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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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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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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27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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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DUMMY

가림산 꼭대기에서 보는 중앙황천은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였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울창한 숲이 신비롭고 웅장했다.


동녘뜰보다 훨씬 넓고 아름답지만, 예사달은 성천에 머무는 것이 답답했다.

‘다시 떠돌아 볼까? 그 사이 무엇이 바뀌었는지···.’


예사달은 별채의 대청마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운기덩어리로 돌아가며 점점 희미해지는데, 다훤이 마당에 나타났다.


그는 좁은 마당에 내려서자마자 소리부터 질렀다.

“여어, 그새를 못 참고 어디 가려고?”


흐려지던 예사달의 몸이 소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눈을 떴다.


다훤은 한 소녀를 안고 있었다. 그의 품에서 소녀는 죽은 듯 잠들었다.

그는 소녀를 예사달 곁으로 옮겨놓았다.


소녀는 예사달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이게 뭔가?”

“이거라니? 사람이라네.”

“산 사람은 여기 못 들어오는데? 죽은 혼도 아니고.”


예사달은 소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중간자?”

“빨리도 알아보는군. 어쩌다 보니 중간자로 만들었다네.”


“다른 아이는? 혼 조각을 나눠준 아이가 있을 텐데?”

“인간세에. 그 아이야 문제없이 생을 마치겠지.”


예사달이 코웃음을 쳤다.

‘저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그 아이도 중간자가 되었을 텐데.’


중간자가 인간세에서 살면 다른 사람보다 비범한 능력을 갖게 된다. 학문이며 무예, 생각의 깊이까지 남과 다르니 송곳처럼 튈 수밖에.


그런데 문제없이 생을 마칠 거라니.


“이 아이는 왜 데려왔나?”

“자네 제자일세.”


“뭐?”

예사달은 소녀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받쳐 마루에 똑바로 눕혔다. 무릎을 빼고 고쳐 앉았다.


“그런 건 키우지 않아. 자네도 알지 않나?”

“저런! 어쩌나···. 이미 들였는걸.”


“귀찮고 번거롭다고. 신경 쓰고 싶지 않네.”

“그러지 말고. 내가 환시를 봤다니까.”

다훤이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예사달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네가 거짓말 못 하는 건 천선계가 다 알아. 진짜 예언을 봤다면 그때 바로 달려왔겠지.”


“하하, 그렇다는 얘기지. 예언이나 마찬가지일세.”

“됐네. 나는 떠돌이야. 한곳에 머물지 않아.”


“그럼 데리고 다니면 되지!”

“자네가 데리고 다니게. 여기보다 북방흑천의 천사국이 어울리겠군.”


예사달의 말에 다훤이 탄성을 질렀다.

“벌써 알아봤나? 이 아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아나?”

“보자마자 천사국을 들먹이다니 자네 능력은 역시 알아줘야 해. 하하하.”


다훤은 예사달의 거절에도 여유롭게 웃었다.

“어쨌든 이 아이를 맡게 될 거야. 거부해도 소용없어. 사양은, 사양하겠네.”


싱글벙글 웃으며 누워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이 아이가 누구냐면···.”


누워있던 소녀가 웅웅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소녀가 눈을 뜨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녀와 눈이 마주치기 전, 예사달은 야위고 주름이 많은 키 작은 할머니가 되었다.

그는 자기 모습을 내려다보며 헉 숨을 삼켰다.


다훤은 처음 보는 예사달의 모습에 실실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될지 궁금해 눈을 떼지 못했다.


“할머니?”

소녀가 소리치며 환하게 웃었다.


“할머니! 여기 계셨어요?”

소녀는 허리를 세우고 무릎으로 걸어 예사달에게 다가왔다. 그의 허리를 감싸 안고 얼굴을 그의 가슴에 파묻었다.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요. 단아루에 있을 때 할머니가 잘해주셔서···.”

소녀는 눈물을 훌쩍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함께 살자고 했잖아요? 정말···, 정말로 할머니가 기다리고 계셨어요.”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예사달의 옷자락이 서서히 젖어 들었다.


눈물이 마르자 소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훤을 발견하고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다훤 아저씨도 계셨네요?”


소녀는 마루와 마당을 둘러보았다.

“엄마는요? 엄마는···.”


소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엄마는 못 왔어요?”


다훤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는 천사들이 데려가셨다. 중천으로 가셨으니 제대로 가신 거란다. 넌 네가 한 약속 때문에 여기로 왔단다.”


“이제 엄마를 못 보는 거예요?”

소녀가 또다시 울상을 짓자 예사달이 일어섰다. 눈물바다는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마음은 벌떡 일어서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구부정하고 가냘픈 다리라 끄응 신음이 저절로 나왔다.


“배고플 텐데, 뭐라도···.”

예사달은 말하다 말고 혀를 찼다.

목소리도 가늘고 힘이 없었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다훤을 노려보았다.


다훤은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너무, 너어무 귀여우세요. 할머니.”


“이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예사달은 마루 옆에 놓인 지팡이를 잡아 휘둘렀다.


구부정한 어깨로 지팡이를 내려치다가 그는 문득 지팡이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또 언제 생겼어? 아우!’


“할머니. 옛날하고 똑같아요. 하나도 안 변했어요.”

소녀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무 울어서 벌겋게 물든 눈으로 배시시 웃으니 오히려 가련해 보였다.


예사달은 지팡이에 기대어 몸을 돌렸다. 마당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 이것도 인연이겠지.”


*


예사달은 마루 끝에 앉아 방문을 돌아보았다. 잠든 사빈의 숨소리가 새근새근 새어 나왔다.

그는 여전히 할머니 모습이었고, 지팡이에 두 손을 얹고 턱을 그 위에 올렸다.


“과거도, 미래도 보이지 않더군. 기이하네. 무언가 이 아이를 지키고 있어.”

“그게 바로 나 아니겠나?”


다훤이 껄껄 웃었지만, 예사달은 대꾸하지 않았다.

‘다른 힘인데···. 뭔지 모르겠군.’


“그래서 단아루의 춤 선생을 연결해줬지. 집도 얻어줬다네. 하하. 그 정도야 어려운 것도 아니지.”

다훤은 사빈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했다.


“아, 그런데 다음에 갔더니 그 선생이 감옥에 있지 않겠나. 누명을 쓰고 말이야. 그 짧은 시간에 어찌 그리 많은 일이 일어나는지.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다니, 말이 되나?”

다훤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욕망은 잔인하기 그지없네.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꾸미고. 사람끼리 그리 모진 짓을 하다니!”

“그러니 피천귀들이 득실대는 게지.”


“여하튼, 그때도 내가 사빈에게 선생을 돌려주었네. 다른 마을에다 집도 구해주고. 그렇게 잘 살 줄 알았건만···.

다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쟁도 뭔가 이상했네. 사람이 시작한 건 맞는데···. 피천귀 말고 다른 힘이 끼어든 것 같고.“

”다른 힘이라니?“


”그게 안 보이더라고. 천사와 선사도 모르더군.“

다훤은 심각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그래서 세 번이나 도와준 거지. 죽음에서 건져주고, 스승도 만들어주고.“

”허! 그것이 자네 공로인가?“


예사달이 허리를 쭉 폈다.

”그런데 사빈한테 왜 이리 신경 쓰나?“


”내가 말하지 않았나? 사빈은 대천사 반열의 딸이라고!“

”반열님의···!“

예사달은 가슴이 먹먹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알리지 말게. 아버지가 천사인 줄 모르니까. 전쟁에서 죽었다고 알고 있어.“

”그런가···.“

예사달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기둥에 머리를 기댔다.


”언제까지 중간자로 있게 할 텐가?“

”때가 되면 풀리겠지. 언젠가는 몸을 버려야 하지 않겠나?“

”왜 하필 중간자야? 중간자는 한계가 많은데···.“


다훤이 정좌하고 앉아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뜰안샘의 샘물 소리가 또롱또롱 크게 울렸다.


”그게··· 나도 애매하네. 내가 왜 그랬는지.“

”자네가? 천하의 예언자 다훤이?“


”허! 이제야 나를 인정하는가. 흠흠, 농담은 그만두고. 어쨌든 이제부턴 사빈이 감당할 몫이야.“


예사달이 마당으로 내려섰다. 지금은 지팡이가 없어도 똑바로 설 수 있었다.

”덕분에 다움성을 떠날 구실이 생겼어. 동녘뜰로 가겠네.“


”오! 동녘뜰! 집 지을 재료도 충분하지. 고즈넉하니 둘이 지내기도 좋고. 그럼 나도 가겠네.“

”차라리 자네가 데리고 가게. 난 안 가겠네.“

예사달이 날카롭게 노려보자 다훤은 어어 목을 가다듬었다.


”뭘 그렇게까지. 아무튼, 자주 놀러감세.“

”안 반갑네.“


예사달은 휙 몸을 돌렸다. 다음 순간, 예사달도 사빈도 보이지 않았다.


”쳇, 까칠하기는.“

다훤도 뒷짐을 지고 예사당을 둘러보았다. 곧이어 그도 연기처럼 사라졌다.


*


동녘뜰 숲에는 오두막을 지을 나무가 넉넉했다.


처음에는 예사달의 천력으로 방 한 칸짜리 작은 움막을 지었다. 그곳에서 사빈을 가르쳤다.


”할머니, 정말 잘 아시네요. 여기 오신 다음부터 공부만 하셨나 봐요.“

”오래 살다 보면 자연히 알게 돼.“


”에이, 다른 할머니들은 안 그래요.“

사빈은 예사달을 부축하고 발을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예사달은 사빈과의 산책도 즐거웠다.

인간세를 지나친 적은 많아도 그 안에서 살아보지 못했다. 사람의 삶도 재미있었다.


사빈은 손짓 몸짓을 섞어가며 단아루의 이야기꾼을 흉내 냈다.

눈코입을 교묘하게 비틀며 이야기할 때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사달은 동녘뜰에만 머물 수 없었다.


할 일이 있었고, 여전히 배울 것이 많았다. 올바른 예언을 하려면 다른 천선인보다 더 많이 보고 들어야 했다.


그럴 때면 오두막에 사빈 혼자 남겨졌다. 자주 빛글을 보내지만, 떠날 때마다 사빈은 몹시 서운해했다.


”할머니, 이번에 가면 언제 오세요?“

”글쎄다. 나도 모르겠구나.“

”저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넌 천력이 부족해서 빨려 들어갈 거다.“


”히잉, 할머니. 그럼 빨리 오셔야 해요.“

”알았다, 알았어.“

사빈은 오랫동안 할머니를 끌어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천력을 조금씩 알아가자 사빈은 혼자 힘으로 움막 대신 오두막을 지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두막이 있던 자리에 번듯한 별채가 세워졌다. 가림산 꼭대기의 예사당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이 집은 네 집이니 사빈재라 부르자꾸나.“

”할머니, 우리 여기서 오래오래 같이 살아요. 네?“


”그럼. 아주아주 오래.“

예사달은 주름진 손으로 사빈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다시 오지 않을 것을. 그래서 순간순간이 너무나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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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4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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