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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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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12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26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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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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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DUMMY

청록빛 운기 덩어리는 동녘뜰에 이르렀다.


동녘뜰은 다른 곳과 달랐다. 두 번이나 대혼란이 지나갔어도 태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별의 파편도 없으니 조용했다.

거기 붙은 기억 조각도 없으니 고요뿐이었다.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순수하고 맑았다.


운기 덩어리는 그곳이 좋았다. 다른 곳을 떠돌다가도 돌아와서 쉬었고, 한동안 머물다가 다시 떠나곤 했다.


언제인가 경계를 떠돌다 돌아왔을 때 낯선 이가 동녘뜰 꽃밭에 앉아있었다.


‘침입자?’

운기 덩어리는 허공에 멈추어 낯선 이를 살펴보았다.


낯선 존재 역시 둥둥 떠 있는 기운을 알아보고 일어났다.

“여어, 이곳 주인인가?”


그는 덩어리 주변을 맴돌며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청록빛 기운이라···. 자네를 뭐라고 부르지?”


“이름 따위 없네.”

운기 덩어리가 꿈틀거리며 대답했다. 온몸으로 웅웅 울리는 소리였다.


“그럼, 내가 이름을 지어주지. 예사달 어떤가? 예사달, 난 다훤이라네.”

다훤이 손을 흔들었다.


그제야 덩어리는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검은 수염의 남자에게 머물던 씨앗이었다. 그의 심장이 된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너를 알고 있다. 이름을 다훤이라 하였구나.”

덩어리가 웃느라 쿨럭거렸다.


“자네 지금 웃는 건가? 날 안다고?”

“북방흑천의 아들이군.”


“허! 아들? 무슨!”

다훤이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청록빛 기운을 다시 살폈다.


“나를 안다고? 그러고 보니 자네의 기운도···.”

다훤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간에 주름이 깊어졌다.

“이 기운 누구와 비슷한데···.”


“중앙황제와 닮았는가?”

“그래! 현원님! 어? 그건 또 어떻게 아는가?”

다훤은 놀라서 운기 덩어리를 찔러보았다. 기운만이 아니라 혼의 빛깔도 현원과 같았다.


“그분의 눈이로군! 이런 일이 있나.”

“자네만 하겠나? 천사장 전욱과 사람의 혼 새하가 맺은 사랑의 결실이지 않나.”


“헉! 그, 그런 얘기는 참아주게. 소름이 돋는다네.”

다훤은 양손을 엇갈려 팔을 문질렀다.


“예사달, 나와 함께 가겠나?”

“왜 그래야 하지?”

“알고 싶지 않나? 자네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다훤이 눈을 빛내자 운기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오그라들었다가 펴지기를 되풀이했다.


“난 혼자 있고 싶네.”

“그러지 말고.”

다훤은 양팔을 벌려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렸다.


“이 넓은 우주에서 우리가 만난 것이 보통 인연인가? 새로운 길을 선택하라는 계시일세.”

“계시가 아니라 경고겠지. 자네를 가까이하지 말라는.”

예사달이 자리를 피했으나 다훤은 포기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쫓아다니며 졸라댔다.


결국 예사달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떨쳐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으니 때가 되었다는 뜻인가.’


예사달의 몸이 쿨럭거렸다.

‘나는···, 준비가 되었는가?’


“재미있을 거야. 자네와 내가 같이 다니면.”

다훤의 말에 예사달은 몸을 오므렸다가 부풀렸다.


*


중앙황천에 들어서자 운기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다훤이 놀라 덩어리에서 떨어졌다.


덩어리는 한 점으로 모였다가 서서히 펼쳐지며 천인의 모습이 되었다. 문지기 천인을 닮았다.

“내가 태어난 곳이 맞군.”


예사달은 다움성까지 가는 동안 수십 번이나 모습을 바꾸었다. 지나치는 천인과 비슷하게, 모습을 바꾸는 속도도 점점 빨라졌다.


“역시 여기 와야 할 운명이야. 자네의 고향이라고!”

다훤이 예사달의 어깨를 힘껏 두드렸다.


다움성 앞에 섰을 때 그는 소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중앙황제 현원이 온새미실 난간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몸에서 시작되었으니 나의 어머니인가.”

“너무 과하지 않나? 어머니라니.”


“다훤, 자네는 자네 아버지에게나 신경 쓰게.”

다훤은 입맛을 다시며 씰룩거렸다.


현원 역시 예사달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그녀는 온새미실 난간에서 단숨에 날아 내려왔다.


“이게 남아있었구나. 응? 내 눈이 살아있었어!”

“어머니, 어머니라 부르겠습니다. 이 친구가 저를 예사달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현원은 가슴이 먹먹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대혼란 시기에 생긴 상처는 신력으로도 낫지 않았다. 새로이 눈을 만들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할 수 없이 색이 비슷한 돌을 깎아 눈이 있어야 할 자리를 메꾸었다.

현원의 가짜 눈이 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그녀는 가슴이 먹먹하여 여러 차례 숨을 들이마셨다.

“전욱의 심장이 다훤으로 태어나더니, 내 눈이 예사달이 되었구나.”


“아니, 현원님, 제가 태어난 건 제 의지였습니다.”

다훤이 툴툴거렸다.


“너야 그렇게 생각하고 싶겠지. 아직 세상을 모르니까. 너야말로 전욱과 새하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현원의 말에 예사달은 호탕하게 웃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


다훤은 예사당 대청마루에 앉아 뜰을 내려다보았다.

“현원님은 참 인자하시군. 혼자 있기 좋아한다니 별채도 지어주시고.”


뜰안샘에서는 샘물이 또롱또롱 솟아나고, 울타리를 따라 아기자기한 꽃밭이 있었다.

예사달은 언제나처럼 소년의 모습이었다.


“나는 소명원에 방 하나 있을 뿐이야. 천사장의 몸에서 나왔다고 천사들과 함께 수련했다니까. 흥, 이제 나도 집을 얻을 때가 되었어.”


“그나마 다행이군.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면 천하의 망나니가 되었을 테니.”

예사달이 피식 웃었다.


“흑천에서도 천사국 소속 천사만 인간세로 내려간다네. 다른 천사는 흑천의 하늘과 땅을 지키지. 천사는 재미없어. 난 떠돌이가 좋아.”


“그러면서 예언은 왜 하고 다니나?”

“본대로 전하는 거야. 내 눈에 보였다고.”


“자네가 천사장보다 정확하게 예언한다면서? 천인들의 존경은 물론이고, 천사장의 믿음과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고.”

예사달은 눈을 감고 정좌하고 앉았다.


“그런 예언자가 어찌 이런 누추한 곳에 계속 오는가?”

마당에서 새소리가 들리자 예사달은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다훤은 예사달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싱글거렸다.

“예언이나 환시로 따지면 자네도 뛰어나지 않나? 천선계가 다 아는구만.”


“예언은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네.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을 때도 있어.”

“또, 또 그놈의 잔소리. 내 자네 때문에 귀가 막히겠어. 그저 본 대로 얘기한다니까.”


“그러다간 모두 자네의 예언만 기다릴 거야. 예언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거라고.”

“뭐. 생각 안 해 본 건 아닐세.”

다훤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 별은 왜 찾아낸 건가? 그냥 놔둬도 흘러갈 것을···. 붉은 별말일세.”

“별밭의 궤도가 일그러진 거 말인가?”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었어. 자네는 예언이라고 떠들지만.”


“내가 떠든 적 없네. 난 그저···.”

다훤은 몸을 비틀어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붉은 별이 초록별을 삼키는 거야. 그게 무엇이겠나? 별의 궤도가 일그러지는 거지. 미틈오름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그는 예사달을 보며 싱글거렸다.

“자네도 알지만, 우주의 가장자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 게 없지.”

“그래서 그만한 크기의 붉은 별을 찾았군. 초록별이 가까이 있는.”


“하하, 그렇게 된 거라네.”

“그건 자연히 흘러가는 일이네. 홍천과 청천에서 할 일이지. 괜히 천인들을 불안하게 한 거야.”


“그러는 자네는? 인간세에 역병이 돌 거라는 건 자네가 한 얘기야.”

“그건 준비하라고 한 거지.”


“사람들이?”

“아니. 중천과 염라부에서.”

예사달의 대답을 듣고 다훤은 헛헛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참···. 매몰차구먼.”

“자네도 인간세의 대전쟁을 예언하지 않았나? 덕분에 중천과 염라부에서 대비하겠군.”


“예사달이 하는 일은 나도 할 수 있네.”

다훤은 과자를 부수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잠시 후 작은 새들이 날아와 차례로 과자를 쪼아 먹고 갔다. 다훤과 예사달은 물끄러미 새들의 날갯짓을 바라보았다.


“예사달, 중천이 정말 황폐해질 것 같나?”

“음.”


예사달이 고개를 끄덕였다.

“끝도 없는 사막에 있는데, 하늘의 별이 엄청나게 밝았네. 그러려면 땅도 공기도 메말라야지.”


“그게 중천인 줄 어찌 아나?”

“임천문과 헤아림길도 보였어.”

“삼도천의 기운이 많이 흐려졌으니 그럴 수 있지 않나?”


예사달은 뜰안샘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막 솟아 나온 샘물이 산들바람을 타고 날아와 그가 들고 있는 잔에 고였다.


“중천은 살아있는 하늘이야. 자신을 보호하려고 물을 감출 거야. 기운이 탁해질수록 정수를 더 깊이 감출 거네. 누군가 깨울 때까지 그대로 굳어있을 거야.”


“아쉽군. 중천도 참 아름다운데···.”

“정해진 일은 바꿀 수 없어. 나와 자네가 보았으면 이미 일어난 일이지.”


다훤도 샘물을 불러 자신의 잔을 채웠다.

“나도 며칠 전 환시를 보았다네.”

“무슨?”


“수많은 천인이 죽어있었지. 무결의 고리에 들지도 못 하고 말이야. 그런 환시라면 보지 않는 게 더 나을 텐데···.”

다훤은 슬픈 눈으로 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그리되었을까. 혹시 자네도 나와 같은 걸 보았는가?”

“아니. 내가 본 건 해날품곡 위로 펼쳐진 검은 장벽일세.”


“해날품곡?”

해날품곡은 중앙황천과 동방청천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숲센장벽이 성천의 가림막이 되었고, 그 아래로 연곡호수가 바다처럼 펼쳐졌다.

호수에서 더 남쪽으로 황금들이 펼쳐지는데 미틈오름이 끝난 이후 줄곧 비어 있었다.


그곳에서 별밭을 지나 멀리 우주로 나가면 허공의 섬이 있다. 예전에는 동방청제와 남방홍제였던 마눙과 이루가 머무는 곳이다.


다훤은 반계에까지 생각이 이르렀다.

‘거기가 반계라던데···. 천선계의 반쪽 세계라고.’


“천선계의 반쪽이 아니고, 수리마루 정명에게 반대한다는 뜻이네.”

“자네, 왜 함부로 남의 생각을 읽나?”

“아, 미안. 난 말하는 줄 알았네. 하도 소리가 커서.”


다훤은 머리를 기둥에 기대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사건을 보기도 하지만,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면을 보는군.”


“기다리면 진짜 예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걸세.”

예사달은 다시 눈을 감았다. 불길한 예감이 스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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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1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4 2 11쪽
»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4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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