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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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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17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2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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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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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1쪽

예사달_불천수 전투

DUMMY

빛글 하나가 남쪽에서부터 빠르게 날아왔다.

희미한 빛은 현원을 찾아가지 못하고 다움성 하늘 위에서 활짝 펼쳐졌다.


- 해날품곡 남동 경계, 피천귀 습격 -


빛나는 글자는 한동안 다움성 위에 떠 있다가 서서히 대기 속으로 녹아들었다.


현원과 다움성의 천인들, 가림산 꼭대기에 앉아있던 예사달도 빛글을 보았다.


예사달은 누구보다 먼저 해날품곡으로 날아갔다.


중앙황천을 벗어나자 그는 모습을 버리고 쿨렁이는 운기 덩어리로 돌아왔다.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으나,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었다.


해날품곡을 기준으로 동쪽은 불천수가 흘렀고, 서쪽은 삼도천이 휘돌아갔다.

계곡의 남동쪽에 천인들이 사는 첫끝마을이 있었다. 천계의 끝자락이어서 붙은 이름이었다.


숲센장벽의 풍경이며, 연곡호수도 맑고 아름다워 천인들이 좋아하는 휴양지였다.


예사달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아름다웠던 첫끝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애끓는 신음과 날카로운 비명, 칼과 창이 부딪치는 소리가 그 자리를 채웠다. 기운이 폭발하며 공기를 뒤집었고 흙먼지가 안개처럼 들판에 가득했다.


황천의 차사들과 청천의 능사들이 결계를 쳤지만, 피천귀들이 내뿜는 독기와 냄새가 결계에 구멍을 냈다.

그 사이로 무겁고 탁한 공기를 밀어 넣었다.


결계 바깥에서는 해태와 청룡이 능사와 차사들과 함께 무기를 휘둘렀다.


화살은 몰려오는 피천귀들을 쪼개어 가루로 만들었고. 불의 검은 불꽃을 휘날리며 모여든 피천귀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끊임없이 밀려드는 피천귀를 상대하기에 차사와 능사는 너무 적었다. 허공의 섬에서 밀려오는 귀의 반도 되지 않았다.


예사달은 아지랑이처럼 떠서 내려다보았다.

피천귀들이 결계에 매달려 구멍을 내고 있었다.


“마눙과 이루가 왜 이런 짓을? 정귀를 없앤 건 이 세계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청록빛 덩어리는 웅웅 소리를 굴리며 쿨렁거렸다.


예사달은 마눙과 이루가 어떻게 반계를 세웠는지 알고 있었다.


허공의 섬에 반계를 세울 때 그들은 세 마리의 정귀를 소멸시켰다.

비록 그 조각 몇 개가 인간세로 흘러갔어도, 그들이 반계의 양존이 된 이후 정귀는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거였나.”

운기 덩어리 예사달은 쿨렁거리며 남쪽 끝자락 허공의 섬을 바라보았다.


천계에서는 보이지도 않던 허공의 섬이 어느새 주먹만 한 크기로 다가왔다. 점점 더 가까이 흘러오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가!”

다훤이 다급하게 외쳤다.


“왜 보고만 있어!”

다훤이 무너져가는 결계를 바라보며 예사달을 움켜잡았다. 운기 덩어리는 잡힐 듯 흩어졌다.


그는 결계를 치기 위해 두 손을 펼쳤다. 하늘의 기운을 자신의 기와 맞추며 결계를 만들기 위해 숨을 가다듬었다.


청록빛 덩어리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바꿀 수 없어. 나와 자네가 보았다면 이미 일어난 일이야.”


“무슨 소리야? 우리가 할 수 있다고! 자네와 난 그만한 힘이 있어.”

“자네가 나선다면, 그것으로 예언이 실현될 거네.”


“저들이 죽어가는 게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다훤은 거칠게 팔을 빼냈다.


그는 기합을 넣으며 빠르게 하늘의 기운을 빨아들였다.

손끝에서 빛이 나오며 거대한 장막이 펼쳐졌다.


결계는 능사와 차사들, 성천의 신물들을 보호할 것이다. 그들의 결계보다 몇 배나 강하니 피천귀는 절대 못 들어올 것이다.


다훤의 손에서 뻗어나간 빛의 결계가 땅에 닿는 순간, 수천 마리의 피천귀들이 빛 자락 끝으로 달려들었다.

불나방이 불을 향해 달려들 듯 순식간에 뛰어든 피천귀들에 부딪쳐 뻗어가던 결계가 갈라졌다.


다훤의 힘이 강한 만큼 결계가 깨지는 힘도 강력했다.

균열은 그의 결계만이 아니라 능사와 차사들이 쳐놓은 결계까지 이어졌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엷은 결계마저 흩어지자 피천귀들이 달려들었다. 미친 듯 천인과 신물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때 다움성의 차사들이 도착했다. 동방청천의 버금성에서도 능사들이 날아왔다.


그들은 새로운 결계를 만들며 피천귀들을 남쪽으로 몰아갔다.


다훤은 자신이 만든 결계가 깨지자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힘이 오히려 피천귀를 돕다니.


“이, 이게 무슨···.”

“자네 탓이 아니네.”

운기 덩어리 예사달은 안개처럼 엷어지며 다훤의 주위를 감쌌다.


허공의 섬은 이제 어엿한 섬처럼 보였다. 곧 천계의 끝자락과 맞닿을 것이다.


“허공의 섬이 천계와 이어질 걸세. 동방청천과는 연곡호수와 황금들을 사이에 두고 검은 장막을 칠거야. 중앙황천과는 불천수를 사이에 두고 더 가까워지겠지.”


“그···, 그런 말을 태연하게 하는군. 저 모습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자네가 본 모습이네.”

운기 덩어리는 감정이라고는 없는 듯 냉정하게 말했다.


다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환시를 보여줬으면 막을 방도도 알려줘야지! 왜 알면서 막지 못하냐고!”


그는 허공에 뜬 채로 온몸을 비틀었다.

“이런 싸움은 천계의 방식이 아니라고! 인간세에나 있는 거야! 사람의 방식이라고!”


“피천귀가 사람에게서 나왔으니까. 당연히 인간세의 방식으로 싸우겠지.”

“저들을 조종한 건 마눙과 이루가 아닌가?”


다훤과 예사달은 황금들을 내려다보았다.

천계의 신장과 신물이 피천귀를 몰아내고 있었다. 황금들로 나온 피천귀들은 거의 소멸했다.


예사달은 여전히 모습이 없는 운기 덩어리로 떠 있었다.

“귀의 힘은 인간세에서 온 거야. 마눙과 이루는 힘을 쓰지 않아. 그들도 알고 있어. 신제가 나서면 우리 차원이 어떻게 되는지. 그들은 지키는 자이지 싸워서 빼앗는 자들이 아니거든.”


예사달은 황금들판이 끝나는 거친 땅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름이 바닥에서 서서히 올라왔다. 그가 환시로 보았던 검은 장벽이었다.


“보게. 반계가 장벽을 세우는군.”

“빌어먹을!”

다훤이 거세게 발길질을 해댔다.


예사달은 청록빛 덩어리를 펼쳤다 오므리며 생각에 잠겼다.

“반계가 왜 북쪽으로 올라왔을까? 허공의 섬은 사방이 뚫려있는데. 왜 꼭 저기여야 할까?”


“그게 중요한가? 나도 모르고, 자네도 모르잖나? 저들을 몰아내고, 다시는 못 오게 해야 해.”

다훤은 검은 장벽 앞에 멈춰 선 장수들에게로 내려갔다.


예사달은 하늘에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구름인 듯 아지랑이인 듯 황금들을 지켜보았다.


‘피천귀는 얼마 안 가 회복하겠지. 끝없는 힘의 원천, 인간세가 있으니. 천인은 여간해서 태어나지 않으니 애석하군.’


*


검은 장벽 앞에서 대차사 해담이 대능사 마갈에게 다가갔다.


“대형을 나누어 일부는 장벽 안으로 들어갑시다. 피천귀가 거의 소멸한 지금이 반계를 물리칠 기회입니다.”


“황금들은 지키지 않았습니까? 이미 피천귀도 사라졌습니다.”

“반계가 있는 이상, 피천귀는 끊임없이 늘어날 겁니다. 반계를 응징하고, 천계의 평화를 되찾아야지요.”


마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비록 반계라 부르나 그분은 돌아오실 겁니다. 우리의 동방청천을 버릴 분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분을 공격하겠소?”


능사들은 모두 같은 생각인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청제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뜻이 있어 잠시 반계에 계시는 것이니 함부로 공격하면 안 됩니다.”


해담은 화가 치밀어 수염조차 떨렸다.


“죽은 천인들이 안 보입니까? 당신 동료인 능사들도 무결의 고리에 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한때 청제였다 해도 이렇게 잔인하다면 제거해야 합니다.”


다훤이 대차사 해담의 옆으로 내려섰다.

“반계를 놔두자고요? 이유도 모르고 죽어간 저 천인들은 어떻게 하고요?”


반계를 둘러싼 검은 구름 장벽이 하늘 위로 치솟았다.


검은 구름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며 스멀스멀 움직였다. 검은 구름 끝이 죽은 천인의 몸에 닿자 그의 몸이 종잇장처럼 갈기갈기 찢어졌다.


지켜보던 모든 장수가 뒤로 물러났다. 신물들도 자신이 모시는 장수들 뒤로 물러섰다.


“저걸 보고도 반계를 내버려 둔다는 겁니까?”

다훤이 소리쳤다.


“그만 하거라. 다훤아, 반계 때문에 우리끼리 싸운다면 그건 누구의 이득이 되겠느냐?”

현원이 검은 구름장벽을 바라보며 섰다.


그녀의 눈에 슬픔이 가득 스며들었다.

오랜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 천인을 잃은 상실감이 뒤섞여 서글픈 눈빛이 되었다.


“현원님!”

“다훤아, 나를 도와다오. 저들을 무결의 고리에 들게 해야지. 하나도 빠짐없이.”


그녀는 좌우로 나누어 서 있는 차사들과 능사들을 바라보았다.

“고맙고 감사하오. 황금들을 지키느라 수고 많았소.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니 그대들은 돌아가 기력을 회복하시오.”


현원은 다훤을 데리고 장수들 사이를 유유히 걸어 나갔다.


죽은 천인을 무결의 고리로 올리는 신력은 세 신제만 갖고 있었다. 이쪽 차원이 생길 때 생명의 알에서 나온 이들이어야 했다.


현원은 죽은 천인의 이마에 손을 올리고 주문을 외웠다.


그녀의 손이 지나갈 때마다 천인의 몸과 혼은 빛에 감싸여 밝게 빛났다. 그들은 빛 속으로 녹아 들어갔다.


차사와 능사들도 묵묵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말없이 서 있는 다훤을 올려다보았다.

“다훤아, 예언자의 아픔을 알겠느냐?”


다훤은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예사달은 여전히 운기 덩어리인 채로 그들 위에 가만히 떠 있었다.

무결의 고리로 들어가는 천인들을 보고 있다가 바람을 타고 첫끝마을로 돌아섰다.


*


무너진 첫끝마을에 내려섰을 때 예사달은 젊은 여인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작고 여린 여인은 오래 길을 헤맨 듯 지친 모습이었다. 여기 어디, 누군가가 그 모습을 기다리는 것이다.


‘살아남은 천인이 있을 거야. 더 늦기 전에 찾아내야지.’

예사달은 쓰러진 천인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천계에 태어났기에 천인이지만, 모두가 천력을 갖지는 못했다. 천인 중에서도 천력이 강한 자들을 차사나 능사, 위사라 불렀다.


첫끝마을에 사는 평범한 천인들은 싸우지도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예사달은 쓰러진 천인 부부를 살펴보다가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다. 예사달이 여인의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기둥과 벽 사이, 겁에 질린 소년이 웅크리고 있었다.


울음을 참는 소년은 하얗다 못해 파리한 낯빛이었다. 하얀 머리카락이 심하게 헝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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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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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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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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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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