나.”

현원은 사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백하를 불렀다.


“백하야, 사빈을 데리고 예사당에 머물다 오려무나. 어리화 때문에 천력도 바닥났을 테니 잘 지켜야 한다.”

현원은 활짝 웃으며 백하에게 눈을 찡긋거렸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백하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사빈은 재빨리 손을 내저었지만 아무도 그녀를 보지 않았다.

중앙황제도, 서방백제도 백하와 작별 인사를 나누느라 그녀를 보지 않았다.


‘천력은 벌써 돌아왔는데요. 황제님이 보호의 인을 주셨잖아요? 온사랑 덕분에 예전보다 더 강해졌어요. 혼자,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사빈은 감히 소리치지 못하고 손목에 걸린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현원이 작정하고 한 말이니 어떤 이유를 대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


가림산으로 가기 위해 마음숲의 장벽을 넘었다.


하늘 위에서 사빈은 대명천의 푸른호수를 내려다보았다.

푸른호수를 끼고 자리잡은 영진촌과 인도자들의 숙소인 낭원도 보였다.


사빈은 구름의 촉촉한 물기가 얼굴에 와 닿는 것을 느끼며 바람에 가볍게 몸을 실었다. 몸은 가벼웠으나 마음은 무거웠다.


그녀의 바로 옆에 백하가 말없이 날고 있기 때문이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가림산까지 가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됐소. 마음숲에 있기 답답했소.”


사빈은 고개를 돌려 푸른호수를 내려다보았다.

‘바나라도 있으면 좋았잖아!’


바나를 끌고 나오려 했지만, 예사당에 간다니 어딘가로 숨어버렸다.

‘왕왕, 예사당이라고라? 재미없어라.’


바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왈, 얼음대감이 간다고라? 주인님을 지킬 대감이 있어라. 여기서는 팬들을 지킬 거여라. 인간세에서는 지켜드릴 거라.’

횡설수설 떠들다가 몰래 빠져나갔다.


사빈은 대명천의 경계를 벗어나며 백하를 돌아보았다.

“설마 예사당에 묵으실 건가요?”


“당연하지 않소? 가림산 꼭대기에서 밤이슬을 맞으라는 말이오?”

백하는 돌아보지도 않고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사빈은 쓰읍 침을 삼켰다.

‘예사달 할머니가 계실지 모르잖아?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


*


가림산 아래 내려 숨을 돌렸다.

중간자에게는 가림산까지도 힘든 길이었다. 한달음에 대명천을 지난 것도 대단한 일이니까.


가림산 꼭대기를 올려다보았다.

꼭대기까지 단숨에 날아오를 수 있었다. 한두 번 온 곳이 아니니 산세도 잘 알고 있다.


사빈은 앞장서서 예사당을 향해 날아올랐다.

가볍게 날아올랐으나, 보여야 할 예사당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올라왔으나 눈앞에 낯선 숲과 바위만 펼쳐졌다.

‘예사당이 나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사빈은 허공에 떠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오르기 시작한 곳은 가림산이지만, 처음 보는 산이었다.


사빈은 바람을 멈추고 허공에 멈춰 섰다.

“여긴 가림산이 아니에요!”


그 순간, 거센 회오리가 그들을 감쌌다. 어디선가 기척도 없이 갑자기 생겨났다.


먼지와 흙을 잔뜩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때리자 사빈은 눈을 감았다.


마고의 천력을 쓰려 했지만, 힘을 쓸 수 없었다.

‘천력을 봉인했어!’


사빈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회오리에 휩쓸리는 찰나, 백하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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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4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5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4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4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3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6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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