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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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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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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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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7.2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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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DUMMY

온새미실은 지샌차 향기가 은은하게 배어있었다. 익숙한 차 향기를 맡자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샌차는 밤을 지새고 새벽을 맞는 이슬이었다. 영롱한 기운이 고스란히 담겨있어 자주 마시면 몸과 마음이 깨끗해졌다.


사빈은 현원이 손짓하는 대로 그녀의 옆에 앉았다.


“천력이 많이 약해졌구나.”

현원이 사빈의 오른쪽 손목을 살짝 들추었다. 어리화 무늬가 나타났다.


“검붉은 어리화···. 곧 검은 꽃이 되겠구나.”

“그 전에 찾아야죠.”

사빈이 대답했으나 현원은 그녀의 손목에 손을 얹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 예언 기억하니?”

“예언이요?”


“다훤이 전욱의 가슴에서 솟아날 때, 들렸다는 그 예언 말이다.”

“예. 전에 알려주셨어요.”


현원은 북방흑천 전욱이 일러준 하늘의 소리를 읊조렸다.

“검은 꽃이 태어나면 넋과 몸 사이를 홀로 서성이는 이가 잃어버린 조각을 찾으리라.”


그녀는 사빈의 손목을 들어 검붉은 어리화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어리화 같구나. 그렇다면···, 검은 꽃이 될 때까지 다음 마고는 못 찾을 거다.”

“그렇게나 오래요?”


“마고와 상관없는 다른 일 때문일 거다.”

“하지만, 마음숲이 혼란해요. 한긋장벽과 대명천 경계에도 틈이 생겼고요. 상산대감도 보았어요.”


“백하에게 들었단다. 축이 틀어졌다고. 거기뿐만 아니라 마음숲의 다른 경계도 조금씩 틀어져 있다고.”

“마고가 새로 오면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호호,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단다. 신제에게 싸우고 뺏는 힘은 없어도 지키고 바로 세우는 힘은 있으니까.”

현원은 씁쓸한 표정으로 웃으려 애썼다.


싸워서 빼앗으며 죽이는 것은 인간세의 방식이었다. 천선계의 신제는 아끼고 보듬는 수호자였다.

‘신제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미미하지.’


“단서는 구했니?”

“예. 인간세에 있다는 것은 알아요. 현재의 실증계요.”


“그래. 이유가 있을 거야. 아직 나타나지 않은.”

“이유···요?”


“누군가 숨겨놓았다면 아무리 애써도 찾지 못하지. 가령 수리마루님이라면···?”

현원은 속삭이며 차를 따랐다.


“이건 고종명차란다. 북방흑천 북쪽에서만 자란다나. 천사장이 주더구나.”

“천사들이 마신다는 그 차군요.”

향기는 푸릇하나 맛은 서늘하고 개운했다.


사빈은 찻잔을 들었다.

“마고를 못 찾으면··· 천인 중에 누군가를 보내시겠죠? 전 어떻게 될까요? 지금처럼 천력이 계속 빠져나가면 먼지가 될 것 같아요.”


“그렇구나. 중간자로 돌아가야 하니···. 어쩌면 이미 수명을 다했을 수도?”

“황제님!”

사빈이 하얗게 질려 소리쳤다.


“오호호, 걱정 마라. 넌 예사달의 제자가 아니냐? 예사달이 어떻게든 지키겠지.”

현원은 찻잔을 들다 말고 허리를 폈다.


“그런데, 예사달은 대체 뭘 찾는 거냐? 여태 연락이 없어. 너는 알고 있니?”

“저도 잘···.”

사빈은 말끝을 얼버무렸다.


예사달의 편지를 받았지만, 어디로 무엇을 찾으러 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럼 넌? 뭘 하고 싶니? 네가 원한다면 어디든 보내주마.”

현원은 차를 한 모금 머금고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사빈은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동녘뜰 사빈재로 돌아가 예사달 할머니와 함께 살고 싶었다.

파라다이스 빌라에 다녀와서는 차원의 문지기가 되고 싶었다. 그들과 가족처럼 지내고 싶었다.


선아 대천사와 담아는 천사국으로 오라고 했다. 천사로 일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이수 대차사가 말한 대로 중간자의 몸을 버리고 낙원으로 갈 수도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좋고, 어느 것도 딱히 끌리지 않았다.


“아직 모르겠어요.”

“그래? 천천히 생각해보렴. 언젠가는 선택해야 할 테니.”

현원이 사빈의 손등을 토닥였다.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빈은 문득 꿈처럼 찾아온 소리를 떠올렸다.

“혹시 마눙님이나 이루님이 절 부르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응? 널 부른다면···? 왜 그런 생각을 했니?”

“그냥요. 마, 만약에···.”

사빈이 더듬거렸지만, 현원은 알겠다는 눈빛으로 끄덕였다.


“네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겠지. 설마 경고나 협박을 하려고 부르겠니? 아니면 네가 궁금해서? 호호.”

“아우, 황제님···.”


“아, 그러고 보니.”

현원은 온새미실 바깥의 기척을 살폈다.

주위에 아무도 없었지만, 현원은 손가락을 튕겨 침묵의 결계를 만들었다.


“그들을 위해 할 일이 있는 것도 같아.”

“그게 뭔데요?”

“미틈오름에서 마눙은 가슴에 구멍이 뚫렸고, 이루는 왼쪽 팔을 잃었어.”


사빈은 현재의 덫에서 보았던 남북양존의 모습을 기억해냈다.

마눙은 옷을 입었어도 구멍이 보였고, 이루는 왼쪽 팔이 있어야 할 자리에 소매만 펄럭였다.


“미틈오름에서 나는 눈을 잃었지만, 그것은 예사달이 되어서 돌아왔지. 혹시 마눙의 심장과 이루의 팔도 어딘가에 살고 있지 않을까?”

현원은 두 손을 모아 무릎 위에 올렸다.


“없을 수도 있어. 영랑의 날개도 선계 곳곳으로 흩어졌으니. 만약···, 찾게 되면 마눙과 이루를 설득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 있을까요?”

“그걸 모르겠구나. 예사달이랑 다훤도 그토록 오래 떠돌았는데 본 것이 없다니.”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잃어버린 조각이 바로 그걸 거예요.”


현원은 사빈의 팔을 살짝 잡았다.

“다른 천인에게는 묻지 마라.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있다 해도 어디서 찾을지 모르니. 반계의 일이니 조심해야 한다.”

“예.”


“반계에서는 천계가 바뀌어야 한다고 믿어. 뿌리부터 모든 것을. 지금의 천선계는 대혼란이 다시 오면 대항할 힘이 없거든.”

현원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은 달라. 아무리 힘을 키운다 해도 그것이 차원이 흘러가는 길이라면 무슨 수를 써도 안 될 거야.”


그녀는 생각을 떨치려는 듯 어깨를 돌렸다.

“이런 무거운 얘기는 그만하고. 가시버시날과 바람길 연회를 할 때 말이야. 우리 신제들이 마음숲에도 방문할 거다.”


“마음숲에요? 아니···. 왜 거기까지···, 그 뭐냐, 싫다는 것이 아니라···.”

사빈이 횡설수설하자 현원이 빙긋이 웃었다.


“천사장이 고집을 부려서 말이야. 환시 속에 우리가 혜존각에 앉아있었다나. 그래서 꼭 가야 한다더구나. 좋지 않니?”

현원은 소풍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아! 그리고 백하도 잘 보살펴다오.”

“얼음···, 아니 상산대감요?”


“그래. 그 아이가 강해 보여도 본성은 여리고 상처받기 쉽거든. 나중에 마고를 내려놓더라도 가끔 만나서 마음을 녹여주면 좋겠구나.”


사빈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 얼음대감이 약하다고?’


그러나 마음과 달리 알겠다고 대답했다.


*


다움성까지 왔으니 가림산 예사당을 지나칠 수 없었다.

예사달 할머니와 함께 머물던 곳이라 사빈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사빈은 마음숲으로 돌아가기 전, 호젓하게 혼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다른 이들은 깨어나지도 않았을 이른 새벽에 가림산 꼭대기에 올랐다.


신기하게도 예사당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였다.


뜰안샘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퐁퐁 솟아났다. 사빈도 올 때마다 샘 옆에 앉아 꽃과 새를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계십니까?”

사빈은 소년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아무 소리도 없었다.

“할머니가 데리고 가셨나?”


사빈은 울타리를 따라 걸으며 처음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참 좋았는데···.”


“지금도 좋습니다.”

한얼이 울타리 밖에서 소리쳤다.


그에 질세라 백하도 어깨를 으스대며 문을 열었다.

“사빈님이 있으면 어디나 좋소.”


그들을 보자 사빈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실망스러웠다. 혼자 고즈넉이 있고 싶었는데.


“다움성에서 출발하신다면서 어쩐 일이세요?”

“사빈님이야 말로. 이렇게 좋은 곳에 같이 오면 좋지 않소?”


“사빈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싶어 따라왔지요.”

한얼과 백하는 경주라도 하듯 빠른 걸음으로 대청마루까지 다다랐다.


“대감은 사빈님을 무척 싫어하셨다면서 왜 따라오십니까?”

“허! 누가 누구를 따라왔다고?”

백하는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한얼을 노려보았다.


“지나간 일은 입에 담지 않는 법이오.”

“아, 그러십니까?”

한얼은 싱글거리며 사빈을 바라보았다.


사빈은 등을 돌리고 한숨만 쉬어댔다.

‘이게 뭐냐고! 혼자 있으려고 왔건만. 왜 여기까지 따라와?’


입을 실룩이며 주먹질을 해댔지만, 등을 보인 까닭에 한얼과 백하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샘가에 앉아 물끄러미 물비늘을 바라보았다.


대청마루에서는 한얼과 백하가 말다툼을 하는지, 농담을 하는지 투닥투닥 대화가 이어졌다.


“사빈님과 저는 같은 중간자입니다. 이 천선계에 딱 두 명이지요.”

“무슨 상관이오? 나는 천선계에서 유일한 상산대감이오만.”


“제게는 술찬과 다솔이 있습니다. 혼을 인도할 뿐만 아니라, 사빈님을 지킨다 이 말입니다.”

“나 역시 빙천술을 쓴다오. 자네는 본 적 없지만, 얼음칼을 빼내는 빙천술을 꼭 보여주고 싶군.”


사빈은 귀를 막고 싶었다.

‘아우! 그만 돌아가세요.’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핑 머릿속이 울렸다.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손끝이 떨리고 손가락 발가락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불천수 강가로 나오면 날 볼 수 있다.’

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여인의 목소리였다.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조금 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한얼과 백하는 여전히 투닥거렸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불꽃이 튀지는 않았다. 인사처럼 장난처럼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중앙황제 현원의 말이 기억났다.

‘부탁할 것이 있어서겠지. 설마 경고나 협박을 하려고 부르겠니?’


사빈은 벌떡 일어났다.

‘다시 가봐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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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1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4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4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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