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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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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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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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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31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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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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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DUMMY

환자복을 입은 단가람이 거기 서 있었다.


나는 놀라서 뒷걸음질 쳤다. 파고라 기둥이 없었다면 세차게 넘어졌을 것이다.

“단가람, 어째서···?”


구부정한 어깨에 검버섯이 까맣게 핀 얼굴, 주름투성이에 움푹 팬 볼, 듬성듬성 남은 머리카락···.


달해산에서 보았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생명이 완전히 빠져나간 건 아니지만, 이대로 몇 개월이나 버틸지.


“단가람, 너무 심한 거 아냐? 변신도 적당히 해야지.”

“변신이라니요. 이게 제 모습인데요.”

그는 힘없이 픽 소리를 냈다.


“스승님이 절 보러 오시다니···. 제가 늙어서 호강하네요.”

단가람은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 눈을 보니 수명환 때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겸사겸사. 그런데 왜 입원한 거야? 반인반천은 죽을 때도 그다지 고생하지 않는데···.”


단가람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요. 이게 다 부작용 때문이죠. 마음숲에서···.”


서 있기가 힘든지 파고라 벤치에 앉았다.


나도 맞은편에 앉았다. 그곳에서는 허브 정원도, 간이무대도, 심장전문센터의 현관도 잘 보였다.


‘설화옥으로 보내지 않아 다행이야. 이렇게 벌을 받고 있으니.’

단가람은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초췌했다. 쪼그라든 그를 보니 마음이 쓰라렸다.


“인간세에서도 단가람이라고 불러?”

“아니오. 지금은 김치국이에요.”


“김···치국?”

어디서 들어봤는데?


“그, 그 부동산 사기꾼?”

파라다이스 빌라에 갔을 때 은서가 말해준 사기꾼의 이름이 바로 김치국이었다.


‘단가람이 정말 김치국이구나. 설마설마했는데.’


짱짱 만화방에서 작가 수첩을 뒤적이던 은서가 생각났다.

제목을 정하지는 않았지만, 임시로 ‘하이브리드 인간’이라 정했다는 반인반천 이야기.


“아이고, 다 옛날이야기예요. 지금은 조용히 지냅니다. 스승님을 모셨으니 스승님 이름에 누가 되는 일은 없어야지요.”

“생각났어. 이세철에서 김두호로, 최호식에서 지금은 김치국이라고?”


“어찌 그리 잘 아십니까?”

“괴기 소설 쓰는 정령의 후예가 있거든. 느티나무에게 들었다고 했어.”


나는 은서에게 들은 다른 이야기도 떠올렸다.

어릴 때 고생한 거며, 스승을 못 만나 제대로 반인반천의 삶을 누리지 못한 것까지.


은서는 김치국이 삼백 년 가까이 살았다고 했지만, 계산을 잘못한 것이다.

단가람은 이백오륙십 년 살았을까. 아직 수명이 많이 남았는데···.


출근 시간이 가까워지자 병동으로 드나드는 사람이 늘어났다. 아침식사를 마친 환자들도 하나둘 정원을 거닐었다.


“병실에 수명환을 건넬 사람이 있을까?”

내가 병동을 보자 단가람도 천천히 어깨를 돌렸다.


“글쎄요. 다른 병실의 환자는 잘 모르고, 외래 중에 있으려나···.”

단가람은 잔기침을 하며 병동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 403호 환자는 괜찮아 보이던데요. 애들 대할 때도 그렇고, 저 같은 늙은이 대할 때도···.”

단가람이 다시 어깨를 돌려 똑바로 앉았다. 등을 기대고 파고라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착하고, 욕심이 없고, 순수하달까요. 저랑 완전히 반대죠.”

“그 정도로는 수명환 시험을 받을 수 없는데···.”

나는 심장전문센터 병동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병실을 돌아다니며 살필 수는 없었다.

일 층에 면회실이 따로 있어서 가족도 면회실에서만 환자를 만날 수 있었다.


“중환자실은 어떨까요?”

단가람이 들고 다니는 물통을 열어 한 모금 삼켰다.


“여기 사람들은 대부분 중환자실에서 죽거든요. 저도 거기서 죽겠죠.”

“무슨 소리야? 아직 죽을 때는 아니야.”


“허허, 그래도 사람들에게 오늘내일하는 것처럼 보여야 해요. 그래야 갑자기 안 보여도 의심하지 않거든요.”

단가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피식 웃었다.


“인간세의 미스터리에 스승님이 등장하는 거 아세요?”

“내가?”


“예. 스승님요. 예전의 마고님들은 글자가 없을 때 다녔으니 이야기 속에 남았을 거고요.”

단가람은 켁켁거리며 목을 가다듬었다.


“죽어가던 사람이 살아나거나, 눈앞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는 일요. 거의 피천귀들 이야기지만, 스승님도 가끔 나오더라고요.”

“허어···.”


그럴 만도 하구나. 꽃수 열쇠가 예고도 없이 부르니 멀쩡히 있다가 사라질 수밖에.

그때마다 사람의 기억은 지워지는데, 기억이 되살아나는 사람이 있나 보다.


“요즘도 피천귀들과 잘 지내?”

“아뇨. 스승님을 모시고는 손도 대지 않습니다. 저도 슬슬 정리해야죠. 떠날 자리도 마련해야 하고.”


“정리?”

삶의 흔적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그 나이 즈음에는 자서전도 많이 쓰니까.


‘자서전?’

갑자기 은서가 생각났다. 은서의 소설로 남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단가람, 그 정령의 후예 말이야. 괴기 소설 쓴다는.”

“예.”


“이세철부터 김치국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는데, 어때? 작가에게 알려줄까? 단가람은 자서전 쓰는 셈 치고, 은서는 소설을 완성하고.”


“그거 좋네요. 자료도 꽤 있거든요. 일부러 남긴 건 아니지만.”

“좋아. 혹시 파라다이스 빌라에 가게 되면 은서에게 알려줄게.”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왕왕, 파라다이스 빌라라고라?”

바나가 뛰어들었다.

여전히 어린 비글의 모습이었다. 정원을 헤집고 다녔는지 털에 이파리가 붙어있었다.


“주인님, 왜 안 깨웠어라?”

바나는 파고라 안을 껑충껑충 뛰다가 단가람을 보더니 우뚝 멈추었다.


“주, 죽은 사람이어라?”

바나는 벤치 뒤로 숨었다.


“아니야. 단가람이야. 내 제자란다.”

“주인님의 제자여라?”

바나는 킁킁거리며 벤치 뒤에서 나왔다.


“주인님 가방에도 비슷한 기운이 있어라. 스승과 제자여서라?”

“비슷한 기운?”

나는 허리에 찬 작은 가방을 열었다.


‘맞다, 옥구슬!’

가방에서 새끼손톱만 한 구슬을 꺼냈다. 연녹색 옥구슬에 흰 구름무늬가 섞여 있었다.


지난 그믐에 가온과 함께 찾아낸 ‘길 잃은 물건’이었다.


잃어버리지 않으려 구슬에 실도 매달았다. 마음숲의 바람으로 실을 만들었으니 가벼우면서도 절대 주인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구슬을 손에 쥐자 정확히 단가람의 기운과 맞았다.

같이 있어도 나는 못 느꼈는데, 바나는 알아차렸구나. 단가람의 기운이 약해서 그런가?


‘아니면···. 내 천력이 더 약해졌나···.’

마고의 기운이 약해지면 공명을 못 느끼는 건가. 이러면 수명환 시험도 어려운데.


“이거 단가람 거. 천사가 아기를 위해 만든 거야.”

나는 옥구슬을 단가람의 손에 올려주었다.


“제 거라고요?”

“어머니 천사가 아기를 위해 만든 목걸이야. 북방흑천에서 나는 치유의 돌이던데?”


단가람은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뚫어지게 옥구슬을 바라보았다.


“아기였을 때는 목에 걸려있었대. 어쩌다 길을 잃었는지 몰라도 가온 천사가 찾아주었어.”


가온은 옥구슬값을 치르라고 했지만, 말하고 싶지 않다. 제대로 주인을 찾았으니 그 정도는 이해할 거야.


“그 바람실은 마음숲의 바람으로 만들었으니 절대로 단가람을 떠나지 않을 거야.”

“스, 스승님이요?”


단가람의 주름진 손이 부르르 떨렸다.

옥구슬 위로 그의 눈물이 떨어지자 구름무늬가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것 같았다.


“저, 정말로···. 제 것이 맞네요.”

그는 말없이 구슬만 바라보았다.


마음껏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를 위해 보이지 않는 결계도 쳐주었다. 그 정도는 제자를 위해 해줄 수 있지.


많은 사람이 지나가도 우리가 있는 파고라에는 가까이 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유를 모르겠지만.


*


심장전문센터 이 층으로 올라갔다.


중환자실 앞을 기웃거렸지만 내게 신호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피천귀조차 나를 피해 갔다.


향낭이 홀쭉해지기는 했어도 라온향이 남았나. 주머니를 열고 코를 들이대야 간신히 느껴지는데, 피천귀에게는 더 강한가.


바나는 몸을 투명하게 바꿔 내 뒤를 쫓아다녔다.

“수명환 줄 사람이 있어라?”


바나는 몇 걸음 걷고 또 물었다.

“빨리 주면 빌라로 갈 수 있어라?”


“파라다이스까지 가기는 어려울걸? 꽃수 열쇠가 보냈으니 일단 여기서 찾아야지.”

“여기는 없어라. 피천귀들만 득실대여라.”


“그래. 아무래도 병원은.”

차원의 문지기 바우도 그런 말을 했지. 병원은 피천귀들이 많이 다닌다고.


직원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가 내 옷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여기 오래 있지 말게. 가족들이 싫어한다네.”


“예. 알겠습니다. 여기는 문제 없으니 다른 곳을 둘러봐야죠.”

빠른 걸음으로 중환자실에서 벗어났다.


“왕, 수녀복이 나았을 거라. 천수 영감처럼.”

바나는 밖으로 나와서도 여전히 투명했다.

“수사나 의사도 괜찮았어라.”


“여기서는 흰 가운이 나을 것 같아. 그렇다고 훔칠 수도 없고.”

나는 병동 현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다른 건물도 둘러봐야지.


산책길로 접어들자, 센터 병동 뒤편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종류의 새들이 한꺼번에 내는 소리였다.


건물 뒤쪽 후미진 산책로로 들어섰다. 한 사내아이가 벤치에 앉아 새를 그리고 있었다.


벤치 앞에 새들이 옹기종기 과자를 쪼아먹었다. 과자를 던져놓고 새를 부른 것이다.


열 살 정도 되었을까. 아이는 단가람과 비슷한 환자복을 입었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느라 누가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나.’

나는 아이의 그림이 궁금해 살금살금 다가갔다. 새들이 날아가면 안 되니까.


몇 걸음 걷다 말고 멈추었다. 혼의 기운이 낯익었다.

‘이거···, 바림창고에 있던 기운인데···.’


아이의 기운이 약하기는 해도 알 수 있었다. 옥구슬의 기운은 알아차리지 못했어도 이번에는 확실했다.

옥구슬은 단가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가 만든 것이라 공명이 약할지도.


“내가 아는 혼 같아.”

“그러셔라?”

내가 전언을 보내자 바나도 생각신호로 대답했다.


‘저한테 맡기셔라. 인간세 꼬마를 상대할 때는 강아지가 최고여라. 유괴범도 강아지를 많이 이용하여라.’

바나는 하얀 포메라니안이 되었다.


하얀 털이 원래의 바나와 거의 비슷했다. 흰 털뭉치는 비슷하지만, 변신한 모습이 몇 배는 더 귀여웠다.


바나는 소리 없이 아이의 발치로 다가갔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자 아이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우와! 강아지!”

강아지를 보자 아이가 환호를 질렀다.

그 소리에 과자를 쪼아 먹던 새들이 한꺼번에 후드득 날아올랐다.


“너 어디서 왔어?”

아이는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강아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활짝 웃었다.


그때 아이에게서 기운이 퍼져 나왔다. 그 혼이 누구인지 보였다.

‘맞아. 이거···. 춤추는 새!’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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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3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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