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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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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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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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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0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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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3쪽

천계_돌아온 온사랑

DUMMY

위즐증가의 옥상정원에서도 혼알방 거리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다훤은 난간에 기대어 이즈막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좋구만. 기운이 넘치네.”

“확실히 다른 곳과는 달라. 시간이 짧다고 이리 큰 힘을 내다니.”


예사달은 할머니의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곧 사빈이 올라올 것이다.


가장자리의 넝쿨이 뒤엉켜 나뭇등걸 모양이 되었다. 예사달은 거기 앉아 광장을 내다보았다.


다훤이 휘나래에 타고 있는 혼들을 가리켰다.

“저기 보게! 서로 가면을 맞췄구만. 하하. 다섯 성천을 흉내냈구만.”


예사달이 다훤이 가리키는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휘나래의 다섯 혼은 각기 흰색, 검은색, 황토색, 붉은색, 푸른색의 옷과 가면을 둘렀다.


“그렇군. 신제를 보지도 못했을 텐데, 소문이 무서운 게야.”

“허, 소명원보다 훨씬 낫군. 북방흑천은 정말 재미없네.”


다훤이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래도 대명천 붉은바다는 꽤 좋았네. 왜 그 사막을 바다라 부르는지 모르겠지만.”


“이름이야 편한 대로 부르는 거지. 자네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예사달이라 정한 것처럼.”

“왜 이러나. 고심 끝에 정한 이름일세.”

“고심할 시간이나 있었나?”


예사달이 묻자 다훤은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나저나···, 사빈이 꽤 오래 못 깨어났다던데. 아직도 못 찾았나···.”


예사달이 지팡이에 두 손을 얹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내밀었다.

“일부러 숨겨놓은 것 같지 않나? 인연이 무르익을 때까지. 가만 보면 수리마루님도 장난이 지나쳐. 그냥 내주지 않거든.”


“맞네. 뭐든 주기 전에 시련부터 겪게 만들지. 중요할수록 더욱 교묘하게 시험한단 말이야.”

다훤은 손가락 끝으로 난간을 두드리며 크큭 웃었다.


“할머니!”

사빈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가볍게 날아올라 예사달 앞에 내려섰다.


“아이, 할머니이.”

사빈은 콧소리로 부르며 예사달의 팔을 잡고 딱 붙어 섰다.

“어디 갔다 오셨어요?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그러냐? 보고 싶어 할 시간은 있드냐?”

“그럼요. 매일매일 보고 싶죠.”


사빈이 예사달과 인사하는 동안 다훤은 사빈이 자신을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도무지 돌아볼 기미가 보이지 않자 난간을 두드렸다.


“사빈아, 나도 있다.”

“어! 다훤 아저씨! 언제 오셨어요?”

“이 녀석아. 아까부터 여기 있었다.”


“같이 오셨어요? 응? 가시버시 때문은 아닐 거고···.”

사빈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훤은 손가락 끝으로 공기를 날려 그녀의 이마를 콩 두드렸다.


“왜 아니냐. 난 네 할머니와 친구니까 당연히 가시버시날을 축하해야지. 허허허.”

다훤은 사빈을 놀리고 싶었지만, 예사달이 심각한 얼굴로 눈짓하자 곧 입을 다물었다.


“발이 왜 이리 부르텄누.”

“이거요? 어젯밤 밤새 춤을 추었더니 이렇게 되었어요. 아프지는 않아요.”


“쯧쯧. 네 몸은 네가 아껴야지. 천력은 왜 이리 약해졌어? 다 빠져나간 것 같구나.”

예사달은 가만히 사빈의 오른손을 잡았다.

어리화가 검붉은 꽃에서 검은 꽃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참, 할머니, 아저씨, 저 환시를 보았어요.”

“네가? 어디서?”

다훤도 넝쿨이 만든 나뭇등걸에 걸터앉았다.


“이번 그믐에요. 다른 차원에서 온 문지기가 연주했거든요. 해밀의 차원에서 온 음악은 근원을 건드린대요.”


“호오, 다른 차원? 차원의 문이 인간세에 있는 건 알았지만, 차원의 문지기도 넘어오는 줄은 몰랐구나.”

예사달이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야 인간세에 들어있으니까.”

다훤이 입술을 부르르 털었다.

“이래서 천계는 재미없다니까. 너무나 평화로워! 지나치게 지루해!”


예사달은 다훤에게 찌릿 눈을 흘기고는 사빈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래 무엇을 보았느냐?”


“어둠 속에 하얀 나무와 붉은 구슬이 떠 있었어요. 구름이 뭉친 것 같은 구슬이요. 천계에서도 멀리 떨어진 우주였어요. 그리고 또···.”


사빈은 자신이 본 환영을 하나씩 떠올렸다.

“마눙님이 잠들어있었어요. 몹시 괴로워하면서요.”


“그래? 마백북존이 잠들어있다···. 설마 천력도 잠든 건 아니겠지···?”

예사달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사빈은 환영을 기억해내느라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중천도 보였고, 신령수 동명님의 결계도 본 것 같아요. 정말 동명님인지는 모르지만, 느낌이 그랬어요. 그리고 또···.”

사빈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상산대감 백하가 어둠 속으로 묻혀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병원 복도에서 발부터 굳어가던 순간이 떠올라 잠시 진저리쳤다.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이 아니었다.

마고의 천력을 빨아들이던 것도, 머릿속에서 웅웅거리던 기분 나쁜 웃음소리도 진짜였다.


‘너는···, 나를 지울 존재구나. 네가 깨닫기 전에 없애주마.’

‘약하긴 해도, 나를 되찾을 수 있겠군.’


사빈이 넋 놓고 있자 예사달이 그녀의 손등을 두드렸다.

“사빈아,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야?”


“아, 할머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구슬. 그것이 저한테 날아왔어요.”

사빈은 하늘에서 내려온 구슬을 똑똑히 보았다.


‘날 보러 온 거야. 설마 불천수 강가에서 만나자고 했던··· 그 부름과 이어진 걸까?’

그래도 사빈은 할머니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생각은 생각에서 끝났다.


“할머니. 그거 진짜 있어요. 어딘가에···. 하얀 나무와 붉은 구슬이 진짜 있을 거예요.”

사빈이 예사달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예사달은 가만히 사빈을 바라보았다.

‘뭘 봤기에 말을 못 하지?’


그러나 캐묻지 않았다. 기다리면 알게 될 것이다. 그에게 보이는 환시처럼.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어디가 아닌지는 알아냈단다. 동남북은 아니야. 서쪽 가장자리 어디쯤일 게다.”


“서방백천을 지난 우주의 가장자리요? 선사들이 파견된 근처겠네요?”

“빛나는 알도 거기쯤일 거야. 천인들이 이계의 요물이라 떠드는 것이지.”


다훤은 비스듬히 앉아 목덜미를 주물렀다.

“아무래도 네가 찾아야 할 것 같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예사달이 지팡이를 고쳐잡았다.

“사빈을 그곳까지 보내는 건 위험해. 내가 같이 가겠네.”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그 넓은 우주에서? 사빈을 데리고 헤매는 건 옳지 않아, 요. 마고는 그믐에만 잠깐 나갈 수 있다고···요.”

다훤은 반말과 존댓말을 섞느라 말을 더듬었다.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면 대체 되는 일은 무언가?”

예사달이 소리치자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는 서둘러 목을 가다듬었다.


다훤은 소맷부리에서 팔찌를 하나 꺼냈다.

그가 팔찌를 내밀기도 전에 사빈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자신이 만든 팔찌였다. 이름도 자신이 직접 지어주었다. 온사랑.


“그건···, 어머니의···. 온사랑.”

사빈이 말을 더듬자 다훤이 싱글거리며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알아보는구나. 네 어머니가 남긴 것이다. 네게 꼭 필요할 때 전해달라고 하셨거든. 지금이 그때로구나.”


“그런데 이건 아닌데요?”

사빈이 검은 구슬과 흰 구슬을 가리켰다.


“하하, 그거 말이냐? 나랑 네 할머니가 천력을 담았단다. 널 지켜줄 거야.”

다훤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넌 우리가 못 보는 것을 볼 수 있어. 네가 답을 찾을 때 이것이 널 도와줄 거다.”


사빈은 다훤의 말을 들으며 팔찌를 왼쪽 손목에 끼웠다. 팔찌의 기운이 스르르 몸속으로 들어왔다.


온사랑에 담겼던 대천사 반열의 기운과 다훤, 예사달의 천력이 한데 어울려 몸 구석구석으로 찾아 들어갔다.


현원이 남긴 보호의 인이 그 힘과 만나 더욱 견고해졌다.


보호의 인은 중간자의 몸을 지탱할 만큼의 힘만 갖고 있었다. 허약한 몸에서 신력이 폭발하면 안 되니까.


그러나 보호의 인이 다른 힘과 만나니 사빈은 완전히 새로운 몸이 된 것 같았다.


정수리에서 발가락 끝까지 신선하고 힘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몸이 가볍고 정신이 맑았다. 이대로 천계의 끝에서 끝까지 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빈은 들떠서 예사달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할머니, 저 새로 태어난 것 같아요.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

“그래, 너라면 뭐든 해낼 거야. 내 제자잖니?”


그들을 바라보던 다훤이 어험 큰 소리로 기침했다.

“눈이 시려서 더는 못 보겠네. 나도 제자 있다고. 아주 능력 있는 제자가. 흥!”


그는 소맷자락을 흔들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예사달이 그를 불렀다.

“자네 어딜 가는가?”

“비밀입니다요. 어르신!”


*


한요재 맞이방은 텅 비어있었다.

상산대원들은 혼알방과 혼들을 살펴야 하므로 남아있는 대원은 하나도 없었다.


다훤은 맞이방에 앉아 주인을 기다렸다.

위즐증가에서 나오면서 전언을 보냈으니 곧 상산대감 백하가 들어설 것이다.


밝고 화사한 빛깔의 가리개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하얗고 서늘한 벽과 천장에는 어울리지 않지만, 계속 보다 보니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문이 열리고 백하가 성큼성큼 들어왔다.

“다훤님께서 오시다니 영광입니다.”


백하는 정중하게 인사하고 다훤의 맞은편에 앉았다.

“자네에게 알려줄 고급 정보가 있어서 말일세.”

“어떤···?”


“사빈에 대해서 말인데···.”

“사빈님이요?”

백하가 상기된 얼굴로 다훤을 바라보았다. 하얀 낯빛이 더욱 하얗게 바뀌었다.


긴장하는 그를 보자 다훤의 표정도 바뀌었다. 미소 짓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왔다.

‘경고하려고 왔는데, 이거··· 충고가 될 것 같군.’


다훤은 긴 이야기를 하기 위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중간자가 되려면 무언가가 빠져나간다는 얘기, 들어보았나?”


“예. 들었습니다. 사빈님에게 무슨 문제라도?”

“겉으로는 보이지 않아. 마음의 문제지. 사랑을 못 느끼거든.”


심각하게 앉아있던 백하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럴 리가요. 누구보다 다정하고, 누구든 잘 보살피는데요?”


“그렇지. 예사달님을 얼마나 살뜰히 챙기는가. 그런 거 말고 ‘연모의 정’ 말일세. 애틋한 사랑, 그걸 모른다고.”

다훤은 백하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백하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동안···.’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뒤로 물러나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사빈이 외면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정말 모른다고요?”

“누군가의 노력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도 같네. 가령 한얼처럼···.”

“인도자 한얼 말씀이십니까?”


“한얼이야 사빈을 좋아할 수밖에 없지. 사빈이 중간자가 될 때 그 아이가 혼 조각을 나눠줬거든. 둘은 이미 이어져 있는 게지.”


다훤은 그다음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가족이랄까.’


그는 백하를 시험하고 싶었다. 소문만큼이나 마음도 깊은지. 그 마음으로 얼마나 버텨낼지.


다훤에게는 단순히 시험이지만, 백하에게는 다른 의미였다.

천계에서 다훤의 말은 힘이 있었다. 천사장도 인정하는 예언가이니, 틀림없는 예언이었다.


‘결정은 사빈이 하겠지만···. 결론을 안 내리면 또 어떤가? 여기가 인간세도 아니고.’

백하의 진지한 눈을 보니 다훤은 그를 믿고 싶어졌다.


예사달은 사빈과 동녘뜰로 가고 싶어 하지만.

‘미안하네, 예사달. 난 이 친구가 마음에 드네.’


“사빈에게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자네를 위한 충고이네.”

다훤은 매몰차게 끝을 맺었다. 자신의 시험에 그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모르는 감정을 강요당하면 얼마나 난처하겠나. 마고로 할 일도 많은데, 지금은 다른 일까지 감당해야 하니.”

다훤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도 백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잘 생각해 보게.”

다훤은 얼음기둥 같은 백하를 뒤로 하고 맞이방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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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5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1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4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4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3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2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3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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