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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시(錄始)의 서재

아날빛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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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록시(錄始)
작품등록일 :
2023.05.10 10:15
최근연재일 :
2023.09.15 08:45
연재수 :
176 회
조회수 :
13,206
추천수 :
431
글자수 :
916,352

작성
23.07.25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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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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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글자
12쪽

천계_남아있는 향기

DUMMY

마음숲은 축제 분위기였다.

가시버시날은 한 달이나 남았지만, 혼들은 물론이고 차사들까지 들떠서 이미 축제나 다름없었다.


사빈이 지친 걸음으로 들어서는데 용희가 뛰어왔다.

“마고님! 이거 어때요? 이거!”


용희는 찻잔 가득 누렇고 걸쭉한 물을 담아왔다. 사빈을 보자마자 서두르느라 사 분의 일은 쟁반에 쏟아졌다.


사빈은 용희를 보자 놀라서 눈을 떼지 못했다.

머리카락은 흐트러지고, 얼굴에는 검댕이가 덕지덕지 묻었다. 소매 끝과 치마에도 거뭇거뭇 얼룩이 번졌다.


“폭죽이라도 만들었어?”

“아, 별거 아니에요. 그보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용희는 잔을 들어 사빈의 입술에 갖다 댔다.


진한 약재 향기가 났으나 맛은 텁텁하고 씁쓸했다. 사빈은 눈을 찡그렸다.

“맛이 왜 이래? 약재를 너무 섞었는데?”

“그래요? 좋다는 건 다 넣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미강수가 완성작 아니었어? 그거 좋았는데.”

“너무 약한가 싶어서요···. 보양차로 만들려다가···”


“그러게. 내가 뭐랬니? 중도를 지키라고 했잖아.”

주방에서 초연이 가리개를 걷었다. 그녀 역시 찻잔을 들고나왔다.


“아무리 좋아도 넘치면 모자라느니만 못하다고. 사빈아, 이건 어떠냐?”

“초연님도 새로운 차를 만드시려고요?”


“좋은 생각 같아서 말이다. 넌 새로운 술 만든다고 하지 않았어? 지난번에 실패하고는 시작 안 했지?”


“초연님도 참···, 술이 그렇게 빨리 만들어지나요?”

“그래서 나도 해보려고. 잘되면 바람길 연회에도 내놓고, 얄리장터에서도 팔고. 호호.”


사빈은 초연이 내놓은 차도 한 모금 맛을 보았다. 이번에는 너무 밋밋했다.

“초연님, 이건 흰 종이 같아요. 아무 맛도 안 나는데요?”


“그래? 왜 그러지? 풋풋한 맛이 낫는데?”

“풀냄새를 내려고요?”

“아아니, 아침의 고요한 숲 향기를 내려고 하지.”


‘아···. 무슨 꿈에서나 낼 것 같은 맛을···.’

사빈은 한숨 대신 다른 구실을 찾아냈다.


“같이 상생농장에 가서 찾아보죠. 뭐가 좋은지. 아, 그리고 용희는···.”

“예? 뭐요?”


“인간세에서 마셨던 차가 있는데, 그게 도움이 될 거야.”

사빈은 짱짱 만화방에서 마셨던 대추차를 생각했다.


은서가 내준 대추차의 묵직하고 달콤한 맛이라면 용희가 만들려는 차에 잘 맞을 것이다.


“와, 그럼 당장 해볼까요?”

“아니···. 조금만 있다가.”

사빈은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둘러댔다.


초연이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믐 외출도 아닌데 낯빛이 창백하고 기운도 약했다.

“아구, 다움성 갔다 오는 것도 이리 힘들어서야···. 알았다. 얘기는 나중에 하자.”


사빈은 서둘러 아롱재로 올라갔다.


*


너무나 피곤해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아날빛숨에 돌아오면 편히 쉴 거라 기대했는데, 지금 마음숲에는 쉴 곳이 없었다. 온통 설렘으로 가득하고, 모든 이들이 들썩거렸다.


사빈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숨꼭지들이 마고를 환영하며 자르락거렸다.

“아, 힘들다. 힘이 다 빠져나간 것 같아.”


눈을 감으니 의식이 몽롱해졌다.

몸이 어둠 깊숙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바닥에 붙들려 사라질 것 같을 때 소리가 들렸다.


‘사빈.’

이번에는 여자도 남자도 아닌, 아이의 목소리였다. 맑고 고왔다.


사빈은 눈을 뜨고 싶었지만, 눈꺼풀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소리가 다시 들리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빈은 힘겹게 눈을 떴다.

누가 자신을 불렀든, 실제가 아니라 꿈이라도 한 번 더 확인하고 싶었다.


*


사빈은 나도마중 안내소 앞에서 서성거렸다. 한얼과 대취, 산여가 혼을 인도하는 날이다.


“마고님, 누구 기다리세요?”

아리영이 혼맞이 준비를 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응. 인도자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아날빛숨에서 기다리시죠. 제가 전해드릴게요.”


“아냐, 좀 급해서 그래. 삼을라는?”

사빈이 삼을라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아리영이 쿡쿡 웃음소리를 냈다.


“혼알방에 갔어요. 공명을 잃은 혼이 있어서 도와준대요.”

“대단하네? 삼을라가 그런 일까지?”


아리영의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한요재 가까이 있는 혼알방이니까요. 지도가 있으니 설명해도 되는데 굳이. 그래야 정확하다나.”


“어쩐지···.”

사빈도 고개가 끄덕여졌다.


기다리기 지루해진 아리영이 작은 접시에 요리를 덜어왔다.

여러 종류의 채소를 가늘게 썰어 양념에 버무렸는데, 고명으로 콩알만 한 완자를 올려놓았다.


“마고님, 이거 맛 좀 보세요.”

“와, 색깔 참 곱다. 이게 뭐야?”

“가시버시날 요리 대결한다잖아요? 위즐증가에서 내놓을 거라는데, 맛보라고 가져다줬어요.”


사빈은 냄새를 맡고, 천천히 씹으면서 맛과 느낌을 살폈다.


“새콤한 맛이 더 들어가면 좋겠다. 바래돌죽이 싱겁잖아? 이 초배는 빼는 게 좋겠다.”

“그러네요. 씁쓸하다고 느꼈는데, 이것 때문이군요.”

아리영은 접시를 치웠다. 사빈이 말한 대로 아직은 비밀이었다.


“이것만 내놓는데?”

“아뇨. 하나가 더 있다는데 아직 생각중이래요. 시간도 많이 남았고.”


마중길로 혼 무리가 들어섰다. 아리영에게는 인도자가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혼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사빈은 맨 뒤에서 들어오는 한얼에게 다가갔다.


“한얼님!”

“사빈님. 여기까지 무슨 일입니까?”

“부탁할 것이 있어서요.”


사빈은 한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대취님, 산여님. 저희 먼저 가도 될까요? 가볼 곳이 있어서요.”


“당연한 걸 뭘 묻는댜? 우리도 금방 갈 거고만.”

대취가 싱글벙글거리며 한얼과 사빈을 번갈아 보았다.


“어디 가는지는 말 안 하겠고만? 그치?”

“예. 그럼···.”

사빈은 한얼의 지팡이를 잡아끌고 샛강으로 들어섰다.


“배웅문 밖으로 나갈 건데, 저 좀 인도해주세요.”

“거긴 마음숲 밖입니다. 그믐이 아니어도 나갈 수 있나요?”

“한긋장벽 근처에서만 맴돌면 돼요.”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한얼은 꼿꼿하게 서서 지팡이에 힘을 주었다. 정당한 이유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럴 줄 알았지.’

사빈은 대답을 이미 준비해왔다.


“바나를 어디서 어떻게 만들었는지 늘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축제 때문에 바빠서 시간을 낼 수가 있어야죠. 곧 그믐이라 인간세에도 내려가야 하고.”


사빈이 부탁할 수 있는 상대는 한얼뿐이었다.


상산대감 백하와는 이미 장벽을 살펴보았다. 축이 틀어진 것이나 틈이 생긴 것도 황제에게 알렸기에 또 부탁할 수 없었다.


피천귀의 공격을 막을 능력자 이면서, 입이 무겁고, 그럴듯한 이유를 댈 수 있는 상대여야 했다.


“삼도천에 떠다니는 혼 찌꺼기로 그런 귀여운 강아지를 만들다니 너무 신기해서요. 빨리 보고 싶어요.”


“그런 이유라면 바로 알려드리죠.”

한얼은 뿌듯해하며 활짝 웃었다. 그런 일이라면 얼마든지.


*


불천수 강가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빈은 불천수를 내려다보며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너무 늦었나···.’


한얼은 강을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했다.

“저기 혼 찌꺼기들이 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운이 좋고 힘이 있는 덩어리를···.”


사빈은 한긋장벽에서 강 쪽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마고의 반지가 부르르 떨었다. 마고가 갈 수 있는 최대치였다.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불천수와 반계의 검은 장막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선가 향기가 느껴졌다. 사빈에게도 낯익은 향기였다.

‘라온향? 이루님?’


사빈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전이야. 여기를 지나갔어.’


사빈은 검은 장막을 지켜보며 이안남존에게 전언을 보냈다.

그녀의 마음이 두꺼운 장막을 뚫고 라온성까지 다다를 리 없지만 부름에 대답하고 싶었다.


‘이루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게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사빈이 검은 장막을 지켜보는데 한얼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거기는 위험합니다.”


사빈은 휘청거리다가 중심을 잃었다.

한얼이 쓰러지는 그녀의 등을 받쳤다. 팔에 힘을 주어 빠르게 사빈을 돌려세웠다.


그와 가까이 있으니 가슴이 따끔거렸다. 돌에 쓸리는 듯한, 나무껍질에 긁히는 듯한 느낌.

한동안 아무렇지 않았는데 갑자기 증상이 또렷해졌다.


‘마음이 아니었어.’

사빈은 똑바로 일어나 화끈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건···, 마음이 아니야. 몸이 아픈 거야.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한얼도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가슴에 손을 댔다가 내렸다.

‘마음이 아니면···. 뭐지?’


“바나는 데려오지 않으셨네요.”

“아, 혼알방을 부탁하고 왔어요. 팬들도 관리하고.”


사실은 일부러 데려오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강아지를 쫓다가 정작 할 일을 놓치면 안 되니까.


사빈은 한긋장벽 가까이에서 돌아섰다.


“한얼님, 중간자는 반계에 들어갈 수 있는 거 아세요?”

“예? 처음 듣는데요?”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니라서 갈 수 있어요. 천계의 기운도 있으면서 피천귀를 만든 사람의 기운이 남아있으니까.”


“아, 그래서 스승님이 해날품곡에 가지 말라고 하셨군요.”

한얼이 깨달음을 얻은 눈빛으로 강을 내려다보았다.


“혹시 피천귀를 상대하더라도 강을 건너지 마세요. 천선인은 경계에 서기만 해도 위험을 느끼지만, 중간자는 못 느끼거든요.”


“알겠습니다.”

한얼이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사빈은 이마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저, 부탁이 있어요.”

“무슨···?”


“다음에 중천에 가시면 고사목들에게 씨앗을 전해주세요. 비뢰수에게 과자와 차를 갖다주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 일이라면 자신 있습니다. 제가 보살피는 걸 잘하거든요. 잉걸···.”

한얼은 말을 하다 말고 허허 웃음을 지었다.


“예, 한 번 인연을 맺었으면 의리를 지켜야죠. 중천에 갈 때마다 들러 보겠습니다.”

“고마워요.”


갑자기 한얼의 뒤로 불천수의 붉은 물이 치솟아 올랐다.

사빈은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피같이 붉은 물기둥이 한얼을 삼킬 듯 달려들었다.


“안돼!”

몸을 던져 한얼에게 달려드는 핏물을 막아섰다. 힘껏 달려 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발이 꼬여 휘청거리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지 않으려 붉은 강물로 손을 뻗었다.

손이 물에 닿아야 하는데 딱딱한 흙바닥이었다. 손바닥에 피가 맺혔다.


“뭐 하신 겁니까?”

한얼이 놀란 얼굴로 사빈을 일으켜 세웠다.


사빈은 다친 손을 붙잡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주위는 마른 땅이었다. 불천수조차 붉은색이 아니라 맑은 물이었다.


“여기 강물이 막 치솟아서···.”

한얼을 올려다보았다.


‘한얼님에게 닥칠 일이야. 붉은 물은··· 피? 아저씨가 해날품곡에 가지 말라고 하신 이유가···?’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아저씨는 알고 계셨던 거야. 한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빈은 한얼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다훤 아저씨는 아직 안 오셨죠?”


“곧 오실 겁니다. 예사당도 정리해놓아야죠. 혼자서도 가끔 머무시거든요.”


한얼은 예사당에 가기 전에 또 하나 할 일이 있었다. 회향미곡 잉걸둥지를 돌아보는 일.


“곧 그믐 외출이에요. 제가 돌아왔을 때 아저씨가 마음숲에 계시면 좋겠네요.”

사빈은 다훤과 예사달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며 손을 모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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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천계_기록추적자 23.08.11 43 3 11쪽
119 천계_잉걸둥지에 이르다 23.08.11 41 3 11쪽
118 천계_얼음칼 아움 23.08.10 43 3 11쪽
117 천계_백하의 다짐 +2 23.08.09 48 3 12쪽
116 천계_바람길 연회 23.08.08 43 3 10쪽
115 천계_돌아온 온사랑 23.08.08 46 3 13쪽
114 천계_살아있는 환상 23.08.07 44 3 11쪽
113 천계_가시버시 축제 23.08.06 45 3 11쪽
112 그믐_수명환의 활약 23.08.05 46 3 11쪽
111 그믐_근원을 향한 환영 23.08.04 43 3 11쪽
110 그믐_그룹 갤럭시의 연주 23.08.03 43 3 10쪽
109 그믐_인연 연결자 +2 23.08.02 46 3 11쪽
108 그믐_숨은 후원자 +2 23.08.02 46 3 11쪽
107 그믐_외길과 산돌 23.08.01 42 3 12쪽
106 그믐_나무새가 찾는 주인 23.07.31 42 3 11쪽
105 그믐_하이브리드 인간 23.07.31 42 3 12쪽
104 그믐_사라남 종합병원 23.07.30 44 3 11쪽
103 예사달_몸은 없어도 마음이 있다 23.07.29 43 2 12쪽
102 예사달_다움성의 초대 23.07.29 43 4 11쪽
101 예사달_한얼이라 부르게 23.07.28 42 3 12쪽
100 예사달_신령수 동명 +2 23.07.28 45 3 11쪽
99 예사달_제자를 들이다 23.07.27 41 2 11쪽
98 예사달_빙천골 능금원 23.07.27 43 2 12쪽
97 예사달_불천수 전투 23.07.26 44 2 11쪽
96 예사달_다훤과 만나다 23.07.26 44 2 11쪽
95 예사달_경계의 떠돌이 23.07.25 44 2 11쪽
» 천계_남아있는 향기 23.07.25 43 2 12쪽
93 천계_동녘뜰 사빈재 23.07.24 43 2 11쪽
92 천계_다움성 온새미실 23.07.23 43 2 11쪽
91 천계_새로운 소식 23.07.22 42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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