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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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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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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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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2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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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그믐_인연 연결자

DUMMY

은서와 나란히 앉아 허브정원 간이무대를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는 바우와 다른 갤럭시 멤버들이 음향을 점검했다.


해밀의 차원에서 넘어왔다고 해서 모두 바우와 비슷할 줄 알았는데, 서로 달랐다.

머리카락도 붉은색, 노란색, 흰색으로 모두 달랐는데, 언뜻 보면 다섯 성천에서 한 명씩 파견된 것 같았다.


“마치 다섯 성천의 장수들 같네요.”

“그래요? 해밀의 차원도 다섯 성천이 있을까요?”

은서는 가방을 뒤적이더니 수첩을 꺼냈다.


“괜찮은 생각이에요. 다른 차원인데, 여기와 똑같은 거죠. 평행우주?”

은서는 ‘도플갱어’니 ‘이공간의 체계’라고 몇 글자 쓰고는 갑자기 수첩을 닫았다.


“참! 호박벌 작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호박벌 작가?”

잠시 묻어둔 기억을 뒤적였다.


그믐에 만난 사람을 늘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서 저 아래 묻힌 기억을 끌어내려면 시간이 걸렸다.


“아, 생각났어요. 구단돌. 호박벌 작가는 요즘 어때요?”


“가족관계가 궁금하다고 하셨죠?”

은서가 생글거렸다.


“저희는 작품만 보니까 개인사는 잘 몰랐는데요. 참 힘들게 지냈더라고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았나 봐요. 자살 소동도 벌였고요. 소식통한테 들었어요.”

자못 심각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말하는 소식통은 이귀들이다. 아직 천사를 만나지 못해 인간세에 잠시 머무는 혼들.

그리고 나무의 정령이 있다.


그들이 전해주는 소식은 사람의 뉴스보다 훨씬 빠르고 정확하다.


“그런데!”

은서가 방긋방긋 웃었다.


“지금은 함께 산대요. 예전보다 사이가 좋아졌대요.”


구단돌과 가족을 돕겠다던 세 영감도 생각났다.

그날은 참새, 땅콩, 사이다라고 부르라고 했었지. 열심히 도와줬구나.


“슬럼프를 극복하거나, 재기에 성공한 작가들 작품은 참 좋아요. 뭐랄까. 깊이가 묻어나요. 젊은 감각과는 또 다르죠.”


은서는 수첩을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사빈님, 호박벌님의 새 작품 보셨어요?”


“인기 있어요?”

“그럼요. 처음엔 그저 그랬는데, 갈수록 재미있어요. 한 번 보세요. 아무말 대잔치 연애시예요.”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내가 바림창고에서 두루마리를 가져다주었으니 내게도 지분이 있으려나.


“아무말 대잔치라고요? 아하하.”

내가 배를 잡고 웃자 은서가 내 등을 톡톡 두드렸다.


“아무래도···. 천사님을 불러야겠어요. 아, 그래요. 천사님께 연락해야지.”

은서는 휴대폰을 꺼내 틱틱틱 문자를 입력했다.


은서가 쓰는 휴대폰은 오래전 모델이었다. 문자와 통화만 할 수 있는.


“사빈님이 오셨다면 내일은 가게 문 닫고 오실걸요? 연주도 함께 듣고···.”

“삽살이와 참새도 오라고 해주세요. 바나 때문에 아주 귀찮아요.”

“바나가 왜요?”


“파라다이스에 가자고 졸라대는데, 난 장소를 정할 수 없잖아요? 잔뜩 토라져서는 어디로 사라졌어요. 뭘 조사하러 다닌다나.”


“호호. 그럴 만도 해요. 사실 여기가 재미는 없죠.”

은서가 병동을 빙 둘러보았다.


그래. 솔직히 병원은 재미없다.


“삽살이랑 참새는 지금이라도 부를 수 있어요.”

은서가 일어나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정원에서 가까운 아름드리나무가 가지를 출렁거렸다. 무언가 희끄무레한 것이 튀어 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데리러 갔으니 곧 올 거예요.”

은서는 이귀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삽살이는 이귀로 부르면서 가온에게는 문자를 보내요?”

“예. 시대에 맞게 살아야죠. 차원의 문지기라도 남들에게는 사람이니까.”


“시대요? 허···. 그러면 스마트폰을 써야죠.”

“에이, 거기까지는 필요 없어요. 이걸로도 충분해요.”

은서는 다시 벤치에 앉았다.


나는 가만히 은서를 바라보았다. 은서를 만나면 할 얘기가 있었는데···.


은서는 무대 위의 바우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애정과 동경이 가득 담겨있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의 눈빛이라니···. 보기만 해도 달콤하구나.


‘그래. 단가람.’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은서가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깐,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요. 소개해줄 사람이 있어요.”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심장전문센터로 뛰었다.


*


단가람을 이끌고 다시 나왔을 때는 무대 점검이 다 끝난 뒤였다.

다른 멤버들은 다 돌아갔고 바우가 은서 곁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어르신을 부축하는 도우미처럼 단가람을 이끌고 천천히 걸었다.

“아이고, 스승님. 어디 가시는데요?”


“가보면 알아. 단가람을, 아니 김치국을 몹시 궁금해 하는 사람이야.”

“괴기 소설 쓴다는 정령의 후예요?”


은서는 나와 내 뒤에 선 단가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서님, 이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내가 소개하려 하자 단가람이 에헴, 에헴 기침을 해댔다.


단가람이 먼저 은서에게 손을 내밀었다.

“김치국이라 하오.”


그의 목소리에 웃음을 뿜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나와 얘기할 때나 마음숲에서는 철부지 소년인데, 인간세의 사람을 대할 때는 전혀 달랐다.


은서는 엉겁결에 그의 손을 잡았지만, 눈만 깜빡였다.

내가 입을 벙긋거려 알려주자 소리 질렀다.


“아, 그 사기꾸··· 가 아니고 하이브리드 인간!”

“허허, 하이부릴이 아니라 반인반천이라오. 정령의 후예시라고?”


“예.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고님께 들었소이다. 내 이야기로 소설을 쓴다고요?”


은서가 나를 바라보았다가 다시 단가람을 보았다.

“가능···할까요?”


“되고 말고요. 내 기록 다 넘겨드리죠.”

“우와! 진짜요?”


은서는 폴짝폴짝 뛰다가 옆에 서 있는 바우를 힘껏 끌어안았다.

“와, 이런 행운이!”


단가람이 나를 돌아보며 늘어진 눈꺼풀로 찡긋거렸다. 위엄을 차리던 김치국이 아니라 장난꾸러기 소년의 눈빛이었다.


*


어두워진 동쪽 하늘에 샛별이 떠올랐다.

소나무와 향나무의 짙은 초록이 어두운 하늘빛과 불빛 속에서 오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나는 병원 정문 옆에 서서 중앙정원을 바라보았다.

‘꽤 운치 있네. 아날빛숨 뒤뜰도 이렇게 꾸며볼까?’


기둥에 기대어 하염없이 나무를 바라보는데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빈님, 부르셨어요?’

생각으로 공명하는 소리였다.


삽살이!


돌아서니 기둥 바깥쪽에 삽살이와 참새가 서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삽살이는 서 있고, 비둘기만 한 참새는 삽살이 등에 앉아있었다.


‘바나가 너희를 만나고 싶어해. 그믐마다 난리야.’

나는 정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삽살이가 내 곁에 바짝 다가와 섰다.

어차피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그렇게 조심하지 않아도 될 텐데.


‘사빈님, 여기 오래 있지 마세요. 뭔지 몰라도 이상한 기운이 있어요.’

‘뭐?’

나는 병원 뒤편 천수산을 돌아보았다.


영감도 같은 말을 했다. 천수산 서쪽 끝에 이상한 것이 있다고.


‘피천귀도, 수집가도 아니고, 이귀나 사념체도 아니에요. 기운이 너무 강해서 가까이 갈 수 없대요. 그 근처에는 지박령도 없고 바람잡이도 못 가요.’


삽살이가 크르릉 이빨을 드러냈다.

참새가 천수산을 올려다보더니 한쪽 날개를 펼쳤다.


‘조심하세요. 사빈님은 천력이 많이 줄었어요. 한순간에 쓰러질 수 있어요.’

‘알았어. 조심할게. 수명환만 건네주면 돼.’


이번에는 두 개나 성공할 수 있어.

오랜만에 수명환을 건넨다는 생각에 들떠 그들의 경고가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왕왕, 삽살이! 참새!”

담장 모퉁이에서 바나가 튀어나왔다. 흰 털 뭉치가 데구르르 구르듯 달려왔다.


‘사빈님. 조심하세요.’

삽살이는 고개를 끄덕하더니 바로 뒤돌아섰다.


‘가자! 인간세의 색다른 맛을 보여주지.’

‘왕왕, 좋아라!’


바나는 내게는 인사도 하지 않고 삽살이와 참새를 따라가 버렸다.

‘나 주인 맞아?’


*


아침 산책길은 조용하고 한적해서 걸을 만했다. 바나가 없으니 호젓하고 좋았다.

바나는 아무래도 닷새째 새벽에나 어슬렁거리며 나타날 것 같다.


이른 아침이라 환자들은 일어나지 않을 시각이다. 어린 환자들은 늦잠을 자겠지. 예를 들어 이로운 같은.


그런데 웬걸, 모퉁이를 돌자 잠에 빠져 있어야 할 로운이 벤치에 앉아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 똑같이 과자를 뿌려놓고 스케치북을 들었다. 참새가 네 마리 찾아와 과자를 쪼아 먹었다.


나는 살금살금 걸어가 벤치 뒤에 섰다.

로운은 그림에 열중하여 누가 오는지 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림을 보니 참새라고 알아볼 수는 있었다. 세밀하지 않아도 구별할 수 있으면 되지.


스케치북을 넘기느라 부스럭 소리가 나자 참새들이 파르르 날아올랐다.


“에이, 날아가 버렸네.”

이로운은 아쉬워하며 혀를 찼다.


“어떤 새를 보고 싶어? 내가 불러줄게.”

“누나! 누나도 일찍 일어나요? 어떻게 찾아왔어요?”


나는 아이 옆에 앉아 바닥에 떨어진 과자 가루를 가리켰다.

“지나가는 길이야. 누가 쓰레기를 버렸다고 신고가 들어와서.”


“아, 저거요. 제가 치울게요.”

이로운은 작은 빗자루를 꺼냈다.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는 빗자루였다.


“좋아. 깨끗하게 치운다면. 말해 봐. 어떤 새를 보고 싶어?”

“까마귀?”


“까마귀라. 그리고?”

“딱새, 직박구리···. 또 무슨 새가 있죠?”


“정말 보고 싶어?”

이로운이 눈을 반짝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까마귀, 딱새, 곤줄박이, 직박구리, 박새, 비둘기, 다 오너라.”

나는 손을 높이 들어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딱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이로운의 소망이 담겼으니 마고의 술법도 가벼웠다.


잠시 후, 뒤쪽 산에 살던 작은 새들이 모두 날아들었다.

산책길 가운데, 근처 나뭇가지에 내려앉아 한꺼번에 지저귀니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우와! 우와!”

이로운은 손을 바들바들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많은 새는 처음 봐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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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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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5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4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4 3 10쪽
»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7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3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6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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