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50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8.07 09:19
조회
44
추천
3
글자
11쪽

천계_살아있는 환상

DUMMY

사빈이 눈을 뜨자 숨꼭지들이 하나둘 빛을 냈다.


‘내가 얼마나 잤지?’

천천히 일어나 가슴 가득 숨을 들이마셨다.


문 옆을 지켜야 할 바나는 보이지 않았다. 사흘도 지루해하니 일찌감치 자리를 박차고 나갔을 것이다.


손을 들어 허공에 글자를 썼다.

손끝에서 빛이 나와 빛글이 되었다. 다음 마고를 위한 기록이었다.


“아란님처럼 친절하게 알려주고 싶었는데···.”

생각날 때마다 기록하고 있으니 도움이 될 것이다.


천계의 여러 가지 일들, 차를 만드는 비법, 인간세에서 조심할 일을 써 내려갔다. 영감과 바람잡이를 부르는 방법도 자세하게 적어두었다.


완성된 안내서는 아롱재의 어딘가 보이지 않는 허공 속으로 숨어든다.

다음 마고가 찾으면 그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어떻게 찾는지 알려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빈은 손을 내리고 중얼거렸다.


어지러워서 글자에 집중할 수 없었다. 매일 조금씩 써 내려갈 수밖에.


이불을 걷고, 마음은 벌떡 일어나려 했지만, 어지러워서 비틀거리다 주저앉았다.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문가에 서서 마음숲을 내려다보았다.

혼들이 탈을 쓰고 뛰고 날며 펄펄 기운을 흩날리고 있었다.


사빈은 심호흡을 몇 번 하고 창문을 열었다. 침묵의 결계가 사라지자 바깥의 소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혼들이 서로를 부르는 소리, 휘나래가 물살을 쳐내는 소리, 하늘 높이 별가루가 터지며 불꽃을 만드는 소리가 잇따라 들어왔다.


“벌써 시작했구나.”

사빈은 창틀에 기대어 섰다.


가시버시 축제는 부부와 연인을 위한 축제지만, 혼들은 혼알방 이웃과 함께 즐겼다.

옷과 장신구를 맞춰 입고 이웃들과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가시버시가 끝나면 바림창고에 유물을 맡기는 혼이 늘어난다. 하나씩 물건을 맡길 수 있으니 이때 만든 것이 많이 들어온다.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유물이 들어올까?’

사빈은 기대에 가득 차 미소 지었다.


놀뫼마당과 이즈막광장 사이, 구름다리 위에 대취와 초연이 보였다.

“저기 어디쯤 산여님과 다담님도 계시겠구나.”


둘씩 셋씩 짝을 지어 다니는 혼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숲을 떠나면 다시 만날 수 없고, 만난다 해도 기억할 수 없으니 최선을 다해 이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가시버시날은 염라부와 낙원, 영천옥에서도 차사들끼리 잔치를 벌인다.


대명천의 차사들은 따로 축하하지 않고 마음숲으로 모여든다. 얄리장터 열림날보다 더 시끌벅적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중앙황천에서 중천만이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할 것이다.


놀뫼마당을 내려보다가 문득 어떤 시선을 느꼈다.

사빈은 아래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순간, 백하와 눈이 마주쳤다.


사빈은 창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대감도 돌아보는구나. 상산대만으로는 부족하지.’


백하는 사빈의 손짓에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 날 기다린 거야?”

가슴이 콩닥거렸다.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다가 갑자기 멈추었다.


가슴 어딘가 꽉 막힌 바윗덩어리가 있어 온기를 내리눌렀다. 사빈은 가슴이 답답해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일단 뭣 좀 먹고. 나도 구경해야지.”


문으로 돌아서는데 지평선 위로 붉은 점이 떠올랐다.


붉은 점은 차츰 커지더니 붉은 구름 덩어리가 되었다.

바람에 일렁거리던 구름 덩어리가 사빈을 발견하고는 빛처럼 빠르게 달려들었다.


사빈은 질끈 눈을 감았다.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달라붙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아련하게 소리가 들렸다.

‘너는 나를 지울 존재구나. 네가 깨닫기 전에 없애주마.’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하얀 복도에 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그 옆으로 다리부터 천천히 어둠 속으로 묻히는 백하가 보였다.


‘대감···? 대감이 왜?’

몸을 비틀었지만, 밧줄에 묶인 듯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 속에 하얗게 빛나는 나무가 다가왔다.

붉은 구름이 구슬이 되어 둥둥 떠다녔다.

중천의 고사목과 비뢰수가 지나갔고, 하얀 깃털이 지나갔다.


모든 것이 뒤섞여 어지러웠다. 숨이 막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


“사빈님! 정신 차리시오!”

아득한 곳에서 백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빈은 그 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헉!”


백하가 사빈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녀의 창백한 이마에 손을 얹었다.

“괜찮으시오?”


“대감···, 어떻게···.”

“이즈막으로 가다가 보았소. 몸이 굳었더군.”

“이제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백하는 사빈을 들어 올려 창밖으로 나왔다.


사빈이 너무나 가벼워 공기주머니를 잡은 것 같았다. 그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가뜩이나 여린 몸이 많이 야위었다.


“위즐증가부터 들러야겠소.”

그는 사빈의 어깨를 감싸 안고 위즐증가로 날아올랐다.


사빈은 바람을 느끼며 흘끗 백하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어둠에 묻혀가던 그의 모습이 또렷했다.


‘꿈일 거야. 그런 일이 생길 리 없어. 기력이 약해지니 흉몽을 꾸는 거야.’

사빈은 고개를 돌렸다.


‘걸어가면서도 꿈을 꾸었잖아? 지금은 천력을 채우는 것이 먼저야.’

아니길 바라면서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


사빈은 깨어난 지 이틀 만에 날 수 있게 되었다.


위즐증가와 고샅공방에서 보양식을 잔뜩 보냈고, 용희는 하루에 세 번씩 강녕액을 다려주었다.


백하도 몇 번씩 아날빛숨 근처를 지나갔다.


찾아와 인사할 때도 있고, 지나쳐 갈 때도 있었지만, 어디로 가든 아날빛숨을 거쳐서 돌아갔다.


축제는 지날수록 신명이 더해졌다.

혼들은 지칠 줄 몰랐다. 날이 갈수록 흥이 올라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사빈도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려 이즈막 광장으로 찾아갔다.


광장의 남쪽, 나무 그늘에 앉아 길놀이를 구경하는데, 한얼이 다가왔다.

“사빈님! 이제 나오셨군요.”


“한얼님, 요즘도 인간세에 다니나요?”

“예. 자료를 찾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한얼은 지팡이를 내려놓고 사빈 옆에 앉았다. 그는 버릇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감은 안 보이네요. 사빈님 옆에만 있으면 바람처럼 나타나더니.”

“하하, 그 사이 정이 드셨어요?”


“정이라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한얼은 정색했지만, 사빈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려도 정이 드니까.


“인간세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은 없었나요? 사악한 기운이라든가?”

사빈의 물음에 한얼은 밧줄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상한 기운? 피천귀 말고는 없었는데요?”

“그런가요? 확실히 피천귀는 사람과는 기운이 다르죠.”


사빈은 자신이 본 환영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다훤 아저씨와 예사달 할머니를 만나면 그때 이야기해야지.


“가시버시날이라서 그런지 대취님과 산여님은 안 보이네요.”

“곧 혼인을 올릴 겁니다.”

“와, 정말 잘 됐어요. 선물도 준비해야지.”


즐거워하는 사빈을 보자 한얼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예사달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부터 인간세에서도, 마음숲에서도, 사빈 옆에 있는 지금도 그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너의 혼 조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원래 너의 것이라 끌어당기는 거야. 너 또한 거기 반응하는 거고.’


한얼은 광장을 돌아다니는 탈과 가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마음이 단지 혼 조각 때문이라고? 난 왜 중간자가 되었지? 오로지 사빈님을 위해서?’


여러 모양의 탈과 가면이 그들 앞을 지나갔다. 사빈에게 인사하느라 다가오기도 했다.


사빈이 혼들이 만든 화려한 옷을 보고 있다가 한얼을 불렀다.

“한얼님, 중천에서 만난 혼 기억해요?”


“그때 워낙 혼을 많이 만나서요. 어떤 혼 말씀입니까?”

“붙박이 혼이요. 모습도 지워져서 알아볼 수 없었어요. 영천옥에서보다 더 괴로워하던···.”


“기억납니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했죠.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왜 염라부에서 데려가지 않죠? 그 정도 시간이면 벌써 마음숲에 왔을 텐데요. 저기 있는 혼들처럼 즐겁게 지낼 수도 있고요.”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아서 일 겁니다.”

“자신이 풀 수 없는 거예요?”


“스스로 풀 수 있다면 처음부터 꼬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한얼은 마치 자신의 이야기 같아 벌떡 일어났다.


“사빈님, 우리도 길놀이를 따라가죠. 저는 처음이라 같이 걷고 싶습니다.”

한얼은 한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다른 손을 사빈에게 내밀었다.


“처음이라면, 당연히 안내해야죠.”

사빈이 한얼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자 한얼은 눈을 내리떴다.

‘닿으면 녹아버릴 듯···, 눈꽃같이 아름답고, 소중한···, 누이.’


한얼은 짐짓 밝게 웃으며 사빈의 손을 잡아끌었다.

“얄리장터 쪽으로 올라가실까요?”


이즈막 광장을 막 벗어나는데, 사빈은 이상한 냄새를 맡았다.


“한얼님, 무슨 냄새 안 나요?”

“냄새요? 촛불 타는 냄새인가요?”


사빈이 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여기선 한 번도 나지 않던 냄새예요. 인간세에서는 맡아본 적 있는데···.”


다시 냄새를 맡으려 하니 초와 불꽃 냄새가 섞여버렸다.

낯선 냄새는 완전히 사라졌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무언가 이상한 기운이 스쳐 갔다. 몹시 서늘하고 기괴하여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사빈은 재빨리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들뜬 혼들이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한얼님! 여기 뭔가 지나가지 않았나요?”


“예?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빈님, 어디 불편하신가요?”

한얼이 심각한 표정으로 다가섰다.


“아니오, 제가 잘못 봤나 봐요.”

사빈은 초점 없는 눈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혼이 섞였지만, 그중에 이상한 기운은 없었다.


그 정도로 기괴한 기운이라면 상산대원들이 모를 리 없다.

‘천력이 떨어지니 헛것이 보이는구나.’


사빈은 한얼과 걸음을 맞추며 멀어졌다.


그들이 지나간 곳에서 검은 눈이 번득였다.

수많은 탈과 가면 사이, 고운 가면과 화려한 옷으로 몸을 감싼 무언가가 사빈을 지켜보고 있었다.


숨도 쉬지 않고 먹지도 않는 기괴한 존재는 몸을 돌려 혼들 사이로 사라졌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아날빛숨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5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3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2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4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5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5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94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4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