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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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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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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27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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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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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DUMMY

불천수 전투가 지나고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


예사달이 빙천골 능금원으로 들어섰다.

그는 중년 남자의 모습이었다. 대차사 해담과 비슷한 또래였다.


숲센장벽 빙천골은 절벽으로 둘러싸인 골짜기였다. 계곡의 다른 곳은 얼어붙어도 능금원은 늘 봄이었다.


천인 엄장이 결계를 쳤기에 빛은 따뜻하고 바람은 선선했다. 빙천술을 수련하기에 꼭 알맞은 장소였다.


예사달은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청년이 된 백하가 손님을 맞았다.

“예사달님이시죠? 스승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자네가 백하인가?”


“예.”

백하는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앞장섰다. 걸음걸이와 자세 모두 엄격하고 빈틈없었다.


첫끝마을에서 처음 보았을 때의 겁먹은 소년이 아니었다.

백하는 천인 엄장의 마지막 제자이면서 빙천술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소년을 능금원으로 보낼 계획은 아니었다.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하기에 바람에 실어 예사당으로 보냈는데, 정작 가림산에는 오지 않았다.


숲센장벽이 그를 위해 더 안전한 곳을 찾아낸 것이다.

나중에야 엄장이 어린 제자를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엄장은 깡마른 손으로 손님에게 차를 따랐다.

하얀 수염이 무릎을 덮을 정도로 길어 저고리에 흰 천을 덧댄 것 같았다.


“자네가 보낸 걸 어떻게 알았냐고?”

엄장이 헛헛 소리를 냈다. 기력이 딸리니 웃음이 바람 빠지는 소리로 들렸다.


“누구인지 몰랐는데, 함께 온 기운이 알려주더군. 우주를 떠돌던 운기 덩어리라고.”

“백하는 기억 못 하나 봅니다.”


“음. 그 아이가 아는 건 작고 가녀린 여인이라네. 헌데, 그때 왜 그런 모습이었나?”

“제가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바라는 모습일 겁니다.”


“지금은 왜 또 그런 모습인가?”

“아마도···. 어르신과 백하의 소망이 담긴 모습일 겁니다.”

“나와 백하가?”


“어르신은 대화하기에 어울릴 상대를 바라시지요? 세상을 적당히 알고, 흐르는 말도 알아듣는 경험 있는 천인을요. 백하는···.”


예사달은 고개를 들고 정원을 내다보았다. 한적한 정원에 바람 소리가 지나갔다.


“의지할 상대를 바란 거지요.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스승님 말고 믿고 따를만한 존재 말입니다.”

“허허허, 정말이지 자네를 속일 수가 없겠군.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다니.”

엄장은 껄껄 웃었다.


“여하튼 고맙네. 빙천술을 전수할 수 있어서.”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인연이 인연을 찾은 것뿐입니다.”


예사달은 차를 마시다 문득 잔을 내려놓았다.

“그 말씀을 하시려고 깃털구름을 보내신 건 아니실 테고···.”


*


예사달이 가림산 입구에서 깃털구름을 받았을 때 다훤도 같이 있었다.

‘어디라고? 능금원? 빙천골 능금원 말인가? 자네 언제부터 엄장님과 이런 사이가 되었나?’


다훤은 예사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나도 같이 가세. 북방에 갇혀있으려니 좀이 쑤셔 견딜 수가 없네. 이참에 빙천골도 보고 엄장님도 뵙고···.’


‘엄장님이 부른 건 날세. 자네가 아니라. 자네는 숙제가 있지 않나? 신성한 땅을 찾으러 인간세로 가는 길이라면서?’


‘가야지. 잠깐 인사하러 들렀는데···. 이게 더 재미있어 보이는데?’

‘그럼, 가던 길 마저 가게나.’


예사달은 다훤을 내버려 두고 연기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


천인 엄장에 대해 많이 들었지만, 직접 만나는 건 두 번째였다.


그는 숨가림 시기가 끝날 즈음 태어났다. 두 번째 대혼란인 미틈오름도 지켜보았으니 다섯 신제 다음으로 천계에 가장 오래 머문 천인이었다.


그의 지혜와 술법, 천력은 어떤 천인도 따라가지 못했다.

여간해서는 빙천골에 손님을 초대하지 않으므로 그를 직접 만난 천인은 극히 드물었다.


“부탁할 게 있어서 불렀네. 자네가 그 모습을 한 이유이기도 하지.”

엄장이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르신이 제게요?”

“저 아이를 부탁하네.”

엄장은 정원을 쓸고 있는 백하를 가리켰다.


예사달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르신, 벌써 가시려고요?”


“벌써라니. 이미 늦었네. 늦어도 한참 늦었지.”

엄장은 웃었지만, 예사달은 말을 하지 못하고 그의 깊은 눈만 바라보았다.


“저 아이를 도와주게. 분노가 영혼을 삼키지 않도록, 복수심에 눈이 멀어 마음을 갉아먹지 않도록 말이야.”

“분노는 적당한 약이 되기도 합니다.”


“백하는 친구도 없고, 마음 붙일 곳도 없어. 오로지 반계를 무찌르겠다는 각오뿐이지. 자네가 마음을 비우도록 도와주게나. 얼음칼이 자기 자신을 얼리지 않도록.”

“어려운 일이군요.”


“대차사 해담이 저 아이의 대부라더군. 백하를 찾고 있다니 중앙황천으로 데려가게. 다른 천인들과 살다 보면 모난 성격이 무뎌질 게야.”

“천인보다는···, 차사에 어울리겠군요. 천력이 강합니다. 다른 차사보다 훨씬 더.”


예사달은 정원에 서 있는 백하를 지켜보았다.


백하는 손을 움직여 바람을 불렀다.

그는 돌과 바위를 바람에 실어 무너진 벽에 하나씩 갖다 놓았다. 한꺼번에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하나씩 빈틈없이.


그러려면 허공에 떠 있는 돌 더미까지 다루어야 하므로 천력이 많이 필요한데, 자갈돌을 다루듯 편안해 보였다.


예사달은 고개를 돌렸다.

“알겠습니다. 현원님께 데려가겠습니다.”


“자네는···.”

엄장이 예사달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구만.”

“마음요?”

예사달은 허허 너털웃음을 지었다.


불쌍한 소년을 도와준 정도가 마음일 리 없었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나니 구태여 마음을 가질 필요도 없지 않는가.


”그 마음이 아픔을 느끼게 할 테지만, 아픔이 꼭 나쁜 건 아니네. 자라게 해주거든.“

엄장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자네와 이렇게 차를 마시는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네. 자네가 무척 궁금하다네.“

”저도 어르신에 대해 많이 알고 싶습니다.“


엄장과 예사달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


엄장이 무결의 고리에 들자 예사달은 능금원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능금원을 버리고 가자니 아깝구나. 여기만큼 긔니초가 잘 자라는 곳이 없는데.“


”원하시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어디에서 많이 자라는지 잘 압니다.“

”지금 필요한 건 아닐세. 좋은 약재다 이거지.“


백하도 자신이 살고 자란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스승이 무결의 고리에 들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때가 되니 세상이 멈춘 듯,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아프고 서운했다.


손수 가꾸고 돌보던 능금원을 떠나야 한다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스승님께서 부탁하셨습니다. 예사달님을 잘 따르라고요. 어디로 가든, 무엇을 하든.“

”중앙황천으로 갈 거네. 나를 따르지 말고, 황제님을 따르게나. 그분이 가라는 곳으로 가면 된다네.“


예사달은 걸음을 멈추고 백하를 돌아보았다.

”자네는 무슨 일을 하고 싶나?“


”반계를 모조리 해치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백하는 표정 없이 딱딱하게 말했다.


예사달이 한숨을 쉬었다.

‘엄장님이 걱정할 만하군. 그건 정말이지··· 천계의 방식이 아니야. 세상을 얼리고, 얼음칼을 만드는 빙천술이라도 자기 마음까지 얼리면 안 되지.’


백하의 연회색 눈동자를 바라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건 너무 어려운 숙제입니다. 어르신.’


*


가림산 북쪽 사부작뜰에서 백하가 빙천술을 선보였다.

까마득히 넓은 벌판에 하얗게 서리가 내려앉았다.


백하는 바람처럼 허공에서 얼음칼을 빼내었다. 길고 투명한 얼음칼이 그의 손에서 영롱한 빛을 뿜었다.


칼을 휘두르자 수천 개의 얼음 표창이 만들어졌다. 그의 손짓에 따라 얼음 표창은 사방으로 날아가 표적을 얼어붙게 했다.


흙과 나무로 만든 표적을 향해 얼음칼을 내리치자 정확히 반으로 쪼개졌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서늘한 바람이 가림산 줄기를 타고 현원과 해담이 앉아있는 중턱까지 올라왔다.


가림산 중턱에 앉은 현원의 얼굴은 환희로 빛났다.


천인 엄장이 무결의 고리에 들었다는 소식에 슬퍼하고 있었는데, 그가 남긴 제자를 보니 슬픔은 사라지고 기쁨과 기대로 가득 찼다.


”세상에! 엄장이 저런 엄청난 제자를 보내주다니! 놀랍구나, 놀라워.“

현원이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단합니다. 기특하네요. 그토록 찾아도 못 찾았는데···, 빙천골에 있었군요.“

해담 대차사는 대자가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당장 훼 대차사를 불러야겠어. 저 정도의 빙천술이라면 반계와 피천귀는 물론이고 어떤 적도 상대할 수 있을 거야.“

현원이 흥분하여 주위를 둘러보자 예사달이 그녀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예사달은 언제나처럼 소년의 모습으로 현원 옆에 앉아있었다.

”어머니, 피천귀와 상관없는 곳으로 보내십시오. 엄장 어르신의 유언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했기에?“

”백하는 불천수 전투에서 부모를 잃었습니다. 분노와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어요. 저 상태로는 제대로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겁니다.“


현원은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냐···. 삼도천 수비대를 맡으면 딱 맞는 천력인데.“

”엄장 어르신은 당신의 제자가 마음을 열고 세상으로 나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제 생각에는···.“


예사달이 가느다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현원은 그의 말을 기다렸다. 모습은 소년이라도 그 안에 누구보다 깊은 지혜가 들어있었다.


”마음숲으로 보내시죠.“

”대명천 마음숲?“


”불천수 전투가 끝나고 반계가 마음숲과 가까워졌습니다. 마음숲을 지키기 위해 상산대를 새로 만드셨지요?“


대차사 해담이 현원에게로 어깨를 숙였다.

”좋은 생각입니다. 대명천 차사 중에서 상산대원을 뽑기는 하였으나 아직 상산대감이 없으니 그 자리에 앉히시지요.“


”그럽시다.“

현원이 손바닥으로 차탁을 내리쳤다. 찻잔과 찻주전자가 달그락 흔들렸다.


해담의 마음은 자랑스러움에서 염려로 바뀌었다.

”대명천은 내가 맡고 있으니 백하를 마음숲에 두고 지켜보겠습니다.“


현원도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숲은 한긋장벽이 이중으로 막고 있지. 상산대원이 해날품곡까지 갈 일도 없고.“


예사달이 일어나 사부작뜰을 내려다보았다.


”상산대감은 한요재에서 지내니 마음숲을 나갈 일도 없을 겁니다. 그곳의 혼도 씻김을 마친 혼이라 피천귀와 상관없고요. 돌봄차사나 키움차사도 싸움과는 무관한 능력이지요.“


”마음숲의 마고도 임무가 다르니 마음을 다스리기에 딱 어울리는 곳이군요.“

해담의 말에 현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백하를 상산대감으로 보내자꾸나.“

현원이 환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백하는 산 아래 서 있어서 보이지도 않을 텐데 쉽게 손을 내리지 못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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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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